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된 詩

[이규열] 집, 그늘

문근영 2010. 5. 22. 17:40

집, 그늘

 

이규열

 

 

 

한 때 나에게 집은

 

공중에 떠있는 산이었다오르면

 

오를수록 밑으로 떨어지는

 

해독할 수 없는 지도의 낯선 산이었다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회색빛 청춘을 지탱하고

 

풀지 못할 암호 같은 시절은

 

오르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지나갔다

 

두 세 개의 산을 건너고

 

문득 한 여자와 새로 만든 집에서

 

아이들은 핸드폰 문자처럼 빨리 떠나가고

 

이제 집은 여자가 원하는 거실의 평수만큼

 

밑으로 푹푹 빠지는 바다가 되었다

 

날아다니는 바다가 되었다

 

빠진 채 붕붕 날아다니는

 

집은 이제 나에게

 

 

 

―『작가와사회』 (2010.  봄)

 

 

▶이규열=1957년 울산 출생, 1993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왼쪽 늪에 빠지다' 외

--------------------------------------------------------------------------------------------------

-집은 우리의 모든 것이었다. 집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죽을 때까지, 요람이 되었다가 무덤이 되기까지, 많이도 웃고 울었다. 집은 높이 올라야 할 비탈진 산이기도 했으며, "풀지 못할 암호"이기도 했다. 여자는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베란다에 펄럭이는 하얀 빨래를 널었다. 남자는 간간이 유리창을 닦으며 몇 번 웃었다. 웃는 사이 집도 덩달아 조금씩 늙어가고 넓어졌다. 깨어 있을 땐 밥을 먹고, 밥을 먹지 않을 땐 잠을 잤다. 아이들은 이제 하나씩 둘씩 떠나가고 떠나갔다. 집을 지키는 것은 이제 집의 몫이다. 집은 단 한 뼘도 걸어가지 않았다.

- 안효희·시인/ 국제신문 [아침의 시]

'뉴스가 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장욱] 손가락 진화  (0) 2010.06.03
[곽현의] 길 위에서 선  (0) 2010.05.25
[서정주] 부처님 오신 날  (0) 2010.05.20
[손진은] 어느 생애  (0) 2010.05.18
[김춘수] 인동(忍冬)잎  (0) 2010.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