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된 詩

시가 있는 풍경[서울일보] 붉은 골목 /조 정

문근영 2009. 5. 11. 11:42

 붉은 골목                

              조 정

 

 

 

길을 잘못 들기는 흔한 일이어서

별 수 없이 다음골목으로 꺾어들어도 길은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 골목에서

늙은 개가 내 차의 브레이크를 밟은 건 아니었고

번호 붙은 유리문들이

홍등 아래 딸 하나씩 담고 사열 중이었다

 

나는 남대문 시장 지하에 앉아

무도 내가 파는 물건을 사가지 않는 헐벗은 밤을 생으로 삼켜가며

오장육부를 조금씩 헐어 빚을 갚을 때였는데

길을 잘못 드는 사내도 없는 대낮 골목에 차를 세우고

생수 한 병을 사고

편의점 의자에 앉아 버렸다

와이드 판탈롱 밑 이십 센티 통굽 샌들에 저마다 잘못 접어든 길을 끌고

딸들이 흔들흔들 걸어 나와

내 간과 쓸개와 가래가 잡히기 시작한 허파를

뚝뚝 떼어 먹었다

기도한 지 오래 되어 약도 되지 않는 나는 미안할 뿐이었다

 

A-6호 유리를 닦고 난 여자가

A-7호, A-8호 앞으로 물이 흐르는 양동이를 옮겨가는 동안

생수를 마시며

남자 없이 아이를 배고 싶었다

백 명도 더 되는 딸들을 담아갈 내 자궁을 살펴보았다

날마다 골방에 들어가

낳고 낳아야 할 딸들을 담고 나오는 골목이 붉었다

 

 

 

    

 

 

 

◆ 시 읽기 ◆

오래 전 길을 찾다 잘못 든 골목에서 홍등가의 저녁 무렵을 본 기억이 있다.

불그레한 조명아래서 요염하거나 처량한 모습의 앳된 여자들이 번호 붙은 유리문을 의지하고 앉아 있었다.

불우한 처지를 뛰쳐나와 잠적해버린 옛 제자가 생각났다. 몇 번이나 가출했다 잡혀오곤 하던 가겟집 딸이 생각났다. 가출한 손녀딸을 찾아다니며 온종일박스를 줍던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며칠 뒤에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오늘도 운행 중인 차 앞으로 커피상자를 실은 딸들의 오토바이가 세 번이나 지나갔다.

세상의 뒷골목, 잘못 접어든 길을 걷고 있는 세상의 딸들이 그 흐릿한 홍등아래 로뎅의 조각처럼 앉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희망이었을까, 절망이었을까?

시인은 와이드 판탈롱 밑 이십 센티 통굽 샌들에 저마다 잘못 접어든 길을 끌고 딸들이 흔들흔들 걸어 나와 내 간과 쓸개와 가래가 잡히기 시작한 허파를 뚝뚝 떼어 먹었다고 말한다. 남자 없이 아이를 배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순결이 저당 잡힌 그 딸들을 구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 없이 아이를 밸 수 있는 자궁이라 해도 백 명도 더 되는 딸들을 담아 나올 여력은 없지 않은가. 기도한 지 오래 되어 약도 되지 않는다 말하는 시인은 그 딸들을 구출할만한 힘이 내게 없음이 안타깝고 미안했다.

아프다! 아프다! 날마다 골방에 들어가 낳고 낳아야 할 딸들을 가슴에만 담아안고 돌아 나와야 했던 그 골목이 어찌 붉게 붉게 아프지 않았으리.

따듯한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계절, 어느새 무거워진 해 늬엇늬엇 넘어가는 산등성이에 거무레한 서녘 하늘이 붉다.

유 진/ 시인, 첼리스트<선린대학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