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된 詩

폭설(오탁번)

문근영 2009. 4. 29. 12:08

 

pHOTO by Choiysj/ 전남 장성 

 

 

폭설

 

오탁번

 

 

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오탁번 시인은 우리 사회의 근엄주의는 물론 우리 시의 근엄함마저도 확실하게 깨부수고 있다. 그의 시는 대체로 쉽다. 특히 <폭설>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쉬움을 넘어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한다. 처음 읽을 때 ‘좆나게 내려부렸당께’나 ‘워메, 지랄나부렸소잉’ ‘좆돼버렸쇼잉’ 등 이장의 직설적인 전라도 사투리가 코미디를 볼 때보다 더 큰 웃음을 준다. 시를 읽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다.
이 시의 끝은 웃음이 아니다. 웃음을 접고 다시 한번 읽으면 서로 보듬고 사는 우리 농촌 주민의 생활상에 ‘아름답다’는 단어가 떠오르고, 폭설에 삶의 터전이 무너진 농부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서 한번 읽을 때 웃고, 두번 읽으면 슬퍼지는 시 <폭설>은 우리 시의 근엄주의를 일시에 무너뜨린 대표적인 수작(秀作)일 것이다. - 황인원 선임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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