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시 쓰는 이에게 시 쓰는 이야기를/이정록

문근영 2009. 5. 1. 07:16

  시 쓰는 이에게
        시 쓰는 이야기를

                                             이정록

  시를 쓰면서, 되뇌는 문장은“새가 난다”이다. 이 단순한 문장이 사실 문장의 전부다. “어떤 새가, 어찌어찌 난다”라고 수식을 달지 않도록 다잡는다. “무엇 같은, 어떤 빛깔의 새가, 뭣 같은 몸짓으로, 어찌어찌 난다”라고 덕지덕지 휘황한 금박장식을 달지 않도록 펜 끝을 세운다. 그러므로 시의 퇴고는 첨添이 아니라 삭削이어야 한다. 사물과 현상에 대한 정확한 직시와 통찰만이 단순한 문장을 만든다. 멀리 나는 새는 단순하다. 홀가분하다.
  그렇다면 본질에 대한 통찰은 어떻게 오는가?
  어느 날이었다. 고속도로휴게소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코앞에 시창작론의 요약본이 걸려 있었다. 그간 열권도 넘게 읽은 시창작론을 두 줄로 요약해 놓은 게 아닌가. 출처는 <좋은생각>이고 발행처는 <문화시민연대>였다. 그 내용인 즉은 다음과 같다. “한 걸음 더 가까이” “우리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그렇다. 사물과 현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밀착시키는 자세가 중요하다. 골똘하게 들여다보며 데리고 사는 것이다. 시상詩想과의 뜨거운 동거同居가 필요한 것이다. 그 다음은 눈물이 문제다. 엄살과 과장, 감상적 포즈의 배척이다. 슬프다, 외롭다, 눈물난다, 그립다, 사랑한다, 죽을 것만 같다, 미치겠다, 등등의 말만이라도 멀리 내치자.
  중요한 또 한 가지는 시의 끝맺음이다. “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끝말은 없을지라도 눈짓과 표정은 있어야 하리라. 어설픈 시의 결말은 사족일 뿐이다. 군더더기가 아닌 감동과 여운의 꼬리를 잡아채려면 밋밋한 마무리를 벗어나야만 한다. 설명이 아닌 치고 올라가는 기법을 사용해야 한다. 시의 맛은 일상과 통념과 상식으로부터 꿰어 차 올리는 것이다. 시의 말미는 요점정리 공간이 아니다.
  시의 마지막 행은 낚시 바늘에 비유할 만하다. 작가를 낚시꾼이라고 하고 독자를 물고기라고 가정해보자. 마지막 연이나 시의 말미까지 독자를 끌고 왔다면 일단은 성공한 시이다. 대부분의 많은 시는 1연이나 3~4행쯤에서 독자의 눈과 마음을 놓치고 만다. 문학잡지라면 다음 시인의 작품을 읽을 것이고, 서점의 시집 코너라면 만화나 잡지 코너로 자리를 옮길 것이다. 낚시꾼은 여럿이고 호수는 넓다. 물고기는 웬만한 떡밥에는 한 자리에 모이지도, 맴돌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낚시 바늘 가까이 물고기를 다가오도록 했다면 이미 대단한 시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떡밥만의 유혹으로는 안 된다. 물고기가 아니라 독자이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아가미가 찢기는 황홀한 아픔을 모른다. 하지만 독자가 바라는 것은, 일순 낚아채 올리는 온몸의 딸림이다. 눈과 가슴과 머리를 예리하게 가르는 번개의 황홀이다.
  시의 마지막은, 전轉에서 받은 반전의 충격을 애무하는 고요하고 평온한 결말이 되어야 한다고 착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작가가 아닌 독자였을 때를 돌아보라. 당신은 이 시가 얼마나 밋밋한 채로 끝나가고 있는가? 불만 가득한 채로 마지막 행을 덮었던 경험이 많았을 것이다.
낚시 바늘은 날카롭다. 끝이 안창으로 꺾여있다. 그렇다. 시의 마지막 행은 단순한 미늘이 붙어 있다. 낚시꾼의 전율은 그 미늘 끝에 걸린 물고기의 힘이다. 독자는 거기에서 파르라니 전율하며 자신의 시 읽기를 마치고 싶어 한다.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푸른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그 전율을 건네받아서, 산고産苦를 기쁨으로 바꿔나가는 것이다.
  마지막 행은 독자의 가슴속에 행간을 걸치고 있다.
“물고기가 난다.”
“물고기 떼가 날아간다.”
  떡밥만 잔뜩 뿌려놓으면 물만 흐려진다. 썩는다.


                           (월간 에세이 2007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