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는 <목계장터>의 시인 신경림. 그는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 과정, 80년대 민주화 투쟁에서 희생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 있었다. 거친 현실을 피하지 않았고, 그때 만난 많은 사람에 대한 애환과 정서를 따뜻한 가슴으로 표현해 왔다. 휴머니즘이 짙게 깔려 있는 그의 시는 절박 하면서도 아름답다. 세상이 거칠고 어려울수록 그리워지는 신경림 시인을 찾아 그의 시 세계와 생각들을 들어보았다. 흔히 시란 사람을 향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따라서 삶의 현장에 대한 절실함과 그것을 담아내는 시인의 성실 함이 필수적이라는 말도 한다. 그런 점에서 “시란 생활 속 희로애락에 찌들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신경림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시는 자세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가장 작은 말로 가장 큰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런 점에서 경제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어떤 시는 아름답기는 한데 감동 을 주지는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활의 깊이가 없기 때문이지요. 생활에 뿌리박은 시여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나는 서정주의 전기 시는 좋지만, 후기 시들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생 각합니다. 생활에 뿌리박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생활에 뿌리박은 시란 어떤 것일까. “말의 멋에 취해서 쓰인 시가 아니라 시인의 삶 그 자체와 생활 속의 정서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 자체 에서 시적 영감을 받는 시라고 할 수 있지요.” 신경림은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낮달>등 이 추천되면서 등단했다. 73년 첫 시집 〈농무〉(農舞)를 출간하고 이듬해 제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한국문학작가상(81년), 이산문학상(90년), 단재문학상(94년),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98년), 만해시문학상 (2002년) 등을 받았다. 그동안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며, 동국대 석좌교수로 있다. 시집으로는 〈농무〉 외에 〈새재〉 ·<달넘새> ·〈남한 강〉<뿔>등이 있고 〈시인을 찾아서〉 ·<우리 시의 이해> ·<민요기행<1, 2〉 등의 저서가 있다. 그의 첫 시집이자 대표시집으로 꼽히는 〈농무〉에는 70년대 농촌 현실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삶의 애환들이 절절히 나타나 있다. 아마도 이런 것들이 그가 말하는 삶에 뿌리를 둔 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라면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장르를 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특히 시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동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소설이나 에세이도 써 보았습니다. 그런데 글이라는 것은 쓰면서 흥이 나야 하는데, 그렇질 않았어요. 그 중 시가 나하고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쓰면서 흥이 나기도 했어요. 나는 시란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압축된 작은 이미지로 독자가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를 쓰고 읽는 맛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시가 너무 자세하면, 즉 설명이 너무 많으면 시로서 실격이라고 봅니다.” "생활과 유리된 서정주의 후기 시들은 감동 못 줘” 그가 등단하면서 발표한 시 〈갈대〉에는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라는 인간 내면의 성찰적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구절이 나온다. 그의 시 역시 이런 성찰로부터 출발하지 않았을까. “젊었을 때는 치열하게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하지요.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각을 합니다. 그 시를 썼을 때는 아마도 내가 인생에 대한 막연한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신경림의 시는 농촌과 우리 사회의 소외받은 사람들의 생활과 아픔으로 향하게 된다. “56년 무렵은 한국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 시내 곳곳에 전쟁흔적이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포탄자국이 널려 있고, 창녀와 상이군인이 넘쳐나던 때였지요. 그런 풍경과 현실 속에서 순수한 인간 존재에 관해 시를 쓴다는 것에 회의를 갖게 됐습니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자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런 생각에서 책도 읽고,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친구들이나 선배들과 함께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 선배가 (조봉암이 간첩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던) 진보당 사건(58년)으로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어요.” 고향으로 내려와 10여 년 동안 광부 ·농사일 ·공사장 인부 ·학원 강사 ·학교 강사 등을 전전했다. 그동안 시는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러 직업을 거치는 동안 켜켜이 쌓인 체험이 그의 시의 원천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점은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요. 많은 직업을 거치면서 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체험을 했지요. 시에 대한 생각에도 변화가 생겼고요. 이때 만난 많은 사람에 관해 시를 쓰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로부터 상처받고 피해를 본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시를 쓰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가 길고 긴 10여 년의 침묵을 깨고 내놓은 시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보아도 흥겹다…’로 시작하는 파장〉(罷場)이다. 장이 끝나고 술에 취해 귀가하는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담은 이 시를 발표하면서 신경림은 “민중시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가 주는 서정적 아름다움에 비해 민중시인이란 표현이 좀 격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민중시인이라는 말이 노동자나 농민과 같은 민중이 시를 써야 한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민중의 애환을 시로 다룬다는 의미에서라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문학은 문학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전문인으로서 시인이나 소설가가 시와 소설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이는 농민이 나 노동자가 직접 시를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식인의 시는 진정한 문학일 수 없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에는 반대입니다.” 문학에 대한 그의 이런 생각이 74년 설립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이어받아 87년 설립된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을 두 번이나 맡도록 한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그 단체의 성격과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떤 것인지 물었다. 그는 “의장을 두 번 맡게 된 것은 서로 안 하려 했기 때문”이라며 모처럼 빙긋 웃음을 보여준 후 차근차근 설명을 한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문학을 통해 그 당시의 사회적 문제들, 즉 유신체제로 인한 문제들과 싸운다는 정치적 · 사회적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변한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는 보다 포괄적이고 예술적인 측면 에 주목하게 됐지요. 문학을 통해 건전한 사회를 만든다는 더 큰 목적과 함께 좋은 문학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자는 목적도 갖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출발해 예술적인 영역으로 눈을 돌리는 발전을 하게 된 셈이지요. 지금도 이런 정신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단체들이 예술적이고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했다가 나중에 정치단체화하곤 하는 사례와는 반대 방향 으로 변해왔다는 점에서 ‘발전’이란 용어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는 예술로서의 감동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통일이나 민중 ·반전 ·반핵 등도 마찬가지인데 ‘무엇을 위해서’라는 시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쓰이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닙니다. 시가 그런 목적에 기여할 수는 있겠지만, 처음부터 그런 목적을 갖고 시를 시작하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 “시로 너무 옳은 소리만 하려 하지 말자” 민중과 함께하는 시라 할지라도 민중을 앞세우기보다는 내용을 통한 공감대를 조성하고 읽는 이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가 80년대에 민요연구회를 만들어 서민들의 애환과 정서를 담고 있는 노랫가락 연구에 몰두했던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70년대 후반의 사회는 무척 경직돼 있었어요. 그에 따라 내 시도 경직돼 있었지요. 자연히 시쓰는 것이 재미가 없어졌고 흥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다는 생각에서 민요를 연구하기 시작했습 니다. 민요시라는 말을 쓰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몇 편을 쓰고 나니 시를 쓰는 것이 다시 답답해지기 시작했어요. 민요는 한 시대의 정서이고, 오늘날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민요를 즐기는 것은 좋지만 시 속에 반영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렇게 민요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 시를 편하게 쓸 수 있게 됐어요.” 서민들의 정서를 익히는 데 그쳐야지 그 형식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 후로 나온 시가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를 담은 〈길〉(90년)이다. “그 시는 민요 가락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쓴 시입니다. 시란 결국 자기 탐구이고 자기내면에 대한 연구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쓴 시입니다. 내 시에 부족한 것이 있다는 반성을 하게 됐고, 좋은 시란 사회적 성격 과 자기내면적 성찰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회성과 서정성이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 지 않고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좋은 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성이 우선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뿌리를 박은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입장인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요즈음 젊은 시인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듯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나무를 심는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라는 말을 먼저 하고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서 있으면, 그 시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의미에서다.) 독자가 없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어요. 길에 좋은 나무를 심어 놓으면 많은 사람이 찾아주듯이 시도 읽어 주고 감동받게 될 것이라는 얘깁니다. 가장 큰 그늘을 만들어 모든 사람이 그 밑에 와서 쉬게 한다고 생각하면 한 사람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 그런 좋은 시에도 최소한의 조건들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선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어도 기능이 갖춰져야 합니다. 시쓰는 훈련을 해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 시를 통해서 너무 옳은 소리만 하려 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세속적인 도덕이 문학적인 도덕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시가 너무 현실에만 머문다면 좋은 시가 될 수 없습니다. ” 시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고, 그 상상력이 다시 아름다운 사회를 다듬어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어느덧 칠순에 이른, 스승 같은 민중시인의 삶이 담긴 가르침이기도 했다. Forbers Korea에서 (글 ; 박일호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철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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