산천재
德山卜居(덕산복거) 덕산에 터를 잡고서/
春山低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 서라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을 건가/
銀河十里喫猶餘(은하십리끽유여) 십리 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題德山溪亭 제덕산계정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저 무거운 종을 좀 보게나/
非大?無聲 (비대구무성)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그러나 그것이 어찌 지리산마 하겠소/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
산천재 편액위의 신선들이 바둑 두는 모습의 벽화
중국에 許由(허유)라는 隱者가 堯(요) 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맡아 달라는 말을 듣고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자,
그 앞을 지나던 巢夫(소부)라는 사람이 그 까닭을 듣고는 그 더러운 물을 자기 소가 먹을까 봐 강 위쪽으로 고삐를 끌고 갔다는
전설을 그린 潁川洗耳圖(영천세이도)
소로 쟁기를 켜는 농부의 모습 벽화
남명선생이 심으셨다는 매화나무 산청 3매중 한구루이다.
산천재 앞 벽계에서 소나무가지가 마치 남명선생의 기개를 대변하는듯합니다.
산천재(山天齋)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 사리 산 72
조선중기의 위대한 儒賢이며 뛰어난 실천 道學者였던 南冥先生이 晩年에 講學하던 山天齋.
南冥 曺植 {燕山君 7年 1501∼宣祖 5年 1576. 자 건중, 호 山海, 本貫昌寧}.
남다른 재질(才質)로 일찍부터 學德을 갖추어 大成하였으나 사환(仕宦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평생(동안 선비와 處士로써 굳건히 일관(一貫)하였다.
30살에 처가인 김해 대동 산해정(주동리 원동부락)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38세 때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시작으로 여러 번 벼슬이 제수(除授)되고 王이 面對하기를 請(징소(徵召)) 하였으나
매번 상소(上疏 봉사封事))로써 의견을 개진하였을 뿐 나아가지 않았고,
55세때 명종이 단성현감을 내리자 사직(辭職)하면서 疏(소)를 올리자 명종은 大怒(대노)...
사후(死後) 光海君 7年m1615)에 領議政에 (追贈되고 諡號를 文貞이라 하였다.
郭再祐(곽재우), 김우옹, 鄭仁弘(정인홍), 정구, 姜翼(강익), 최영경, 조종도 등 수많은 제자가 전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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