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시

[스크랩] 몽당연필 / 문근영

문근영 2011. 3. 23. 20:40

몽당연필 / 문근영

 

 

초라한 양철 필통 속에서

심이 뚝 부러진 채 발을 포개고 누운

몽당연필들을 본다

 

한 겹씩 향나무의 속살 벗길 때마다

또르르 말려 떨어지는 향기, 까맣게 묻어나고

한 벌의 누더기 같은 세월, 갈고 다듬으면

몸속의 중심 감출 도리가 없다는 듯

무뎌진 연필의 뼈가 아픔 끝에 살아난다

 

뼛속에 축적된 단단함으로 꾹꾹 눌러 쓴

삶의 문장들이 물관을 타고 내려와

소용돌이치고 있다

고요해지면 환히 드러나는 뾰족한 생각들

머리에 이고 온 지우개로

하나, 둘 지워 본다

 

나이테에서 태어난 삶의 무늬와

수레바퀴처럼 구르던 어제의 흔적이 그리워

닳고 닳아 한없이 작아져도

또 한 번 휘영청 나이테를 감는다

출처 : 대구문학신문 - 시야 시야
글쓴이 : 문근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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