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된 詩

시가 있는 풍경(서울일보) 소주병 / 공광규

문근영 2009. 5. 11. 11:21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 시 읽기 ◆

 소주병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자신을 비워 간다.

꽉 채워진 자신을 계속 따라주고 나서 다 비워진 빈 소주병은 가차 없이

폐품이나 쓰레기로 버려지는 이다.

시인은 술을 마시다가 문득 바람소리에 섞인 아버지의 소리를 듣는다.

마루에 버려진 소주병에서 문득 아버지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어쩌면 시인은 아버지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따뜻한 밥과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 세상의 온갖 멸시와

굴욕을 인내하며 끝없이 자신을 비워야 하는 것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친 뒤 냉정하게 버려지는 빈 소주병처럼,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신의 내용물을 다 비워주고 늙어 기력이 떨어지면

삶의 껍데기만 안고 곁방으로 물러나거나

세상의 뒷방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불의에 굴복하지 말고

부정과 타협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당신은 적당히 굴복하고 타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많은 아버지들은 얼마나 많은 슬픔과 좌절을 소주로 달래어 왔을까?

이제는 늙어버린 우리아버지들이 우리자식들에게 다만 폐품이나 쓰레기일 뿐인

빈소주병처럼 그렇게 잊혀져가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많은 아버지들이

또 어떤 수모와 굴욕을 참고 견뎌가며 자신을 비워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무능한 아버지가 왜소하고 비굴하게만 느껴지던 한때 아버지를 비난했었던

자식들도 이제 아비가 되었다.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옛말처럼,

그런 아버지 덕분에 오늘의 내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아비가 되고 난 뒤의 일인 것 같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모두 주고 빈껍데기만 남아 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자신이 그 아버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해지는 것 같다.

유 진/ 시인, 첼리스트<선린대학 출강>

 

 

 

 

 

                                                                                            

                                                 서울일보

                                                                [2009-01-14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