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보는 엉뚱한 시각과 진실의 깨달음 / 신달자
- <뼛속까지 내려가 써라>
이 말은 미국인들의 글쓰기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나탈리 골드버그의 책이름이다. 이 책을 보노라면 정말 글쓰기가 볼품없는 인간 삶의 자잘구레한 것들이 시가 되지 않고는 못배기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골드버그는 종일 음식점에서 야채를 썰어내는 일을 하다가 쎈티고어 서점에서 우연히 에리카 종의 시집 <과일과 채소>라는 얇은 시집을 보게 된다.
그것은 요리에 대한 시였다. '아차! 내가 종일 시에 대한 노동을 했구나' 하고 감탄하면서 '이런 쉬운 것이 모두 시가 되다니' 하며 놀라워한다.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시를 찾는 일, 그 과일과 야채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는 일, 다르게 보이는 그 부분을 재빨리 기록하라 그것이 자신의 마음의 본질적 외침이라고 골드버그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의자에 앉아 있다. 장 너머로는 숲이 보이고 옆에는 친구가 있으며 앞에는 선생님이 서 있다. 다른 여러 가지 정황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지금 여러분이 의자에 앉아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라는 것이 무엇인가. 강의를 듣기 위해서 반드시 그 의자에 앉아야만 하는가. 서 있다면 그것은 불안하고 우선 다리가 아파서 여러분은 내 강의를 듣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 있는 것에 여러분은 서툴다. 늘 앉아 있었고 걷는 일에도 쉽게 싫증을 느낀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두 정거장을 가는 지하철에서도 앉기 위해 안절부절 못했던 학생은 여기 없는가. 어쨌든 여러분과 나는 오늘의 현대의 이기와 문명의 혜택으로 의자와 매우 절친하다. 그런 의자를 우리가 시로 쓴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는가. 늘 보고 앉고 지나치는 이 일상적 생활도구를 시적 사물로 볼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말하지만 절대로 어떤 기준에 의해 조절하지 말아야 한다. 상식을 벗어보라. 자신의 내부로 깊이 잠수해 내면의 바다로 떠다닐 때 진정으로 스스로 해야만 하는 말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 글쓰기에 자신을 맡길 때 사악한 논리라는 그물에 걸려들지 않을 것이다.처음 발상은 아무래도 좋다. 첫 느낌을 존중하라.가령 사팔뜨기 눈으로도 사물을 보라. 어떻게 사물이 달라지는지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이 시는 2000년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성용의 <의자>라는 시다.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을 지니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한번 붙잡은 먹이는 좀체로 놓아주려하지 않는
근성을 먹이들은 잘 모른다
이빨 자욱이 아무리 선명해도 살이 짓이겨져도 알 수 없다
이 짐승은 혼자 있다고 해서 절대로 외로워하는 법도 없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들지 않는다 오직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고는 편안히 마비 된다 서서히 안락사 한다
제발 앉아달라고 제발 혼자 앉아달라고 호소하지도 않는
의자는
누구보다 안락한 죽음만을 사랑하는 네 발 달린 짐승이다
뭔가 느낌이 올 것이다. 평소 우리가 앉는 도구로 사용하던 평범한 사물이 네발 달린 짐승으로 그것도 먹이를 잡아먹는 흉측한 짐승으로 보고 있는 이 <의자>는 어떤 의자인가. 하이데거는 사물이란 감각에 주어진 다양성의 통합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 말을 이 시에 인용해 본다면 사물+실체+각도라는 줄거리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의 다양성과 통합성을 통하여 의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이미지를 연출해 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인의 경험과 상상은 의자라는 지극히 일상화되어 버린 생활도구를 역사와 문명 속에서 인간이 사물화되어가는 의식화의 변화를 그 의식화의 변화가 서서히 무디어져 드디어 안락사하고 있는 현대 인간성의 속성을 꼬집고 있다.
의자는 지금까지 매우 낭만적인 소재로 사용되어 왔었다. 의자를 벤치라는 말로 바꾸면 그 낭만성은 더욱 진해진다. 연인들을 떠올릴 때 혹은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할 때도 의자는 늘 반드시 있어야 할 풍경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낭만적 소재의 의자가 갑자기 '흉측한 짐승'으로 그려진 것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자>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의자는 서있는 것보다 앉는 것을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생활 도구이다. 서있는 것보다 앉는 것은 편하다. 그래서 앉기 시작했고 앉아서 편한 의자가 생기면서 오래 공부하고 창작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릴 수 있는 혜택을 입었다.
소위 모든 연구는 이 의자자의 혜택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연구하고 창작하고 그래서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사용되어만 왔다면 이 <의자> 시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의자를 사용하면서 서서히 편한 것에 중독되어 갔고 조금더 조금더 편하자는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편리위주에 길들여져 갔고 드디어 의자라는 짐승에 먹히고 만 것이다.
먹히면서 먹히는 줄도 모르고 엉덩이가 깨물리면서 아픈 줄도 모르고 마비되어 가는 인간정신의 몰락과 타락을 이 시는 빗대놓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부나 명예처럼 가지고 싶은 것이 편리 위주의 비대성이라고 그 비대성의 과도한 체중이 결국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음을 자각시킨다.
현대인들의 편리 위주를 생각하는 대목에서 반드시 생각나는 것이 생떽쥐 빼리의 <어린 왕자>의 한 대목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다. 이 어린왕자를 읽으며 결코 소리 내어 감탄하지 말라는 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명령을 어기며 법을 위반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살아갈수록 꿰뚫어 보는 책이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어린왕자는 어느 별에 내렸다. 거기에는 약장사가 있었다. 그 약장사는 오늘의 현대인들의 비위에 잘 맞는 약을 팔고 있었다. 그 약장사가 팔고 있는 약은 '한 알만 먹으면 일주일 동안 목이 마르지 않는 약'이었다. 기막힌 일이지. 어쩌면 그런 약을 팔 수 있을까. 인간이 목마르지 않는다는 현실을 우리는 천국으로 대변할 수 있을까. 바로 갈수록 그 수위가 높아지는 편리위주의 인간본성을 대변하는 대목인 것이다.
어린왕자가 물었다. 그 약을 먹으면 몇 분이나 절약되느냐고? "53분"약장사가 말했다. 일주일간 물을 먹지 않아 절약되는 시간은 엄청난 시간이다. 죽음 앞에서 53분은 대단한 위력을 지니니까. 어린왕자가 말했다. "아저씨 만약 나에게 53분이 주어진다면 나는 약을 먹지 않고 샘을 향해서 걸어가겠어요.
여러분도 잘 알겠지만 여기서 걸어가는 노동의 정신과 샘을 향해서 가는 이상의 실천은 바로 진실을 행하는 인간적 가치와 정신의 의지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의 창의력이며 시인이 지향하는 지점인 것이다.
그러니까 시각이 중요하지 않는가. 편리위주에 중독되어진 인간의 본성을 의자에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의자의 먹이이며 의자는 우리의 의지와 판단능력을 먹는 짐승인 것이다. 그것이 오늘의 나태한 수렁이라는 쟁점은 엉뚱하게 사물을 보는 시각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낭만적인 소재에서 흉측한 짐승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그 진실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다른 의자로 넘어가겠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갔다 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바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 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
의자 몇개 내 놓는 거여
이정록의 <의자>다. 앞의 시와는 전혀 다른 의자를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의자라는 사물의 형태와 용도는 같은 것인데 의자라는 사물의 시각이 전혀 다는 것이다.
이 의자는 매우 따뜻하고 가족정신을 이끌어 내는 온유한 정서이다. 앞의 의자가 기계 문명 속에서 변질되어 가는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 것이라면 이 의자는 인간관계와 자연 속에서 서로 관계되는 의자 즉 의지하고 받아주는 융화와 화합을 말하고 있다.
허리가 아픈 어머니의 눈으로 말해지는 이 시의 중심은 그래서 관계이며 사랑이다. 이정록 시인의 이 따스한 시선은 참외며 호박도 식구라는 개념을 강조하고, 풍경 좋은 데다 놓는 의자야 말로 바로 가장 배부르고 선한 사람들의 삶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앞의 시가 동물적 인식의 시라면 이정록의 시는 식물적 관점으로 해석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무서운 수렁인 줄 알면서 서서히 길들여지고 발이 빠지는 위험성의 수위에서조차 몸을 빼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을 폭력적으로 다루었다면 이 시는 인간화된 자연을 자연화된 인간으로 화해시키는 온기를 지니고 있다.
앞의 시가 무엇인가 붕괴되고 추락하는 이미지라면 이 시는 모으고 다독거리고 일으켜 세우고 쓰다듬는 정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시에서 우리는 모두 시적 진실성을 느낀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진솔한 성실성으로 이미지를 넓혀 가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문제는 낡은 주제에서 박차고 나와 새로운 주제로 진입하고 같은 소재를 지금까지의 방법론을 철회하고 오직 자기가 보는 강력한 본질적 외침을 적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의자는 여기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의자에 앉아 있다.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우리는 지금 의자라는 사물에 대해 어떤 시가 가능한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차례 의자라는 시에 대한 과제물로 수업 시간을 할애해 왔다. 2학년 이명진이 쓴 <의자>라는 시를 소개한다.
아버지의 의자는 낡아있다
오늘 아버지는 세 번째 의자를 수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저 의자는 고쳐지지 않을 것이고
아버지는 늘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저 의자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아버지의 의자가 권좌일 때도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 초라해서
남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 싶지가 않다
아버지에겐 거짓말을 한다
아버지!
그 의자 고치면 아직도 쓸만할 꺼에요
이것은 아버지의 의자다. 아버지의 의자는 슬프고 외롭다. 수리하고 있지만 다시 고장날 것이 뻔한 그런 의자다. 여러분에게도 잘 보이는 것이지만 너무 직접적이고 서술적으로 말하는 시적 진술이 좀 마음에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모호하고 당치 않는 비유법으로 재주를 부리는 것보다 진실성이 살아 있다.
이 시대의 아버지의 의자는 위험하다 못해 흔들리고 불안하다. 그런 아버지의 자화상을 '아버지의 의자는 낡아있다'라는 첫구절에서 읽힌다. 낡은 의자는 아버지의 초라한 현실적 위치를 말해준다. 힘없는 아버지 말이 먹히지 않는 아버지 던져버린 적이 없지만 어느새 자신의 권위가 상실된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이 이 시 안에는 보인다. '낡아있다'라는 표현은 모든 사람들의 공감대에 손을 얹게 한다. 얼룩도 티도 상함도 없는 그래서 기운차게 뻗어 오르는 힘의 권좌에 앉아있는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어디 아버지뿐이겠는가. 인간적 상실과 좌절이 가져오는 상실감의 수렁은 이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누구나 가슴에서 뽑고 싶은 가시가 아니겠는가.
이 시는 좀더 서술적인 곳을 만지고 다듬는 과정에 좀더 시간을 바치면 더 새로운 시로 탄생될 것이다. 가령 뒷부분에서 '아버지 고치면 아직도 쓸만할 꺼에요' 같은 부분을, 이런 설명적 표현 말고 없겠는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의자는 낡아있다'라는 첫 구절이 좋았는데 점점 긴장감이 약해지는 것이 흠이었던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뒤로 갈수록 너무 풀어지는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나는 개를 본다'라고 했을 때 개도 나를 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면 안된다. 모든 것은 나와의 관계 속에 있다. 그것이 중심이다. 문장과 사물에 대한 관점의 제한선에서 쑥 발을 내어 밀라. 그래야만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고 글쓰기의 색다른 에너지를 불어 넣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어떤 한계를 무너뜨린다. 그것은 대단한 힘이다. 나는 이런 한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아도르노의 말을 떠 올린다. '예술은 유토피아를 구체화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예감한다. 음악은 시간을 압축하고 미술은 공간을 압축한다. 이렇게 예술은 합리성을 통한 고정된 규정을 수정하고 그것을 상대화함으로써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이것을 기록하고 언어의 피를 수혈하게 될 때 문학은 그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의자의 시는 계속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의 의자, 관계의 의자, 아버지의 낡은 의자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몇 천개의 의자가 계속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느 각도에서 의자를 보고 있는가 생각하라. 자기의 진실에 가장 합당한 의자는 어떤 의자인지 눈으로 보는 의자, 몸으로 느끼는 의자, 집에 학교에 극장에 카페에 있는 의자,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 중심과 정신에 형상화되고 있는 의자의 실체를 찾아보아라.
-무엇이 가장 편한 것인지
-의자와 관련된 생활속의 간접이미지를 생각해 보아라
-의자를 상기시키는 과일은 없는가
-생명이 없는 것은 의자가 필요 없는가
-우리 신체에서 가장 의자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인가
이런 무질서한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굴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 다양한 의자의 이미지를 지금부터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짓고 허물고 다시 지어보아라.
신달자 :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봉헌문자> <모순의 방> <아가> <아버지의 빛> <오래 말하는 사이> 등
-시안 2005년 가을호-
'詩에 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시는 정말 좋고 나쁜 시는 정말 나쁘다/ 오탁번 (0) | 2009.10.12 |
---|---|
응모를 위해서 (0) | 2009.08.25 |
글을 잘쓰려면 / 동아일보 (0) | 2009.05.21 |
시 쓰는 이에게 시 쓰는 이야기를/이정록 (0) | 2009.05.01 |
[스크랩] 나무를 심듯 詩를 쓰자 젊은이들이여! <신경림 시인> (0) | 2009.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