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우리 살던 옛집 지붕 / 이문재

문근영 2008. 11. 12. 12:39

우리 살던 옛집 지붕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

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역시 반짝여 주곤 했다

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

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

이러는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

나는 빈집을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

기억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에는

우리가 울면서 이름붙여 준 울음 우는

별로 가득하고

땅에 묻어주고 싶었던 하늘

우리 살던 옛집 지붕 근처까지

올라온 나무들은 바람이 불면

무거워진 나뭇잎을 흔들며 기뻐하고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그해의 나이테를

아주 둥글게 그렸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 위를 흘러

지나가는 별의 강줄기는

오늘밤이 지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집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천장을 바라보며 죽을 수 없었다

우리는 코피가 흐르도록 사랑하고

코피가 멈출 때까지 사랑하였다

바다가 아주 멀리 있었으므로

바다 쪽 그 집 벽을 허물어 바다를 쌓았고

강이 멀리 흘러나갔으므로

우리의 살을 베어내 나뭇잎처럼

강의 환한 입구로 띄우던 시절

별의 강줄기 별의

어두운 바다로 흘러가 사라지는 새벽

그 시절은 내가 죽어

어떤 전생으로 떠돌 것인가

알 수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집을 떠나면서

문에다 박은 커다란 못이 자라나

집 주위의 나무들을 못박고

하늘의 별에다 못질을 하고

내 살던 옛집을 생각할 때마다

그 집과 나는 서로 허물어지는지도 모른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죽음 쪽으로 허물어지고

나는 사랑 쪽에서 무너져 나오고

알 수 없다

내가 바다나 강물을 내려다보며 죽어도

어느 밝은 별에서 밧줄 같은 손이

내려와 나를 번쩍

번쩍 들어올릴는지

 

 

 

 

마음의 오지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 줄 때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치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 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궈 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옷을 만든다

그는 커다란 그늘 위에서 산다

그는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먼저 옷을 지어 놓았다 그렇다고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니어서

나의 초록빛 옷은 주머니가 작으며

아주 무겁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어떤 이들은 나의 이상한

눈빛은 초록빛 옷에서 기인한다고도 말하고

눈빛이 초록빛이라고도 말하는데

나와 오래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을 먹고 산다

그는 무거운 그늘과 잠들고

아침마다 햇빛의 문을 열며 나에게 초록빛 옷을

입힌다 아침마다 그는

 

 

 

 

나는 그를 모른다                                

 

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그늘이 많은 사람 나는 지금 그의 곁에 없지만

노우트 겉장의 글씨처럼 아직도 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쓰고 천천히 읽는다

오후 세 시의 사랑은 오후 세 시에 끝나고

더운 물에 손을 씻는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이라도 읽을까

눈을 들어

강변으로 나있는 송전선보다 빨리

 

나는 저녁의 그 집에 닿고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걸음걸이로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찻잔이나 옷걸이에는 일부러 먼지를 묻혀놓고

상류의 폭우를 이야기하지만 아직 그는

그림 속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가방 속에서 오래된 무관심을

꺼내 놓는다

여름 휴가

여름의 휴가

나는 그를 아직 알 수 없다

 

해바라기가 많은 그 집으로 이사를 하지요

그럼 당신의 아이를 서른 명 낳아 주겠어요

서른 명 서른 살

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낙엽을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

그는 그림 속에서 잠자고

그림 속에서 식사를 한다

그때 서른 살이 언덕 너머 멀리에 있을 때 그때

나는 왜 그곳을 지나갔을까

 

해바라기 씨앗이라도 사올까

씨앗만이라도

오후 세 시 전화로 끝나버리는 사랑

나는 순결한 사각형으로 남아 있고

그의 여름 휴가는 어디에 가 있을까

강변으로 나있는 의자에는 먼지가 쌓여 있다

서른 살

그는 아직 나를 모르고 해바라기는 불을 끈다

 

나는 이미 서른 살인 것이다

 

 

 

 

거울                                                     

 

모든 빛을 통과시키기 때문에

유리창은 늘 차갑다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아서

거울은 모든것을 되비춘다

유리의 막힌 한쪽

거울의 뒤쪽

거울은 따뜻하지 않다

내 살아온 날들은

내 죽음이 함께 살아온 날들

이렇게 살아 있음의 뒤편이

바로 나의 죽음

거울의 배면

내가 죽어야 내 죽음도 죽는다

 

 

사진/나만의 세상님 블러그에서

 

저물녘에 중얼거리다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

없어질 거야, 아마 이런 저물녘에

무관심해지다보면 눈물의 그 집도

무너져버릴 거야, 사람들이

그리움이라고, 저마다, 무시로

숨어드는, 텅 빈 저 푸르름의 시간

봄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주소가

갑자기 떠오를 때처럼, 뻐꾸기 울음에

새파랗게 뜯기곤 하던 산들이

불켜지는 집들을 사타구니에 안는다고

중얼거린다, 봄밤

쓸쓸함도 이렇게 더워지는데

편지로, 그 주소로 내야 할 길

드물다, 아니 사라만진다

노을빛이 우체통을 오래 문지른다

그 안의 소식들 따뜻할 것이었다

 

 

 

 

푸른곰팡이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화전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어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노독(路毒)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을 닮아 문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리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한다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사진/킹쿠야님 블러그에서

 

낙타의 꿈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을 버리고

깊은 눈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의

마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미 사막의 입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길의 일부가 내 길의

전부가 되었다

그가 거느리던 나라의 경제는 사방의 지평선이므로

내가 그를 싣고 걸어가는 모래언덕은

언제나 처음이었다

모래의 지붕에서 만나는 무수한 아침과 저녁을 건너는

그 다음의 아침과 태양

애초에 그가 나에게서 원한 것은 그가

사용할 만큼의 물이었으므로 나는 늘

물의 모습을 하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햇빛이 떨어지는 속도와 똑같이 별이

내려오고 별이 내려오는 힘으로 물은 모래의

뿌리로 스며들었다

그의 이마는 하늘의 말로 가득가득

빛나고 빛나는 만큼 목말라했고

그때마다 나는 물이 고여있는 모래의

뿌리를 들추어 내 몸 속에 물을

간직했다

해가 뜨면 모래를 제외하고는 전부 해

바람불면 모래와 함께 전부 바람인 곳

나는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그의 마른 얼굴을 씻어주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였을 때

나는 많은 물을 거느렸다

그가 하늘과 교신하고 있을 때

나는 모래들이 이루는 음악을 들었다

그림자 없는 많은 나무들이 있고

그의 아래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늘 지나가고 그 나무들 사이로 바람 불고

바람에 흐느끼는 우거진 식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짐승들이 생겨나고

내 잔등 위에서 움직이는 그가

그 모든 것을 다스려 죽을 것은 죽게 하고

죽은 자리마다 그 모습을 닮은

나무나 짐승을 세워놓고 지나간다

도중에 그는 몇번이나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시고 몸을 청결히 했다

모래언덕이 메아리를 만들어 멀리

멀리로 울려퍼지게 하는 그의 노래

그가 드디어 사막을

바다로 바꾸었을 때

나는 바다의 환한 입구에서

홀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출렁출렁 바다 위에서 그를 섬기고 싶었지만

그는 뚜벅뚜벅 바다 위를 걸어나갔다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또한 훌러와

사막이 아닌 곳에서 그를 섬기는 일이

사막으로 들어가는 일로 변하고

바다가 다시 사막으로 바뀌어

바다의 입구에서 내가 작은 배가 되지 못하고

종일토록 외롭고

밤새도록 쓸쓸한 나날

그가 나를 떠났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버리고 버리는 일도 다시 버리고

나도 남지 않았을 때

저녁 나무들 사이로 태양을 버리고

물의 어두운 어깨를 바다로 띄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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