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그늘
이규열
한 때 나에게 집은
공중에 떠있는 산이었다오르면
오를수록 밑으로 떨어지는
해독할 수 없는 지도의 낯선 산이었다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회색빛 청춘을 지탱하고
풀지 못할 암호 같은 시절은
오르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지나갔다
두 세 개의 산을 건너고
문득 한 여자와 새로 만든 집에서
아이들은 핸드폰 문자처럼 빨리 떠나가고
이제 집은 여자가 원하는 거실의 평수만큼
밑으로 푹푹 빠지는 바다가 되었다
날아다니는 바다가 되었다
빠진 채 붕붕 날아다니는
집은 이제 나에게
―『작가와사회』 (2010. 봄)
▶이규열=1957년 울산 출생, 1993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왼쪽 늪에 빠지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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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우리의 모든 것이었다. 집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죽을 때까지, 요람이 되었다가 무덤이 되기까지, 많이도 웃고 울었다. 집은 높이 올라야 할 비탈진 산이기도 했으며, "풀지 못할 암호"이기도 했다. 여자는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베란다에 펄럭이는 하얀 빨래를 널었다. 남자는 간간이 유리창을 닦으며 몇 번 웃었다. 웃는 사이 집도 덩달아 조금씩 늙어가고 넓어졌다. 깨어 있을 땐 밥을 먹고, 밥을 먹지 않을 땐 잠을 잤다. 아이들은 이제 하나씩 둘씩 떠나가고 떠나갔다. 집을 지키는 것은 이제 집의 몫이다. 집은 단 한 뼘도 걸어가지 않았다.
- 안효희·시인/ 국제신문 [아침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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