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이영옥] 폭설

문근영 2011. 12. 20. 09:48

 

폭설

 

이영옥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땅따먹기처럼

얼룩덜룩하게

무엇인가를 구분 지으며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으로

 

저녁 일곱 시가 여섯 시를 감싸 안았습니다

숨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부터 안기고 싶은 거니까

안긴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것과 같은 거니까

하얀 색으로 덮는 것만큼 완벽한 이중성은 없으니까

 

처음에는

순한 눈망울들이 어둠 속에서

껌벅거렸는데

기어이 백 년만의 폭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차편이 끊겨 지키지 못한 약속

휘몰아치는 눈발처럼 당신을 떠났습니다

내가 가려던 귀가의 방향은 영 헝클어졌습니다

 

급한 이별도 잠깐 뒤로 미룰 수 있다는

뉴스를 들은 것도 같은데 휴교령이 내려지고

눈사람처럼 외롭게 웃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났습니다

 

얼굴은 바꾸었지만 피를 바꾸지 않은 도시

입을 벌리면 녹다 만 말들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제설차가 올 때까지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시와 미학』(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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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옥 / 1960년 경북 경주 출생. 2004년 《시작》 신인상,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사라진 입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서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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