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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탁번]폭설(暴雪)-[심재희]폭설-[공광규]폭설-[한서정]폭설

문근영 2011. 12. 20. 09:52

폭설(暴雪)

 

           오탁번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버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이 곡허것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시집『손님』황금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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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설

 

         심재휘

 

 

밤에 편지를 쓰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겉봉에서 낡아갔다
회귀선 아래로 내려간 태양처럼
따뜻한 상징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거친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눈싸움을 하며 추억을 노래했으나
단단하게 뭉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설차가 지나온 길은 다시 눈에 덮이고
눈 먹은 신호등만 불길하게 깜박거렸다
바람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였으므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였다 모두들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수상한 암호 만지듯
동전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어두운 창고에서 첫사랑을 생각해야 했다
언 손을 불며 자전거 바퀴를 고치다가
씀바귀며 여뀌며 쑥부쟁이를 몰래 생각하였다

 

 
-시집『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문학세계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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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공광규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갓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 오시며
자꾸자꾸 폭설로 지워주신다.

 

 

-시집『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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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

 

          한서정

참았던 이야기다, 끝끝내 못다한 말
다 못쓰고 떠났던 말, 이제 와서 쏟아낸다
전부를 받아 달라며 온 몸으로 말한다.


-월간『샘터(시조)』(2006, 2월)

 

 

출처 :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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