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유하
―무림 일기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차도살인지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용했던 천하대제 만박
천상옥음 냉약봉, 중원제일미 녹부용이 그의 진기를 분산시킨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수하천병의 벽력장에 철골지체 천마대제가 어이없이 살상당한 건
곁에 있는 사람도 자객으로 변한다, 삼라만상을 경계하라는
무림계의 생리를 너무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천마대제가 죽자 무림존패의 위기를 느낀 동창서열 제오위 공두일귀 동문 혹은
낙성천마를 기습, 금나수법으로 제압한 뒤 고수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무력 18년 겨울, 고금성 주위엔 무림의 앞날을 걱정하는
천수신마, 건곤일검, 남해일노 등 내공이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른
초고수들이 암암리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벽안의 무사들에게 빌린 천마벽력탄과 육혈포를 가지고
동창서열 제삼위 무적금괴 승룡을 제압 중원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서역의 천마벽력탄 앞에서 무적금괴의 철풍장 정도는 조족지혈이었다
무력 19년 초봄, 칠성단이란 자객의 무리들이 난데없이 출몰해
무고한 백성들을 자객훈련 시킨다며 백골계곡에 잡아가둔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소림삼십육방 통과보다 더 악명 높다는 지옥십관 훈련
그러나 대부분 지옥일관도 통과하지 못하고 독가시 채찍에 맞아 원혼이 되었다
그 무렵 하난 땅에선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그날은 꽃잎도 혈편으로 흐드러졌고 봄비도 피비린내의 살점으로 튀었다
이 엄청난 혈채를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가
무력 19년 가을, 광두일귀는 숭산의 영웅대회에서 잔혼귀존 폭풍마독등과
형식적인 비무를 거친 뒤 무림맹주의 권좌에 등극하였다
그날 무협신문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하며
혈의방 무사들이 통천가공할 무공을 익히며 호시탐탐 중원을 노리는 이때
강력한 무공의 소유자가 중원을 다스려야 한다고
수심에 가득찬 기사를 썼지만 대부분 인면수심들이었다
천마대제는 비명에 갔지만 강자존 약자멸!
이 무림의 대원칙이 깨질 것을 우려한 광두일귀 및 일부 뜻있는 고수들은
무력은 무력으로밖에 지킬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 앞에 숙연해하며
한층 겸허하게 무공연마에 정진할 것을 다짐했다
(『무림일기』.중앙일보사.1989)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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