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을 찾아서

[스크랩] 구미 척화비

문근영 2011. 1. 21. 08:52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움 ’으로 되어 있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구미척화비(龜尾斥和碑)  경북 구미시 구포동
척화비란 조선 고종 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세력의 침략을

온 국민에게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 각지의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바위에 비문을 새겨 놓았으며,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략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으나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경고하노라”

고종 8년(1871) 전국에 동시에 세운 것으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들은 모두 철거되었으나,
이처럼 몇 기의 비들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옛 역사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높이 1.75m 폭 0.7m로 1871년 고종(高宗) 8년에 전국 유일(全國 唯一)의

자연석(自然石)에 새긴 척화비(斥和碑)이다.

 

척화비(斥和碑)는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전국의 주요도시에 세운 비석.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키려다가 실패한 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여 1866년 9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에 프랑스는 자국 선교사의 처벌 등을 문제 삼아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 중국이 겪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다면 나라를 파는 것이고,
그들의 위협에 굴복하여 교역을 허락한다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굳세게 싸울 것과 그들의 문호개방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병인양요에서 표출되었던 쇄국양이정책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도굴사건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후 한층 더 강화되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겼는데 이것이 척화비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갔을 때 일본공사(日本公使)에 의하여  대부분 철거되었는데,
현재는 서울특별시 경복궁 등에 남아있다.
★장기 척화비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107 지정번호
★영양 서부리 척화비. 영양군청 비석군에 있다
★신창 척화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 236 호.
★홍성 척화비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산 5 (도 문화재자료 제 163 호
★신창 척화비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 236 호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948-1 부산광역시립박물관
★경북 구미 구포동 척화비 유일하게 바위덩어리에 새겨졌다.
★옥천척화비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4-2번지
★가덕도 척화비 부산 강서구 성북동 344 천가초등학..
★청주척화비<시도기념물 제24호 :청주 >  
★함양척화비 경남 함양군 읍 운림리 349-1 (문자 264호)
★청도척화비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15-10
★창녕척화비 만옥정공원내
★여산 척화비 익산 여산 동헌내
★남해 노량마을앞  해성횟집앞

 

출처 : 참 나를 찾아 山寺로의 여행
글쓴이 : 木 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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