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황 상 민 |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평생 잊혀지지 않는 ‘벼락치듯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는 이들에게 무엇일까? 마음을 흔들어 놓은, 인생의 빛나는 순간을 나타내는 시구는 무엇인가?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들의 삶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을까? 각기 다른 100명 이상의 시인이 말하는 최고의 시구를 통해 시인의 마음을 그려낼 수 있을까? 시인이 꼽았던 명시의 한 구절을 통해 ‘시의 존재’, ‘시인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시인의 심리를 분석한다.
최고의 순간, 황홀한 절정을 맛보게 하는 시구란 ‘한 줄의 시구’가 만들어내는 마음의 작용이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살았던 시대의 반영이자 시인이 그토록 찾았던 ‘그 무엇’이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어떻게 형상하느냐에 따라 그 ‘무엇’은 시인에게 다양한 시구로 각인된다.
한 폭의 그림이 전경과 배경으로 구성되듯이 때로 시는 시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주는 화폭이 된다. 시인이 그려내는 시는 때로 심리학자가 분석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간의 마음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나와 공감할 수 있는 인간 마음의 상응이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던져진 것이 아니라, 나를 울리고 나를 힘내게 하는, 아니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시인이 아닌 심리학자의 호기심은 한 줄의 시구를 통해 시인이 체험하고 드러내었던 감정과 생각,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것은 바로 시인이 그려내었던 자신의 마음의 지도이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행위는 내용물이 아니다. 그 내용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감정과 판단, 행동을 낳는 마음의 작용이다’. 이제 시구가 사라지고 인간의 감성과 사고, 행동만 남았을 때, 우리는 시인이 그려내었던 시의 세계에 어떤 마음의 지도가 드러나는지를 보게 된다.
60년이 넘도록 청소년기에 읽은 시는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돌”에 관한 시의 기억은 “바위”에 관한 시를 쓰게 한다. 분노에 차, 별을 보지 못한 시인에게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라는 시구는 바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을 쓰는 단초가 된다. ‘시’는 마음을 달래주는 무엇이 아닌 마음을 키워내는 역할을 했다. 삶의 목표가 되고, 또 시구와 교감하는 마음을 창조하는 에너지이다. 그렇기에, 시는 시인이 살고 있는 세상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시인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한국 시인 100인에게 벼락치듯 자신을 전율시킨 시구는 바로 자신의 삶과 감응하는 절대자 그 자체였다.
절대적 그 무엇으로 형상화되는 ‘시’는 한국의 시인에게 하나의 역병처럼 다가온다.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움직이는 비애가 내면을 훑고 지나갈 때 시인은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는다. 시구는 정신의 지문指紋처럼 남고, 또 다른 절망 같은 시작詩作이 시작된다.
“지난 여름은/ 줄곧 난행亂行만 당하고/ 겨우 한 줄의 시를 써서 수습하고……/ 빈자貧者로다. 빈자로다. 나 이 땅의 1등 가는 빈자로다.” 젊은 시절 외웠던 한 구절의 시구는 바로 생활의 자화상이다. 빈취貧臭, 그것을 좋아했지만, 단지 한 동네에서 같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시절로 기억하고 싶지만, 현실의 삶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한 구절의 시가 있었기에 살 만했던 그런 시기로 기억할 뿐이다.
“무의식은 의식에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인간의 판단과 감정, 혹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정신의 작용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도 일부는 무의식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무의식이지만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일에는 바로 “우리가 어느 정보에 관심을 줄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정보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을 위해 목표를 설정하는 일”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시인의 마음은 아주 놀랄 정도로 정교하고 효율적인 도구처럼 움직인다.
우리의 ‘의식적 마음’이 삶의 다른 일로 바쁠 때조차도 우리의 무의식은 다른 정보들을 해석하고 평가하여 우리의 목적에 부합하는 정보를 골라낸다. 이것이 ‘적응무의식’이다. 시인에게 최고의 시구로 남아있는 시의 구절은 바로 시인이 보여주는 ‘적응무의식’이다. 엄청나게 밀려오는 많은 정보들을 순식간에 비의식에서 분석하고 그 정보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는 마음의 능력이다. 인간은 적응무의식을 통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파악하고, 위험에 대해 경고를 발하고, 목표를 설정하고, 세련되고 효율적인 행동을 시작한다. 아니, 이런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해 낸다. 적응무의식은 사람들이 자각하지 않는 느낌과 편애를 만들어낼 수 있다. ‘벼락치듯 시인을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는 바로 시인의 적응무의식이 작용한 결과물이다.
“싱그러운 거목巨木들 언덕은 언제나 천천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 시인이 고민했던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사물의 이면에 존재하는 복합적 의미를 은연중에 담아내고 싶었다고 한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얻고 싶었을 것이다. 시인의 ‘적응무의식‘은 어떤 이유로 이런 유혹을 받았을까?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인에게 고민했던 화두였다. ‘이 세상에 시 아닌 것은 없다. 네가 쓰는 모든 것이 시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에 대해, 삶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버릴 때 시인은 우리의 마음이 알려주는 적응무의식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스스로 ‘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바로 시로 만들 수 있을 때, 시인은 시구를 붙잡고 날아오르게 된다. “무수한 정적”이 “와글와글거리는” 상황일지라도. 시인은 수많은 사람과 묘한 정서적 일체감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세계와 삶에 대한 각성이다. 시인들이 지나온 시대가 어두웠기에 시인은 시를 통해 생존의 힘을 얻고 또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게 된다.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병든 내면은 항상 나 자신의 내면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모두 정신적 가족이 된다. 어둡던 가정, 나약한 감성, 우울한 사춘기의 은유는 시를 통해 밤으로 표현되지만, 그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그리고, 이런 밤은 지금도 계속된다.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는 시인이 살았던 시대의 상징이었다. 양심만으로 양심을 지킬 수 없었고, 용기만으로 승리할 수 없었던 시절의 마지막 세대가 자신이라고 믿었던 시인에게 ‘시‘는 바로 자신이 지켜야 할 무엇이었다. 그랬기에, 시인은 자기에게 끊임없이 “내 길은 문학에 있으며, 언젠가는 누구의 의지도 아닌 내 의지로 그 길을 가게 되리라”는 암시를 해야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기 확신이다. 시는 자신에 대한 세뇌였다. 물론, 상황에 따라 쉽게 바뀌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에 시인이 되고 싶은 자신의 삶의 경로는 흐르는 물결처럼 움직이기도 했다.
한국의 시인이 표현하는 시는 자신의 분신이었다. “세월이 흘러 풍경이었던 설움은 나의 분신이 된다”. “애틋한 그리움, 아직도 이런 시구를 쓰지 못한 부끄러움을 나는 항상 느끼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시는 항상 캄캄하고 외로웠던 문청 시절의 또 다른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가 부산이든 서울이든 아니면 탄광촌이든, 시인은 혼자 어두운 유적지에 남아 있는 유물이 된다. 시인의 호주머니 속에는 언제나 죽음과 연결되는 부스러기가 있다. 이런 경우 항상 자신의 마음에 투사되는 한 줄기 불빛은 바로 시詩였다.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널 안에 매장된 자신을 보는 시인은 막연하게 슬픔에 기댄 자화상을 그려낸다. 물론, 시는 관 속의 시체를 부활시키는 몰약이다.
“덜컹대는 직행버스 안에서 시집을 읽었고, 다시 살고 싶었다. 그날 난 아주 나른한 계시를 받았다. 통닭 냄새를 맡으며 제외된 자들이 주는 눈부심을 알았다. 절창絶唱은 제외된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시를 씀으로써 세상에서 제외되고 싶었다.” 군대라는 척박한 상황에서도, 육체적·정신적인 피폐한 시기라는 기억마저도 습작의 시기로 변신시킨다. 군대의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시집을 읽는 모습은 바로 스무 살 무렵의 비감한 심정으로 감응한다. 비록 이제는 정신이 백골처럼 무심한 시점이 되었더라도 시인에게 시는 자신을 일깨우는 자명종이 된다.
시는 시인의 마음의 표식일 뿐 아니라 시대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상징이다. ‘어쩌면 이리도 내 마음 그대로일까.’ 마음을 대신해 표현해주고 또 마음을 흔들어주는 것이 시의 체험이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시인이 기억하는 그때는 ‘너무나 어리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시는 바로 그때 희열의 근원이자 삶의 목표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적산가옥으로 남겨진 썰렁한 다다미방 하숙집에서 겨울을 나며 입학시험 준비를 하던 소년에게 한 편의 시는 어린 영혼을 흔들어주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법대로 가기를 권하신 아버지의 명령을 배반(?)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국문과를 택한 소년의 삶은 모험이다. 자신이 재가 되는 경험을 한다. 우울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순간에 알 수 없는 시에 대한 희열을 맛보는 순간이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난독의 시절이자 남독의 시절이었고 사춘기로 접어들까 말까 한 시기, 이 구절은 야한 비디오 화면처럼 자꾸만 떠올려진다. 몰래 혼자 설레어하며 부끄러워하면서도 계속 이 구절을 읊조리기도 한다. 삶에 대한 비극적인 예감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하지만 한편 그 괴로움을 즐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이 누구의 발자취인지 알 수 없지만, 시란 놈은 그렇게 시인에게 엄습했다. ‘처음에는 싱겁고 무덤덤했던 글귀가 어느 날 하루 종일 입술에 붙어서 팔딱인다’. ‘번개가 치고 온몸의 혈류가 범람하는 전율’을 만들어낸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시구를 막 ‘느끼기’ 시작한다. 지금은 “영원한 루머”보다 저 ‘물질적인 손’에 끌리지만, 그래도 시인에게 영원한 루머는 삶의 다양한 종류의 질문이다. 비록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해도 좋다. 자신에게 했던 맹세, 까무라칠 것 같았던 느낌, 부르다가 죽어도 좋을 이름 하나는 갖고 싶다. 나에게도 내 이름을 부르다 죽을 누군가가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시인에게 시는 짝사랑의 열병이었다.
청춘과 삶의 모습은 연애였다. 그것은 수없이 내 안에 떠 있던 섬으로 인해 좌초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떠나간 사랑을 탓하느라 청춘을 소비했지만, 섬은 내게 사랑의 은유처럼 남았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운명을 반복하는 어떤 실현 불가능한 욕망의 치환이었다. 나 사이에 섬이 있었고, 그래도 아직도 그 섬에 가고 싶은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어느날에사, 어둡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 이런 싯구를 통해 시인은 ‘천둥의 빗금이 가슴을 쫙 후비듯 금을 긋는’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상상할 수 없었던 그것, 백일기도 끝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손쉽게 가슴에 와 닿을 수 있는 무거운 의미의 밀착이라고 표현할 때, 과장과 부정을 통한 마음의 충격을 나타낸다. ‘지금도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다’는 그 충격이 시인에게 어떤 사리 같은 결정물을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시인에게 항상 삶이란, 아니 인생이란 거창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렇게 한가하고 게으르고 그러면서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 것을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러러진다.” 저리 순연하게 ‘우러러’ 볼 수 있는 시구에서 ‘참 인간으로서도 잘 살았다’ 싶은 부러움과 찬탄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 줄의 시구를 애틋하고 뜨겁게 느끼는 시인들에게 삶은 항상 녹록치 않은 시간의 연속이다.
시인의 삶의 고백은 계속된다. ‘사는 게 무엇인지, 신념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 시인은 데마(<디모데후서 4:10> 참고)처럼 세상으로 나가 보고 싶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 오랜 방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방황하는 곳이 그 어디든 밤마다 허공에서 푸른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길모퉁이에서 불안스레 듣던, 저 맑고 뜨겁고 목 타는 울림, “어서 너는 오너라.”
시인이 노래하는 삶의 모습은 그 자체로 처절하다.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나의 존재가 사라지고, 타인이 나의 하늘이 된다. ‘밥줄’이라는 말에 가슴은 아려지고, 밥줄 때문에 자존심은 사라진다. ‘세상 앞에서 허리를 굽실거려야 하는’ 반길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된다. 삶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새처럼 날아가는 것을 꿈꾼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어깨에 힘 빼고, 혀 꼬부리지도 않고 그저 한 마디 툭, 던져지는 이 말을 통해 자신을 들어 올려 놓고 싶어했다. 삶 속에서 시인은 쉽게 맥없이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고 만다. 왈칵 저 새떼의 일원이라도 되고 싶지만, 그것은 시구로 남을 뿐이다.
하릴없이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 가는 어느 시인에게 “집은 벽 속의 곳간에서 제 나이를 꺼내 먹으며 늙어간다. 집은 저 벽을 부수고 나와야 한다.”는 시구는 바로 ‘벽을 부수고 나오라’는 소리이다. 하지만, ‘덩굴을 걷어내고, 벽을 부수는 일’은 쉽지 않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에게 갇힌’ 마음의 감옥 속에 숨어 있었기에, 변화란 항상 죽음과 친구가 된다.
숨어 있고, 갇혀 있는 시인은 “너는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아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라고 노래한다.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인 시절의 계시이다. 돌아가신 엄마가 꿈속에 찾아와서 밥을 해주시는 장면, 옥탑방에 누워 천장에 드리워진 두꺼운 구름장들을 쳐다보면서도 울지 않으려고 했다. 울면 지는 거니까. 하지만, 울어야 했다. 이 시구를 되뇌이면서.
삶을 노래하는 시인에게 삶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또 다른 세상을 꿈꾸게 된다. “아,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 아버지 없는 집에 늘 앓아누워 있는 엄마를 보며 시인이 꿈꾸기도 한다.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는 바로 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시는 때로 우연히 만들어내는 삶의 단편을 보여준다. 삶의 모순과 의미는 시가 만들어내는 생생함과 실재감으로 되살아난다. 왼손잡이, 안경잡이에다 소위 말하는 결손가정의 병약한 소녀에게 독백 같은 습작시는 이상한 시인의 이상한 시가 되기도 했다. “‘거울속의나는왼손잽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 소녀의 독백은 “거울 속의 나는 정상/ 왼손잡이 아냐, 풀 같은 머리칼/거울 속에서 나는 두 개의 눈동자”였다. 감옥의 간수 같은 국어선생은 화부터 냈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베끼고 난리야!” 출석부로 머리를 얻어 맞으면서 증거물로 내민 이상의 시집은 정말 난생 처음 본 것이었다.
‘시를 쓸 종이가 없어 날 지난 신문지 한 귀퉁이에 몇 줄을 끄적거려 그것을 천금인양 가슴 한편에 감추던 시절’ 한 줄의 싯구는 바로 시인의 마음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한국의 시인에게 시는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높고 뜨거울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얄궂게도 그렇게 진저리를 쳤던 가난과 외로움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다지 가난하고 외롭지 않게 된 지금에서야 시를 만들게 했던 자양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하지도 않고, 또 외롭지도 않기에 더 이상 시인의 마음이 그다지 높고 뜨겁지도 않다. 원하였던 일이지만, 한편으로 두렵고 절망스러운 삶의 변화이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스무 살의 ‘그 어떤 포스와 비전’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에 울고 사람에 울고 신에 울고 최루탄에 울고 술에 울었던’ 어떤 시기였다. 비장한 ‘포스’를 내뿜으면서 확고한 ‘비전’이기를 바랐던 그 마음이 지금도 그대로 간직되기만을 기대한다.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이 시구가 척추를 지나 심장으로 파고들 때 시인은 이제 나도 고래를 잡으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황상민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박사. 저서 『대한민국 사람이 진짜 원하는 대통령』 『세상이 변해도 성공할 아이로 키워라』, 공저 『한류와 아시아의 대중문화』 『현대 심리학 이해』 『인간행동의 이해』 등과 번역서 『인터넷 심리학』 『적응을 위한 지식의 기능: 산다는 것과 안다는 것』 등 다수 있음.
출처 : 문학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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