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의 첫걸음 최동호 새 봄이 와 생명의 숨소리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듯, 시창작을 하겠다는 젊은 학생들을 처음 만나면, 그들이 내뿜는 열정의 두근거림으로 인해 나 지신의 설레임을 느낄 때가 많다.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기 시작한지 20년이 지나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그 느낌은 항상 새롭다.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유치한 작품을 보내 주었으나 학기말이 되면 놀라운 발전을 보여 준 학생들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첫 출발은 훌륭했지만 막상 학기말에는 별다른 성과를 보내 주지 못한 학생들도 있었다. 이로 인해 시는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통설이 널리 확산되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첫 관문을 뚫고 나갈 터인데, 그 주변을 배회하다가 끝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물론 시를 쓴다는 것은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수학 공식을 풀듯이 시간과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쓰기가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불현듯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한 일이다. 오랜 침잠의 시간과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이거나 자기의 전 생애를 투척한 결과에 의해 뛰어난 시가 쓰여진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입증된 바이다. 초보자일수록 단번에 승부를 내려고 하고, 초보자일수록 성급하게 좋은 시를 쓰려고 한다. 서두르는 사람일수록 입문조차 못하고 끝나고 만다는 것을 필자는 지난 20여 년의 현장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 글은 시쓰기를 시도하는 초보자들에게 시의 출발이 어떤 것인가를 가감 없이 전달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시쓰기의 출발을 위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존의 선입관을 털어 버리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1) 시를 쓰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열정이다. 2) 처음부터 굉장한 시를 쓰려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 3) 쉽게 중단하는 사람은 좋은 시를 쓰지 못한다. 사실 이 세 가지는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실전에 부딪혀보면 항상 망각하기 쉬운 전제이기도 하다. 첫 번째,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시를 쓰는 것은 재능에 의한 것이라 말한다. 재능이 없다는 것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이므로 자신이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은 재능의 문제이지 다른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예를 많이 본다. 물론 천재의 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잠자다가 눈뜨고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다는 식의 천재적 깜짝 사건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천재의 시는 누구나 쓰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이 천재가 된 것은 그들 나름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소월이나 정지용이 얼마나 그들 자신의 시에 각고의 정성을 바쳤는지는 그들의 시작 과정을 추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천재가 아니므로 나는 시를 쓸 수 없다는 말은 언제나 자기 변명을 동반하기 쉽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두 번째, 보통 초보자의 경우 상당한 연습량도 없이 단번에 세상을 뒤바꿀 시를 쓰고 싶어한다. 이는 타석에 든 타자가 별다른 연습 없이 홈런을 치기 위해 어깨에 지나치게 힘을 주었다가 스트라익 아웃이나 땅볼로 처리되는 경우와 같다. 눈물과 땀이 뒤범벅이 된 연습량을 축적한 타자만이 뛰어난 타력을 보여 줄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세상을 뒤바꾸기는커녕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 때가 많을 것이다. 첫 출발은 작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아니면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일상생활로부터 시작하라. 너무 높은 이상으로 인해 너무 먼 곳에서 소재를 찾거나 너무 고상한 시를 쓰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실패한 것임에 틀림없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옛말이 있다. 자기의 삶에 구체적으로 부딪치는 일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자기의 세계를 넓혀 나가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누구나 천재이고 싶어한다. 젊은 피가 들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젊음이 분출하는 열정을 가라앉혀 작고, 사소한 것에 눈길을 돌리고, 삶을 깊이 통찰한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세 번째, 많은 초보자들이 좋은 시를 쓰려고 서두르다가 쉽게 중단하는 예를 많이 발견한다. 어떤 경우 그들의 열정이 한 학기를 지탱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한 두 달도 끌지 못하는 예를 발견한다. 그들은 대체로 어색하게 웃으며, 시는 자기의 적성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러하지만, 아주 작은 기술 하나라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익히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의 숙련이 필요하다.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거나 운동경기를 관람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쉽게 웃을 수 있는 개그프로를 보는 것과 시를 쓰거나 고전음악을 듣는 것은 다른 일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개그프로는 대중들의 호기심이나 일시적 취향에 바쳐지는 것이지만, 시 쓰기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바쳐지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함께 공감하는 독자들에게 메아리처럼 퍼져나가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할 때 ‘인기시’라는 것이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100만 부 이상의 판매 부수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인기시를 쓴다는 것 또한 남다른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세월이 지난 다음 과연 그들의 시가 왜 그렇게 유행하였는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찾아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많다. 인터넷세대의 특징으로 인내심 부족을 드는 사람이 많다. 한 학기 수업을 끝내고 초보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중의 하나가 시쓰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나는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일도 쉽게 중단하는 사람은 평생 이일 저일 시작만 하고 아무 것도 마무리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때로는 시에 미쳐서 다른 일은 모두 포기하고 시에 몰두한다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조지훈은 ‘젊은 날 시로 인해 병들었는데 나이 들어보니 시로 인해 위안을 얻었다’는 말을 한 바 있지만, 지나치게 극단적인 몰입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극단적인 외곬수로 나아가 막다른 길에 부딪친다면, 시를 가능케 하는 영혼의 샘이 고갈되고 말 것이다. 어떻게 보면 쉽게 중단하는 사람은 아예 시 쓰기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흔히 하는 말로 시를 모른다해서 인생을 잘 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 쓰기의 즐거움은 그 만큼의 괴로움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인간에 의해 창조된 언어를 통해 자기 존재의 최대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태초의 인간은 물론 미래의 인간들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고도의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 성과가 때로 유치한 단계의 것일 경우에도 자기만의 고유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독자성을 가진 예술이 시쓰기라고 할 것이다. 험난한 도정을 통해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기쁨 못지 않게 언어를 통해 자기의 내면에 도전하는 시쓰기의 기쁨은 새로운 대륙의 발견에 비견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상에서 거론한 세 가지 사항을 전제하고 출발한다면 나름대로 시쓰기의 첫 문을 여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성공적인 시쓰기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음 일곱 가지를 좌우명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 좌우명을 마음에 새기며 시쓰기를 지속한다면 그 나름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많이 쓰고 많이 고칠 것. 둘째, 좋은 시를 많이 읽고 외울 것. 셋째, 타인의 비평을 겸허하게 수용할 것. 넷째,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각으로 언어를 숙성시킬 것. 다섯째, 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힐 것. 여섯째, 존경하는 스승을 가질 것. 일곱째, 밀폐된 자의식을 극복하고, 자기의 길을 찾을 것. 위의 사항들은 그 동안의 현장체험에서 얻어진 사례들을 집약한 것들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30년 가까이 시쓰기를 계속해온 나 자신의 고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학생들을 가르쳤다기보다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성급한 속성주의가 횡행되는 시대에 학생들은 위의 좌우명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시쓰기를 위해서 이렇게 해야할 일이 많다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네. 돈벌이나 출세에 도움이 안 되는데 무엇하러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나. 이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예술적 장르 중에 가장 가깝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시쓰기이다 라고. 풍요로운 삶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시는 초등학교 시절의 교과서 속에 던져버려라. 이렇게 된다면 눈물도 기쁨도 모두 과거의 시간 속에 밀봉시켜두라고 말해버려야 할 것이다. 제자들에게 시를 배우라고 권고하던 공자는 어느 날 그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너 시를 배웠느냐’ 고 물었다.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고 대답하자, 공자는 ‘사람이 시를 배우지 못하면 남과 말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고 했다. ‘시를 통해 인간적 감정을 느끼고, 시를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기르고, 시를 통해 여러 사람과 뜻을 함께 하고, 시를 통해 세상을 비판할 수 있다.’ (詩可以與,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고 중국문화 나아가서 동양문화의 대표자 공자는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정지용은 이를 원용하여 벽창호가 벽창호를 인도한 것이 공자의 말을 따르는 조선의 선비들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용은 공자의 예를 따라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서 현대시를 가르칠 때 《시경》을 기본 텍스트로 하였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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