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남명 조식선생과 덕천서원

문근영 2011. 12. 31. 10:39

 시정문(時靜門)  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

 

  중안의 의당(敬義堂) 좌우로 서재

 

 진덕재

 

 수업재

 

 덕천서원과 경의재편액

 강당 대청에서 어느학교 10여명의 여학생들이 가야금을 배우고 있더이다. 남명께서 흔쾌히 ....

 

 

 경의당중건기

 

 경의당중건상량문

 

 경의재중수기

 

 경의당중건기

 

 덕천서원

 

 덕천서원사우상량문

 

 

 신문(神門)

 

 숭덕사(崇德祠)

 

 소슬대문앞 남명이 신었다는 은행나무

 수령이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원주 둘레가 463cm)

 

 洗心亭(세심정)

 남명의 제자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이 1582년(선조 15)에 덕천서원 유생들의 휴식처로 세운 덕천강변의세심정.

 

 세심정기

 

   냇물에 목욕하며
      온몸에쌓인 사십년간의 허물   천섬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丁丑秋 閔性洙謹書

덕천서원(德川書院)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  
남명 조식(1501∼157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학문을 닦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에 지었고, 광해군 원년(1608)에 사액서원이 되어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았다.
고종(재위 1863∼1907)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외삼문, 동재와 서재, 강당,  신문, 사당  등이며 서원앞 개울가에는 세심정이 있다.

세심정 편액은 일중 김충현의 글씨..


南冥 曺植 {燕山君 7年 1501∼宣祖 5年 1576.  자 건중, 호 山海, 本貫昌寧}.
남다른 재질(才質)로 일찍부터 學德을 갖추어 大成하였으나 사환(仕宦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평생(동안 선비와 處士로써 굳건히 일관(一貫)하였다.

30살에 처가인 김해 대동 산해정(주동리 원동부락)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38세 때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시작으로 여러 번 벼슬이 제수(除授)되고

王이 面對하기를 請(징소(徵召)) 하였으나 매번 상소(上疏 봉사封事))로써 의견을 개진하였을 뿐 나아가지 않았고,

55세때 명종이 단성현감을 내리자 사직(辭職)하면서 疏(소)를 올리자 명종은 大怒(대노)...

사후(死後) 光海君 7年m1615)에 領議政에 (追贈되고 諡號를 文貞이라 하였다.

郭再祐(곽재우), 김우옹, 鄭仁弘(정인홍), 정구, 姜翼(강익), 최영경, 조종도 등 수많은 제자가 전수 받았다.
鄭仁弘(정인홍1535-1623)은 仁祖元年 89세에 ?形(정형) 당했다 즉 시체를 찢었다.

문인들의 특징은

1,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 열중,

 2,지리산자락을 중심으로 학풍을 일으켰으며, 

 3,국가위기 상황에는 義兵倡義(의병창의) 하였다.

1576년(선조 9)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최영경, 하항 등 사림(士林)들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며 조식유적지(사적 305) 내에 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중건되었다.

1609년(광해군 1)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덕천(德川)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덕천서원은 강우유맥 남명학파의 본산이 되었으며 인조반정 등으로 정치적 풍파를 겪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유적지 경내와 인근에는 덕천서원과 함께 산천재(山天齋). 세심정(洗心亭).조식묘 등이 있다.

 

 

출처 : 참 나를 찾아 산사로의 여행
글쓴이 : 木 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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