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파꽃이 피는 이유 / 권정일

문근영 2008. 11. 14. 00:38

파꽃이 피는 이유 / 권정일

 

 

고백해 봐요,

왜 꽃을 피우는지.

 

강을 사이에 두고 파와 가로등은 마주 봐요 파는 강 저편에서 쏘아대는 불빛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언제부턴가 가로등을 연모하기 시작 했어요 문명과 반문명은 내외(內外)해야 하거든요


파, 파하! 파하! 파하!

피어나는 웃음들.


저녁, 해 그림자의 귀를 물고 가로등은 서둘러 불빛을 꺼내요 근지러워, 근지러워 불빛을 물고 잠수하는 강물을 따라 들어가는 파, 하하하 낮엔 햇빛과 밤엔 가로등불빛과 연애해요


강은 이들의 여관이에요.

사생활이 없어요.


강심으로 난 모든 길이 가로여서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야 해요 시간을 잊은 파들의 격렬한 구애, 화끈 몸 달아오르다 지친 가로등이 불빛을 거두어들이는 아침


밤새 하얀 아이를 수없이 퍼질러놓았어요.

파, 꽃밭이에요.


올해도 파 농사 절단이라며 파 꽃모가지를 뚝뚝 따 강물에 던지는 아주머니, 농산물시장은 파 꽃은 뱉어 낸대요 강은 표정을 지우고 흘러가요 꽃 피우는 일이 때론 생계를 똑똑 따내는 일이기도 하나 봐요 

 

'다시 보고 싶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숭례문 / 강인환  (0) 2008.11.14
가을 식사 / 최금녀  (0) 2008.11.14
호미 / 백무산  (0) 2008.11.14
붉은 염전 / 김평엽  (0) 2008.11.14
떨림 / 강미정  (0) 2008.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