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명의 시인들이 뽑은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 에 이어..
전율, 비극적 황홀, 위반 정 효 구
1. 대사저인大死底人의 활인活人
죽으려면 크게 죽어야 한다. 그래야 ‘한 소식’이 오면서 크게 살아난다. 이른바 대사저인大死底人을 통한 활인活人의 상태가 오는 것이다. 감전感電이 되더라도 강력하게 내전內電되어야 한다. 그래야 불순물이 일시에 하얗게 타버린다. 이른바 육탈肉脫과 탈각脫殼을 통한, 해탈解脫의 법열이 이런 때에 내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가. 우리는 다 죽지 못하여 진속眞俗의 경계를 넘나들며 허둥댄다. 또한 우리들은 심장의 중심부까지 내전시킬 용기가 없어서, 겨우 손끝만 쩌릿쩌릿한 채 3촉짜리 불빛 하나를 달고 덜 절은 김장배추처럼 피둥피둥한 몸으로 밤 속을 헤쳐간다.
여기 100여 명의 시인들이, 사구死句로 가득 찬 진부한 세상에서 그들의 시적 공안이자 활구活句를 붙들고 자신들만의 비밀스런 사생담死生談을 진솔하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모든 인간들이 다르게 살고 죽듯이, 이들 또한 시인으로서의 삶을 통해 만인만색으로 살고 죽은 한 순간의 실상實相을 여기에 고스란히 내어놓고 있다.
2. 감동, 전율 그리고 법열
감동과, 전율과, 법열은 다르다. 감동이 우리의 몸속에 촉촉한 물기와 따스한 열기를 가져다준다면, 전율은 차가운 한기와 탈습한 건기를 전해준다. 그런가 하면 법열은 한열조습寒熱燥濕의 인간적이며 현상계적인 기운을 일체 무화시키고, 무색의, 무취의, 무감의 환한 진경을 경계 없이 열어 보인다.
감동이 봄과 여름을 상징하는 음양오행의 목성木性과 화성火性의 내질인, 이른바 생장生長과 생기生氣의 힘이 작용하는 에로스의 세계라면, 전율은 가을과 겨울이 상징하는 금성金星과 수성水性의, 이른바 수장收藏과 살기殺氣의 힘이 불러일으키는 공의公義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법열은 어떠한가. 그것은 생장과 수장, 생기와 살기를 모두 통합하며 넘어선 토성土性, 그러니까 중화中和의 핵심과 한몸이 된 상태이다.
감동할 때 우리의 몸은 뜨겁고 촉촉해지면서 몸에서 눈물과 화기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생명감이 살아나는 눈물이고 화기다. 그에 비해 전율할 때 우리의 몸은 차갑고 건조해지면서 소름이 돋는다. 그것은 내성의 응축이 빚어낸 자아단속의 모습이다. 전자는 이완이고 후자는 수축이다. 이완도 수축도 다 그 나름의 의미를 갖고 우리 존재의 항상성恒常性에 이바지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것이든 우리는 이런 이완과 수축의 드라마 속에서 묵은 존재의 때를 홀연히 벗고 새로운 존재로 중생重生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열의 순간엔 어떠해지는가. 법열의 순간에 우리는 공空의 백금처럼 무애無碍하고 자재自在해진다. 내면이 그대로 청정한 공의 상태로 들어서는 최고의 중생을 체험하는 것이다.
100여 명의 시인들이 보여준 감전의 체험 가운데는 감동도 있고, 전율도 있고, 법열도 있다. 감동의 감성과, 전율의 지성, 그리고 법열의 영성이 함께 자리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적인 것은 아무래도 지성의 전율 쪽이다. 전율도 크게 보면 감동의 일종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를 안으로 죽비처럼 치는 수렴과 수장의 살기殺氣, 즉 반성적, 지적 사유가 심층에 내재한 감동이다. 다시 말하면 감동의 자연성, 동일성, 상생성과 비교할 때, 그리고 법열의 초월성, 무비성, 절대성 등에 비할 때, 전율은 비동일성의 세계를 대면하는 지적 행위를 숨기고 있다.
우리의 시인들에게 감동이나 법열보다 특별히 전율이 그들의 생을 바꾼 감전체험의 절정으로 엄습한 것은 이 땅의 근대 및 현대시의 정신이 요구한 지성과 부정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 인간의 삶이란 그 개인의 개별의식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집단의식 사이에서 창조되는 것이라 할 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가 일반인이든 시인이든 간에 그 자신의 개인의식은 물론 시대가 가진 집단의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한 인간의 감전 체험이란 것은 바로 이런 의식 전체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감전체험이란 시공을 초탈하여 영원불변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을, 또는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관념, 의식, 가치관 등등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땅의 근대 및 현대, 그리고 이들 속에 내재된 집단의식, 더 나아가 근대 및 현대시가 지향한 집단의식으로서의 지성과 부정의식은 시인들로 하여금 전율의 체험을 갖게 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응답 시인들은 김수영, 이상, 정지용, 김종삼, 이성복, 기형도, 최승자 등과 같은 시인들에 많이 이끌렸다. 특히 김수영은 압도적이었고, 이상과 정지용과 김종삼도 상당한 정도로 감전의 원인을 제공한 조사祖師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지적인 시인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서정을 말하더라도 반성적, 지적 사유가 내재된 서정을 말함으로써 그 서정에 가을과 겨울이 상징하는 냉정한 살기殺氣를 내재시키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그 서정이 고전적인 서정과는 구별되는 현대성을 갖게 하였다.
이런 세계는 일면 불편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불편’이어서 ‘불쾌의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를 갖고 있다. 시인들은 이런 시적 풍경 앞에서 ‘서늘한 감동’이라 부를 수 있는 전율을 느끼며, 느슨해진 허리끈을 졸라매듯,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듯, 지저분한 방안을 정리하듯, 진부해진 내면을 긴장시키고 시의 길을 향해 분발하였던 것이다.
3. 동일성, 비동일성, 비극적 황홀
동일성이란 자아와 세계 사이에 틈 없이 전일성이 부드럽게 성취되는 일이다. 그때 자아와 세계는 갈등 없는 연인 사이 같기도 하고, 우정이 넘치는 친구 사이 같기도 하다. 그것이 연인 사이 같을 때 상황은 에로스적 합일의 그것과 같고, 친구 사이 같을 때엔 동지애와 같다. 또 있다. 그것이 부모 자식 같은 사이일 때, 거기에는 포용으로 하나 된 연속의 아우라가 감돈다.
세상과 존재 사이의 관계가 이와 같다면 굳이 다른 무엇을 꿈꾸거나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소박해도, 심오해도, 미숙해도 다같이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은 드물다. 세상은 언제나 분열돼 있고, 파편들로 가득차 있고, 자아와 세계는 단절의 골을 건너지 못한다. 이와 같은 세계를 비동일성의 장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비동일성의 장은 인간적 계산법으로 산뜻하게 풀리지 않는 모순과 아이러니의 얼룩덜룩한 장이다.
이런 비동일성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한 인간을 성숙에로 이끈다. 그러나 거기엔 불쾌감이 늘 따라다닌다. 불쾌감의 다른 이름은 무한하다. 불안, 불행, 소외, 좌절, 분노, 시기, 우울 등등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런 불쾌감 속에서도 궁극적으로 살고자 하고, 살아내고자 한다. 그것도 잘 살고자, 더욱더 잘 살아내고자 한다. 그런 살고자 하는 마음, 더 잘 살거나 살아내고자 하는 마음을 에로스적 소망이라고 부른다면, 모든 타나토스적 행위도 실은 그 안에 에로스적 소망을 품고 형태만 바꾸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시인들이 시를 쓴다는 것은 이와 같은 에로스적 소망의 적극적이며 발효된 고차원의 표현양식이다. 그들은 시를 씀으로써 사는 것이다. 그들이 죽음을 말할 때에도 그들은 에로스적 행위를 적극적으로, 의미있게 전개해 나아가는 것이다.
에로스적 열정과 의지의 다른 이름인 이 같은 시작 행위 속에서, 시인들은 비동일성의 세계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비극적 황홀’이라는 일종의 특수한 심리적 기법을 터득하고 활용한다. 비극적 황홀이란 현실이 비극적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범접할 수 없는 에로스적 절정의 유토피아적 지점을 상정하는 것이다. 그 지점의 도달 가능성이나 현실적 구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을 이끌며 그들로 하여금 비극적 현실을, 비동일성의 현장을 넘어서게 하는 어떤 힘으로 작용한다.
황홀의 다른 이름인 황홀경이라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세계, 그것은 인간이 죽음을 지연시키고 살아갈 수 있는 상상의 세계이자 그리움의 세계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이 비동일성의 세계에서 질식하여 일찍이 생을 중단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비동일성의 어긋남 속에서도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는 힘, 그런 것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이 황홀경의 힘이자 상상이 아닌가 한다.
비극적 황홀은 현실이 비극적일수록, 그런가 하면 황홀경이 드높을수록 그 울림과 떨림이 크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의 한 구절이 잘 말해주듯이, 비극과 황홀경 사이의 거리, 그 거리 좁히기의 안간힘에 비례하여 울림과 떨림은 진폭을 달리한다.
우리의 시인들을 감전시킨 ‘비극적 황홀’의 체험은 그 울림의 정도가 상당히 진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세계인식이 그만큼 비극적이었고, 그에 반해 그들의 순수성, 순정성, 진정성을 향한 꿈도 또한 강렬했다는 뜻이 된다. 적어도 고전적인 시학의 시각에서 본다면, 순수하지 않은 자, 순정하지 않은 자, 진정하지 않은 자는 시적 순간을, 그것도 비극적 황홀이라는 시적 순간을 맞이하기 어렵다. 방금 열거한 순수, 순정, 진정은 비극적 황홀의 필수조건이다.
‘비극적 황홀’이란 김지하가 미학적 양식으로 주장하는 ‘흰 그늘의 미학’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앞장에서 말한 근대 및 현대시의 부정의식과 맞물리면서 더욱 시인들을 사로잡은 체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정은 언제나 그 심저나 고처에 이상적 지점을 설정하고 있으며, 그것을 상상하고 그리워할 때, 우리에겐 부정을 통한 깊이의 초월과 높이의 초월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천양희는 “시라는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을 수 있었던” 것에 안도하며 감사하고 있다. 이것은 비극적 황홀을 몸으로 살아낸 일의 고백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비극적 황홀의 끝 지점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 그 하나는 비극적 황홀을 무심하게 관조하는 일이다. 그 둘은 비극적 황홀 너머의 도심道心에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 셋째는 반성과 성찰을 스스로 거부하는 노마드적 포스트모던의 파편들을 즐기는 일이다.
우리 시단의 대부분의 시인들은 비극적 황홀 이후에서 첫째나 둘째의 단계를,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의 단계를 꿈꾸거나 그 길로 접어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근 황병승, 김행숙 등을 비롯한 새로운 의식과 상상력의 젊은 주인공들이 빚어내는 세계는 세 번째의 세계를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문제적인 한 징후이기도 하다.
4. 위반과 순응
위반의 파트너는 금기이다. 순응의 파트너도 금기이긴 마찬가지이나, 그때의 관계는 불화가 아닌 화해의 관계이다.
우리의 시인들이 감전을 체험한 내용은 순응보다 ‘위반’ 쪽이 훨씬 많다. 순응은 그것이 우주의 섭리에 관한 것이든, 자연의 흐름에 관한 것이든, 사회의 규범에 관한 것이든, 에너지의 소모가 적다. 그런 만큼 그것은 보수적이나 유익하다.
그러나 간혹 시인들은 우주와 자연의 섭리에는 순응의 흔적을 보이면서도, 유독 사회적 규범에 대해서는 강력한 위반의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때로 그것은 충동만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로 나타난다.
사회란 우주 혹은 자연과 달리 인간이 만든 하나의 인공적 구성물이다. 그러나 그 견고성은 시멘트처럼 딱딱하여 사회는 언제나 홈패인 구조를 지향한다. 그 홈패인 구조에 순응하는 모범생을 제외한다면, 사회는 일탈의 충동을 자극하는 원천이다.
시인들은, 그것이 현대시인일수록 일탈과 위반 속에서 그들만의 ‘일인 단독정부’를 꿈꾼다. 그들은 그들만의 범접할 수 없는 ‘자유의 땅’을 내부지대에 건설하고, 자발적 패배자가 되어 혼자만의 놀라운 쾌감을 만끽한다. 가령 허연은 김종삼의 「시인학교」를 언급하면서 “제외된 자들이 주는 눈부심”을 알았다고, “시를 씀으로써 세상에서 제외되고 싶었다”고 말하였다. 그런가 하면 안도현은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언급하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는 백석의 시구에 그의 온몸을 동의의 표시로 기대고 있었다. 자발적 제외, 자발적 은일, 자발적 일탈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위반이고 강력한 성공이다.
위반은 역시 근대 및 현대시사의 부정의식과 깊이 닿아 있다. 시가 개인의식과 자유정신의 산물이라는 그 전제는 시인들로 하여금 순응보다 위반을 지향하게 하였다. 위반에는 고독과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그 고독과 위험을 선택된 예술가의 고고한 행위라고 인식할 때, 더욱이 사회가 그것에 동의할 때, 그들의 위반 행위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된다.
틈 없이 돌아가나, 진부하기 그지없는 사회적 삶은, 위반을 통하여 중생重生하는 균열의 시간을 맞이하고, 최후의 지성소인 그들만의 생체리듬으로 숨쉴 공간을 확보하게 한다. 사회란 공공의 이름으로 난폭함을 합리화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경직되고 박제된다. 위반의 환희는 이런 맥락 위에 놓여 있다. 금기를 자발적으로 벗어났을 때, 시인들은 위험한 지대의 아슬아슬한 쾌감을 독자적인 정부 안에서 만끽하는 것이다.
5. 마치며
정말 크게 죽는 대사저인大死底人의 상태가 되면 시 같은 것은 쓰지 않아도 된다. 오도송 한 편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러나 ‘지예至藝’와 ‘지도至道’의 거리는 가까운 듯 먼 것이어서 시인들은 인간적인 번뇌망상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벼락 같은 감전의 경험 속에서 중생의 시간을 맞이하는 것은, 그들의 내적 심해 속에 현상계적 그리움은 물론 반야의 진제적眞言帝的 그리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뭉친 것이 풀리면 길이 트인다. 얽힌 것이 풀리면 길이 보인다. 감전의 체험은, 어찌보면 이 둘의 기미가 보였을 때, 다가온 황홀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식과의 상호작용 속에 있다. 의식이란, 굳이 유식론唯識論을 언급하지 않아도,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연기緣起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들이 보여준 감전의 경험은 20세기 근대 및 현대시의 의식 내용을 성실히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고, 의식이 바뀌는 시대가 온다면, 그들의 이런 경험내용은 동의를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본 시적 감전들의 내용은 한국근현대시사 100여 년의 심층의식을 상당히 잘 반영한 하나의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정효구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서울대학교 국문과 석사, 박사학위 받음. 1985년 《한국문학》에 문학평론으로 등단. 저서 『존재의 전환을 위하여』 『시와 젊음』 『몽상의 시학: 90년대 시인들』 『한국현대시와 자연탐구』 『시 읽는 기쁨』 등 다수 있음. 현재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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