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풍경
산내통신
김만수
그 겨울 동안 체부는 오질 않았습니다
낡은 가죽 가방의 그가 편지였던 시절도
꼴삭한 햇살과 걸쭉한 입담이
등기처럼 배달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느릅나무 이파리들 불티처럼 날리어 가고
푸른 알을 낳던 숲에는
젖은 가랑이를 말리는 감나무들 처져 섰는데
아무도 그 마을의 소식을 빼내가지도
거친 눈발 속에서 빚어진 일들을 입에 올리지도 않
았습니다
털갈이를 앞둔 개 몇마리 얼어죽은 일과
캄보디아 색시가 새벽 운문재를 넘어간 일이며
조합장네 사위가 바람 난 일
걸어서 건너는 저 시린 겨울을
아무도 유심히 보질 않았습니다
노망기 도진 할머니가 연신 숟가락을 빠는 동구 앞에는
되돌아오지 않는 눈발
다시 치고 있었습니다
◆ 시 읽기 ◆
커다란 가죽가방에 이런저런 소식들을 담은 우체부가 자전거를 끌고 고개를 넘어오는 풍경.... 얼마나 따사로운 고향풍경인가?
집배원이란 호칭보다는 훨씬 친근한 우체부아저씨! 우체부가 반가운 편지이고, 신문이고, 라디오 뉴스였던 우리들의 고향은 이제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멀리 무성한 나무 숲 사이로 우체부의 자전거가 보이면 밭일하던 호미 놓고 땀을 식히고, 괜스레 궁금한 일들 많아지는 사람들이 걸쭉한 입담 앞으로 모여들던 모습들은 이제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새벽잠을 설쳐가며 지하철을 갈아타는 아들은 간간이 전화로만 기별 달랑하고 여직도 오질 못하고 있다. 할머니 집으로 가던 방학에도 아이들은 시험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대부분의 안부들이 전화나 매신저나 메일로 오고간다. 집집마다 우편물은 수북해도 거의가 청구서나 광고지들일뿐 자필로 적은 정겨운 편지한통이 귀하디귀한 시대이다.
시인은 산내통신을 통해 잊혀져가는 정겨운 고향모습을 일깨워주고 싶었을 것이다. 다투어 편리함을 좇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외진 곳에서 어렵고 외롭게 살아가는 이웃을 한번 돌아보자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눈이 내리는 산내마을에는 집배원이 오질 않는다. 젖은 가랑이를 말리는 감나무들 처져 서있는 산내마을, 털갈이를 앞둔 개 몇 마리 얼어 죽은 일과, 캄보디아 색시가 새벽 운문재를 넘어간 일이며, 조합장네 사위가 바람 난 일을 생생하게 전해주던 걸쭉한 입담의 우체부는 더 이상 오질 않는다.
등산객의 발길도 끊어진 겨울 산골, 마을 소식을 빼내가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는 산골에는 노망기 도진 할머니가 연신 숟가락을 빨고 있는 우리들의 고향이 있다.
저 시린 겨울을 걸어서 건너는 산마을, 다시 내려치는 차가운 눈발 속에 우리들의 고향이 묻혀가고 있는 것이다.
유 진/ 시인, 첼리스트<선린대학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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