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임성룡시론 / 진저리치게 매혹적인 분노가 나타났다. ㅡ 정우영

문근영 2009. 2. 18. 10:09

 

 

 

진저리치게 매혹적인 분노가 나타났다



정우영(시인) 



1. 망상의 번식력은 무섭다


내게서 분노가 사라졌다. 나이 탓인가, 현실에 순응한 것인가. 날선 분노의 힘이 실리지 않는다. 대신에 체념과 포기와 혐오의 자리가 두드러진다. 위기다. 나는 지금 위기를 살고 있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아니, 좀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위기를 피하려 한다고 할까. 애써 위기의 무감각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할까.

사방에서 위기의 벽이 으스러뜨릴 것처럼 밀고 오는데도 머리 속 관념은 드넓은 대지의 자유를 꿈꾼다. 망상(妄想)이다. 그러나 그게 망상인 줄도 모른 채 나는 또 열심히 사변의 폭을 넓혀 가고 있다. 망상의 번식력은 무섭다. 일체의 다른 생각들을 망설임 없이 밀쳐내고 오로지 망상만을 사방으로 퍼뜨린다. 

이렇게 망상에 지리멸렬해질 때면 희한하게도 80년대와 80년대 문학이 나를 건드린다. 저 ‘거룩한 80년대’로 나를 이끌어 문득 분노로 각성시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줄곧 80년대를 이끌어간 문학의 힘은 분노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민주와 자유, 해방을 향한 분노의 힘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 김남주의 <나의 칼 나의 피> 같은 시집으로 표출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물론 분노만이 이 시집들을 우리 문학사의 푯대로 끌어올린 것은 아니다. 예술적 형상화 면에서 볼 때도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빼어나다. 분노라는 기치의 선명함을 절절한 문학적 감수성이 절묘하게 감싸줌으로써 감동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 민중들의 분노를 자양분 삼은 80년대 문학은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정권이 개량화되면서 급격하게 세를 잃었다. 90년대와 2000년대 문학의 주류는 포스트모던이란 이름 아래 몽상이나 현실도피, 혹은 자신으로의 침잠이 형성한다.

하여, 분노의 문학은 내내 겉돌거나 가뭇없이 사그라든 것처럼 보인다. 탄핵 국면이랄지,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싸움,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투쟁 등에서 섬광처럼 분노가 튀어오르기도 했으나 문학으로 용해되기에는 아직 거칠다. 간혹 분노의 끝자락을 잡고 울분을 토하는 작품이 눈에 띄었지만, 80년대의 잔영을 지우기 어렵다. 지금 여기의 분노가 아니라 80년대적 분노였기 때문이다. 이미 재가 되어버린 80년대의 분노를 현재화하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그마저도 극히 일부일 뿐, 엽기, 발랄을 표면에 내건 망상 문학이 지금 우리 문학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2. 마음 선득한 시의 기개가 놀랍다


우리 문학에서 정말 분노는 다 사그라들어 버린 것인가. 아니다. 아주 낯선 시인 하나가 <하늘공장>에서 분노를 풀무질하고 있었다. 임성용 시인이다. 내가 그를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80년대 문학의 빛나는 성취인 분노와 감성의 절묘한 결합이 그에게서 새롭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 근저에는 노동의 상처도 붉게 벌려져 있다. 마음 선득한 시의 기개가 놀랍다. 


그의 분노는 우선 「발」로부터 시작된다. 「발」이라는 시를 만나면서 이제껏 나를 괴롭혀 온 망상은 단숨에 깨어졌다.

「발」은 박노해가 시 「손무덤」에서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라고 자본에 먹힌 손을 보여 준 이래, 가장 강렬하게 자본에 먹히는 노동자를, 노동자의 현실을 형상화하고 있다. 묘사가 몹시 극명하게 처절해서 그 순간, 나는 시에서 눈을 떼고 싶어진다. 자본에 짓이겨지는 참혹한 현장성으로 인해 미처 분노를 끌어올릴 힘도 없어 보인다.

발은 무엇인가. 대지를 딛는 힘이다. 모든 저항세력에 맞서는 디딤돌이다. 그런 발이 그야말로 롤러라는 기계에 의해 으스러지고 있다. 우리 삶의 기반이 기계라는 이름의 자본 폭력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그는 장화를 벗으려고 했다

비명소리보다 먼저 복숭아뼈가 신음을 토하고

으드득, 무릎뼈가 튀어올랐다

부러진 홍두깨처럼 아무런 감각도 없는 발을

어떻게든 장화에서 꺼내려고

그는 안간힘을 썼다

하늘에서 벼락이 치듯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발은 꿈쩍도 않고 대못처럼 박혀버렸다

숨을 아주 깊이 들이마시고

핏발 선 눈을 천천히 감고

털썩, 엎드려 가늘게 떨다가

그는 비로소 죽은 듯이 투항했다

그러자 너덜너덜 허벅지만 남기고

저 혼자서 롤러 밑으로 걸어가는 발

끝까지 그의 장화를 신고 가는 발!

-「발」 전문


“비명소리보다 먼저 복숭아뼈가 신음을 토하고/ 으드득, 무릎뼈가 튀어올랐다”라는 부분에서는 내 발이 다 저리다. “숨을 아주 깊이 들이마시고/ 핏발 선 눈을 천천히 감고/ 털썩, 엎드려 가늘게 떨다가/ 그는 비로소 죽은 듯이 투항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 나는 “너덜너덜 허벅지만 남기고/ 저 혼자서 롤러 밑으로 걸어가는 발”, 저 발을 주어와야겠다고 생각한다. 저 발을 저렇게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저 발이 희생된다고 해서 자본의 포악한 식성이 멈춰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되돌릴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발의 비애, 발의 참화는 지금처럼 경제 만능주의가 횡행하는 한, 계속될 게 틀림없다. 노동자는 이제 자기 손에 이어 발마저 자본의 제단에 오롯이 바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자본으로부터 받은 것은 무엇인가. 손과 발을 대신할 수 있는 그라인더 같은 도구이다. 


내 손이 할 수 없는 일을

그라인더는 힘차게 대신한다

스위치만 켜면 철판을 갈아내고

파이프를 자르고 용접 부위를 말끔히 다듬는다

죽어도 내가 할 수 없는 일

손가락이 잘려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눈도 코도 없는 그라인더는 무슨 무기처럼

날만 들이대면 맹렬하게 해치운다

그러나, 나는 간혹 그라인더를 멸시한다

언제든지 나의 손이 되어준 임무를 배반할 수 있기에

그라인더와 나의 친교는 핏방울로 변한다

그라인더의 날이 철판에 박힐 때

이미 내 손은 그라인더의 근육이다

모터의 전류가 내 몸의 어딘가 단선을 접합해

드디어 나를 작동시킨다

방전된 정신을 급속히 충전시킨다

-「그라인더는 나의 손」 전문


그라인더와 그의 손은 한 몸의 근육이다. 신체의 일부이다. 그라인더는 이제 기계가 아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손이 있었고 발이 있어서 그는 독립된 존재로 노동에 종사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는 온전히 기계에 종속되었다. 그는 독립된 개체로서 일하는 게 아니라 기계의 일부가 되었다. ‘나’를 조종하는 것은 그라인더이다. “모터의 전류가 내 몸의 어딘가 단선을 접합해/ 드디어 나를 작동시킨다.” 그런 점에서 그의 피는 그라인더의 윤활유이다. 마침내 노동자는 “무슨 무기처럼/ 날만 들이대면 맹렬하게 해치”우는 완벽한 자본의 기계가 된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이 시를 21세기 노동시의 새로운 선언이라 부르고 싶다. 80년대 백무산이 「노동의 밥」에서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고 절규한 것 못잖은 2000년대 노동현실의 구체적 시화라 할 것이다. 간혹 노동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문학의 현재를 운위하곤 하는데, 이 시가 그 빈자리를 메꿀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시에는 또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도 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간혹 그라인더를 멸시한다/ 언제든지 나의 손이 되어준 임무를 배반할 수 있기에/ 그라인더와 나의 친교는 핏방울로 변한다.” 자본의 노예가 된다고 해서 평안이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너무도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렇다, 자본의 동력을 받는 그라인더는 언제든 ‘나’를 향해 그 날을 겨눌 수 있다.


뼈가 웃는다

살점 뚫고

허옇게 드러난 뼈가

그다지 허망하지 않게

넌지시 웃는다


처음에 

섬뜩 소름이 끼쳤다

너무 빈약한 뼈가

가느다란 촛불처럼 서러웠다

닭뼈만도 못한 손가락

부서진 뼈를 직접 확인하고


마침내, 나는 웃었다

평생의 울음이 웃음으로 번져

녹슨 철판 위에 뚝뚝 떨어지는 순간

생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경을 외우듯

눈을 감았다

-「웃는 뼈」 전문


시인은 “살점 뚫고/ 허옇게 드러난 뼈”에서 ‘웃는 뼈’를 본 모양이지만, 나는 처절한 고통을 본다. ‘웃는 뼈’의 처연한 비장미 앞에서 나는 속울음 삼킨다. “평생의 울음이 웃음으로 번져/ 녹슨 철판 위에 뚝뚝 떨어지는 순간”, 그 소름 끼치는 순간에, 거기서 “생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이때의 생의 향기는 무엇인가. 피비린내일 것이다. 녹슨 철판이라는 피의 제단에 바쳐지는 순정의 분노일 것이다. 그는 “처음에/ 섬뜩 소름이 끼쳤다/ 너무 빈약한 뼈가/ 가느다란 촛불처럼 서러웠다.” 하지만, “닭뼈만도 못한 손가락/ 부서진 뼈를 직접 확인하고” 그는 웃는다. 이때의 웃음이 웃음일 것인가. 나는 날것의 원초적 상처와 분노가 웃음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여긴다.

이땅의 현실이 이렇듯 극악하므로 그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다가 공장을 짓고자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게 궁전이 아니라 공장이라는 점이다. “부러진 손과 발을 쓰다듬고 즐겁게 일”하기 위함이다.    

   

저 맑은 하늘에 공장 하나 세워야겠다

따뜻한 밥솥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라고 웃음방울 영그는 곳

그곳에서 연기 나는 굴뚝도 없애고 철탑도 없애고

손과 발을 잡아먹는 기계 옆에 순한 양을 놓아 먹이고

고공농성의 눈물마저 새의 날갯짓에 실어 보내야겠다

저 펄럭이는 것들, 나뒹구는 것들, 피 흐르는 것들

하늘공장에서는 구름다리 위에 무지개로 필 것이다

삶은 고통일지라, 죽어도 추억이 되지 못하는 고통을

하늘공장의 예배당에서는 찬양하지 않을 것이다

힘없이 잘린 모가지를 껴안고 천천히 해찰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하늘공장으로 출근을 해야겠다

큰 공장 작은 공장 모두 하나의 문으로 통하는

하늘공장에 가서, 저 푸르른 하늘공장에 가서

부러진 손과 발을 쓰다듬고 즐겁게 일해야겠다

땀내 나는 향기를 칠하고 하늘공장에서 퇴근하는 길

지상에 놓인 집 한 채가 어찌 멀다고 이르랴

-「하늘공장」 전문


‘나’의 꿈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다. 소박하다. “따뜻한 밥솥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이고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라고 웃음방울 영그는 곳”이며, “손과 발을 잡아먹는 기계 옆에 순한 양을 놓아 먹이”는 곳이다. 그런 공장이다. 그 사소한 꿈마저도 이땅의 공장에서는 이룰 수 없다. 이 배반의 꿈이 너무 아프다. 불행하게도 2007년 노동자의 꿈은 이렇듯 하늘공장에 모인다. 지상에는 없다.

즐거운 노동과 지상에 놓인 집 한 채를 향해 가는 퇴근의 기쁨을 누가 앗아갔는가. 누가 저 사소한 꿈들을 땅과 하늘만큼의 간극으로 벌려 놓는가. 왜 저 “큰 공장 작은 공장 모두 하나의 문으로 통하는” 넉넉한 풍경이 지상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 버렸는가. 나는 이제 지상의 공장에서는 분노로 “펄럭이는 것들, 나뒹구는 것들, 피 흐르는 것들”만을 볼 뿐이다. 공장에서 한때 주고받던 따스한 교류는 전설과 산화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지상에서의 공장이 이러하므로 우리 아이들의 미래인들 밝겠는가.


가리봉2동 어린이집

골목길, 빵집 앞

아이들이 뛰어놀다

한 어린애가 넘어졌다

화물차 한 대가 무심코

넘어진 어린애를 타넘고 지나갔다

운전사는 애를 못 보았다고 말할 뿐

아무런 비명도 없었다

그 애의 부모는 일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을 대신해서 구급차가 울었다

피 냄새가 났다

다시, 빵 굽는 냄새가 났다

며칠 뒤에 비가 오고

아무 일 없이 아이들이 뛰놀았다

그 자리, 그 흔적 위에

다시 한 아이가 넘어졌다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이 동네에선 아주 흔한 일이라고

누군가 담배를 피우며 지나갔다

골목길, 와 와,

웃음소리 들리는 저녁 무렵

아이들은 저마다 한두 뼘씩 자라났다

바라기풀 꽃씨가 바람에 날렸다

-「저녁 무렵」 전문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의 현실이 참으로 척박하다. 무표정하다. 메마른 감성이 아이들의 정신을 가둬놓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아이들에 있지 않다. 아이들을 둘러싼 현실과 기성세대의 무관심이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한 어린애가 넘어”지자, “화물차 한 대가 무심코/ 넘어진 어린애를 타넘고 지나”간다. “운전사는 애를 못 보았다고 말할 뿐/ 아무런 비명도 없었다.” 나는 “무심코”란 표현에 전율한다. 그렇다, 현실은 아이들에게 무심코 폭력을 행사하고 무심코 먹을 걸 빼앗으며 무심코 버려둔다. 한 아이가 화물차 한 대에 무심코 깔려 죽을 때, 우는 것은 구급차뿐이다. 피 냄새와 빵 냄새가 겹쳐 나는 일상은 그저 무심히 계속될 뿐이다. 아무도 그 아이와 그 사건을 기억하지 않는다. 망각이 끔찍하다. 이런 망각 속에서도 “아이들은 저마다 한두 뼘씩 자라”지만, 당연하게도 희망은 자라지 않는다. 가난은 미래를 방치하고 방치된 미래는 대물림된다. 용날 수 있는 개천은 완전히 매몰되었다. 거기선 지렁이조차 기어 다니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희망을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희망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희망이란, 희망을 파는 장사꾼들이 더 많은 이윤을 챙기려고

우리에게 하루라도 손해를 참으며 살아가라고

달콤하게 던져주는 미끼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은근슬쩍 억지로 떠넘기는 사은품이다

...(중략)...

그러다 살이 도려지고 쓸모없는 뼈와 껍질들이 바다에 던져질 때

자신의 부릅뜬 눈과 뻐끔거리는 주둥이를 수습해

다시 물결 유유히 헤엄쳐가는 물고기를 보고

나는 그토록 선연하게 핏발선 희망만을 믿기로 했다

그 자유롭게 움직이는 영혼에게

간절히, 속삭인다 살아가라, 희망 없이……

-「살아가라, 희망 없이」 부분


서글픈 선언이다. 80년대에만 해도 우리에게 희망은 있었다. 우리가 연대하면, 민주화되면, 정권이 바뀌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 2007년을 돌아본다. 희망 있는가. 그가 보기에 없다. ‘희망’이라는 말은 “희망을 파는 장사꾼들이 더 많은 이윤을 챙기려고/ 우리에게 하루라도 손해를 참으며 살아가라고/ 달콤하게 던져주는 미끼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은근슬쩍 억지로 떠넘기는 사은품이다.” 그의 현실 인식은 이렇게까지 이르렀다. 도무지 출구가 없는 것이다. 800만 노동자가 비정규직, 혹은 임시직으로 하루를 산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이 있는가.

참혹한 선동이지만, 차라리 통쾌하다. 그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영혼에게” 충심을 다해 “간절히, 속삭인다 살아가라, 희망 없이……” 하고. 이건 절대 비아냥이 아니다. 승화된 분노의 뼈아픈 현실 인식에 기반을 둔 눈물겨운 역설의 응원이다. 


  

3. 분노와 상처를 보듬고 수직으로 서다

 

「붉은 열매」를 비롯한 <신작시 다섯 편>에서 임성용은 현장보다는 집과 행복 쪽으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그 눈이 가닿는 곳은 여전히 불편하다. 나는 “아물수록 덧나는 상처를 안고 흉터처럼” 살고 있고 “집은 멀거니 나를 바라볼 뿐”이며, “행복에는 가시가 박혀” 있고 “집 뒤뜰은 관속처럼 고요하다.” 이처럼 현실이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으므로 그의 시에는 여전히 분노와 상처의 날비린내가 첩첩이 저며 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시는 도무지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이 기세가 한없이 반갑다. 맞서는 시는 보기 어려워도 나긋나긋한 시는 차고 넘친다. 이 면만으로도 그의 시는 의미 깊다 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수평에 길들여져 왔다. 이젠 고통스럽더라도 수직으로 설 때이다. ‘그렇다’가 아니라, ‘아니다’라고 말할 때이다. 여럿이서 같이 눕기보다는 혼자라도 일어서서 세상에 맞설 때이다. 

임성용은 안일의 어지러움에 물든 수평보다는 차라리 수직의 고통을 택한다. 수직으로 살다 보면 더 많은 상처에 노출될 테지만, 아마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수많은 상처가 아물어 맺히는 흉터인 ‘붉은 열매’가 가져올 자유와 해방을. 그러므로 나는 “머잖아 벌어진 상처마다 붉은 열매들이/ 뼛속까지 깊게 열릴 것입니다.”(「붉은 열매」)라고 그가 읊을 때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붉은 열매」에서 만나는 노동자에게서는 어쩔 수 없는 희망의 냄새가 난다. “잘 알잖아?/ 라인 한 번 밀리면 그때부터 죽어나잖아!”라는 인식은 절망의 그것이 아니다. 여전히 살아 있는 수평의 연대와 배려의 몸짓이 거기에는 스며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적으로 더불어 사는 수평에 몸 기울인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수평적 연대감은 집으로부터 시작된다. 집은 모든 연대의 처음이며 더불어 사는 삶의 최초 공간이다. 집이 흔들리면 사회도 불안해진다.

그런데 그에게 집은 어떤 곳인가. “어느 날, 내가 아주 집을 떠나가도/ 집은 멀거니 나를 바라볼 뿐이다.”(「내 집은, 안녕한가?」) 집으로 표상되는 가족의 무관심이 ‘멀거니’에 다 들어 있다. 집은, 가족들은 ‘나’를 멀거니 바라보고 “나는 지친 해처럼, 집을 쏘옥 빠져나”온다. ‘나’는 냉장고나 전기, 보온밥솥, 뻐꾸기시계만도 못한 존재다. 여기서 ‘나’를 노동자로 환치하면 노동자의 자존적 존재감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노동자는 이제 집에서도 환대받지 못한다. 물론 “나는 불확실했고, 걸핏하면 약속을 어겼”지만, 그런 삶이 어찌 그가 선택한 삶일 것인가.    

그도 “입을 벌리면/ 단내나는 모유가 나오질 않아/ 눈동자처럼 차갑고/ 날마다 붉게 충혈되는 열매들” 같은 “내 새끼들이 불쌍해졌다”(「집 뒤안 작은 뜰」)고 느끼는 사람이다. “키 작은 대추나무/ 축 처진 잎들 말라가면서/ 가지에 종알종알 매달린/ 열매들을” 안쓰럽게 쓰다듬을 때 “눈을 아주 감아도 눈물”이 흐른다. 이때의 눈물은 아마도 그가 제 속으로 삼키는 피눈물일 것이다.

노동자의 이같은 피눈물은 그러면 어디에 바쳐지는가. ‘행복’이다. 그런데 “행복에는 가시가 박혀 있다/ 우리가 행복을 빌어 쓰고 지불하는 대가는/ 하루하루 피눈물 나도록 고달픈 일이다.”(「행복일수」) “우리는 늘 행복에게 협박당한다.” 행복은 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을러댄다.  “언제라도 너를 생매장 시켜버리겠다고!” 그러면 우리는 꼼짝없이 행복(이라는 것)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마련이다.

나는 ‘행복’이란 것의 허울을 이렇게 허망하고도 명쾌하게 정의 내리는 시를 달리 본 기억이 없다. 그렇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바라는 행복에는 가시가 박혀 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많은 인간적인 가치들을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행복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노예와 복종의 삶을 요구한다. 튀지 말라고 찔러 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얻고자 하는 수평적 삶, 행복한 삶의 실체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삶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불면 평온해졌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같은 피리를 부는 사람이고자 한다. 저 사람들 노는 유원지에서 “등껍질이 딱딱하게 굳은 사람들 몇이/ 덩그러니 모여 더러는 논물에 빠져 죽을 때”(「강촌행(江村行)」) 그는, “강바람이 통하는 구멍을 내고/ 산벚나무 그늘에 앉아 피리를 불고 싶”어 한다. 그 피리는, “만지면, 언제라도 따뜻한 소리를 내는 그런 피리”이다. 이때 피리는 사실 예지자이자 선지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매개자이다. 나는 그 피리에서 “머잖아 벌어진 상처마다 붉은 열매들이/ 뼛속까지 깊게 열릴” 날을 예감한다. 나는 이 피리 부는 사람을 통해 시인 임성용의 수직적 삶을 본다. 분노와 상처를 보듬고 현실에 맞서는 자의 견결한 시의 태도를 읽는다.



4. 일상의 위기가, 아프게 매혹적이다


나는 임성용의 <하늘공장>을 감히 요즘 보기 드문 빛나는 성취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늘 있어 왔지만 아무도 불러내지 않았던 21세기적 분노와 상처의 현실 세계를 적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굳이 비견하자면, 80년대의 <노동의 새벽>이나 <만국의 노동자여>에 버금가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본다. 가끔씩 절제되지 않은 날것의 분노와 참혹한 현장성이 툭툭 불거지기도 하는데 나는 그마저도 반갑다.

지금 우리의 시는 너무 매끈하게 이지적이며 장황하게 공상적이다. 그리고 정신세계는 망상에 가깝다. 분노와 상처를 드러내는 데 몹시 인색하다. 임성용 시인은 단박에 그와 같은 인색함을 날려 버린다. 아프지만 참으로 통쾌한 일갈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보기 드문 직설과 예리한 발상이 시를 이끌어 간다. 물론 아직 덜 익어서 가끔씩 시가 아니라 시인의 발언이 직접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부분도 기꺼이 생생하게 읽는다. 그만큼 그의 시각은 매섭다.

무엇보다 그의 시가 빛나는 부분은, 실감나는 현장의 구체적 형상화에 있다. 그의 시에서는 설익은 구호나 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80년대적 상투성도 사라지고 없다. 지금 여기의 상처와 흉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이다. 그는 현상을 넘어 삶의 본질을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분노로 잘 벼려진 그의 시가 환기하는 노동현실의 참상과 우리 일상의 위기는, 아프게 매혹적이다.

그렇지만 나는 임성용 시인을 좀더 다그치고 싶다. 시의 눈을 지금보다 넓고 깊게 펼쳐 달라고 요구하고 싶다. 그가 하늘 공장이라는 유토피아를 지상에 세우고자 한다면, 부단히 시대의 통점을 건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건드릴 뿐만 아니라, 치유의 눈길로 늘 쓰다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지상에 만연한 망상(妄想)의 시들 몽땅 걷어내고, 수직으로 서는 통찰(洞察)의 시들 널리 흩뿌리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