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하여

시 한편을 읽는것도 창작이다/ 불과나무중에서

문근영 2009. 3. 30. 11:41

좋은 시란 무엇일까? 이 물음을 던질 때마다 나는 화가 아뇰드 브론치노의 작품

인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를  떠올린다.  본시 여자에 대한 혐오감이  강했던

키프러스왕 피그말리온은 자기 손으로 조각한 상아 여인을 탄생시킨다.

   그는  자기가 꿈꾸던  이상적인 여인상을 상아로   조각한 뒤  그 여인에게  흠뻑 

빠져버린다. 거의 미치다시피 자아도취된 나머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찾아가

이 여인의 몸속에 생명을 불어넣어 달라고 간곡히 기도한다.

   기도가 통했던지 조각화된 여인은 드디어 진짜 여자로 환생하여  상아빛 여체를

지닌 갈라테이아가 현신한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 담시적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문학적으로 암시하는 바가 크다.  상아를 깎고 다듬어  정교한 모습을 갖추기

까지 얼마나 혼신의 힘과 열정을 기울였을까 하는 애틋한 생각마저 든다.

   어쩌면 현대 성형외과의 미세술 기법의 창시자가 아닐까 싶기도하다.

   '우리는 현실의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에는 정신의 우위를 논하는 문학작품이 있고 또 질좋은 시가 많이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정작 내가 애착하는 시는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은  비단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그림도 마찬가지고 마이 페브리송도 그렇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르고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선택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자에 대한 지독한 환멸감이 또다른 창조를 낳았듯

어찌보면 불만스러운 현재가  새로운 창작의욕을 고취시키는 동기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 시 한편을 음미해본다.

 

   지는 해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 사람들이 서서

   각각 있었다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주점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방을 고쳐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 번 비틀었다

   젊은 남녀가 잠간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나는 옷밖으로 쑥 나와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전문-

 

   이 시는 우리시대의 시인 오규원의 작품이다.  내 기억으로는 90년대  중반쯤에 

시집 <새와 나무와->에 실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무렵에 책을 사봤기에  정확한

출판 날짜는 잘 모르지만 그 안에 담긴 꽤 여러 편의 시 중에서 다른 작품은 한 개

도 떠오르지 않은데 용케 이 작품만 머리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왜일까? 

   그것은 상상의 뒷면을 색칠하듯 하늘에 떠있는 언어의 구름들을 불러다가 땅에

귀착시킨 시어들이 한 풍경을 제대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깊은 심연을 스쳐가는 스냅 사진의  그림들이 가을 호수에  구름 둥둥  

떠가듯 피사체의 영상미가 던지는 음영이 아름답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당시,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이 시집을 펼쳐놓고 친구와  박달동 옥상에서

밤새워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 옥상에 올라가면 수리산 자락이  가까이

있고 앞에는 박달천이 흐른다.  공장지대에서 흘려보낸  오폐수 냄새가  진동하긴  

했지만  거기서 우리는 밤이슬토록  시 한 편을 박달천에 담궜다가 꺼냈다가 거듭

반복하며 그 해 여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나서 나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이 이 시 한 편이다.

   이 시의 무대장치가 설정된 곳을 보면 일단 강변의 간이주점이다. 그곳은  앞뒤

로 열린 공간이며 들어옴과 나감이 일정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간이주점은 임시 설치된 가연(假緣)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식 명

칭이 붙은 곳도 아니고 무허가권 가건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거기에 한  여학생이

들어오고 젊은 남녀가 서 있고 한 사내가 등장한다. 나이가 지긋한 사내인지 어떤

사내인지 알 수 없지만 잠간 나왔다가 무대밖으로 사라지는 장면까지 설정한 걸로

봐서는 철저히 시인이 의도한 대로 무장한 시의 구축성이 단단하게 드러난다.

   시가 구조상 매우 깔끔하다. 또한 빈틈이 없다. 어설픈 꼼수가 보이지 않아 비위

가 뒤틀린 정도로 앞뒤 짜임새가 너무 틈실하다보니  알밤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시를 읽으면서 시인 신경림의 <농무>를 떠올렸다.  묘하게도 그런 심적 표상

이 겹쳐 연상되었고 거기에도 가설무대가 나오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이 둘 다 상황 설정을 비교해보면 가설무대와 간이주점에 있어서 방법적 서술은

달라도 유사한 데가 있다.

   일단 차치하고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외형묘사도 중요하지만   내면으로

와닿는 상황설정이 아주 미묘하게 지는 해와 마주 비쳐지면서 안으로 확산되는

그림이다. 즉 심적 표상이 심상치 않게 엮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마음 잇는 대로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 표정관리가  섬세하고

주변 분위기와 미묘하게 얼켜 자못 의미심장한 연결고리를 이끌어낸다. 

   아주 재미있게 극적으로 구사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

학생은 그 가방이 자기 표상이며 존재를 증명하려는 데에 있어 의사표시가 확실하

고 뚜렷하다.  

   그는 공부하는 학생이므로 그 나이에 지는 해를 보는 것은 낭만적 동경일 수  있

지만 아직 감수성이 민감한 나이여서 그만큼 때묻지 않은 이미지와 거짓없이 순수

함을 지닌 미래형의 소유격이다.

   그리고 두 손을 꼬옥 잡은  젊은 남녀는 서로 연대의식을 가진  동질성의 연인이

면서 다소곳한 사이이며 끈끈한 관계다.

   그런 반면에 한 사내는 왕따격인 다소 외고집형의 사람이다.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 사내의 면모로 보아 굉장히 깐깐한 성격이며 무뚝뚝한

인물이다. 외딴집 노인처럼 혼자 사는 독거노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 사내에게 지는 해는 인생 황혼기에 오는 외로움이 뼈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에는 자조 섞인 회한이거나 노년의 무게에서 느껴

지는 허탈감일 것이다.

   그 소리에 언뜻 귀엣말로 스쳐들은  여학생은 짜증스럽다 못해 아예 가방을 고쳐

쥐며 아주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시한다. 한마디로 분위기 깬 행동이다.

   이를 지켜보는 젊은 남녀는 마냥 쳐다보면서 아득하게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

소리에는 다 찢어지고 낡은 헝겊데기 같은 씁쓸레한 눈빛이 묻어있다.

   그리하여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한 사내의 뒷모습을 무겁게

바라본다. 사내의 뒷모습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인생 종착지를 예고한다. 좌측은

시발점의 입구이며 우측은 종착지의 출구를 뜻한다.

   그리고 강물은 시간의 긴 흐름이다.

   한 공간에 어린 여학생- 젊은 남녀- 한 사내의 퇴장을 던지는 시대의 음영이

강변의 간이주점 위에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편의 시 속에는 시를 쓰는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영역이 있기에 신성불가침의

영역까지 함부로 넘볼 수는 없는 한계가 분명 가로놓여 있다.

   하지만 왜 이리 가슴 깊이 젖어오는지 지금도 알수 없다. 이것이  이 시가 내포하고

내 안의 느낌표가 아닐까. 

   시를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처럼 자기만의 독법으로 한 편의 시를 잘 읽는 것도

창작이다.

   해가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