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벚나무 아래서 / 장만호

문근영 2008. 11. 12. 13:25

벚나무 아래서/장만호



1. 물들의 우화


물들은 일어나 한 그루 나무가 된다
어두운 흙 속에서 이내 출렁이다가
제 몸을 이끌어 거슬러 올라갈 때
물들은 여기 나무의 굽은 등걸에서
잠시 동안은 머물렀을 것이다
제 몸을 수 없는 갈래로 나누고 나누어
나무의 등뼈와 푸른 핏줄을 통과할 만큼 작아졌을 때
공기의 계단을 오를 만큼 가벼워졌을 때
목질의 그릇에 담겨 잠을 자다가
물들은 술처럼 익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봉인된 시간을 열고 꽃들은 핀다
제 몸을 바꾼 물들은 나무의 눈망울이 되어
지상과 제 높이의 꿈을 견주어 보며 몽롱하게,
다만 몽롱하게 제 향기에 도취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저 나무는 이처럼
백색의 광휘로 불타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2. 풍화


여기 커다란 불기둥이 있네
몹시도 타오르다가
바람의 가는 뼈를 헤집고, 거기
제 몸을 날리는 차가운 불꽃들이 있네
때를 기다리는,
한때 무섭게 가라앉은 물이었다가
제 꿈으로 불타오르는 뜨거운 몸이었다가
이제는 너에게 가고자 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수직의 물결,
그 수직의 물결을 따라
만천화우로 너에게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곱게도 사람아, 네 얼굴이 향기처럼 붉다


겨울 풍경 /장만호




술을 먹고 집으로 가는 길
숨죽인 화계사를 건너고 국립 재활원을 지나다 보면
서서히 일어나 하나, 둘 셋 ······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긋듯 손을 잡는 아이들
휠체어를 타거나 지체 부자유한 별들
밀거나 당겨주며 수유리의 밤을 온 몸의 운동으로
순례한다, 길 밖에 고인 어둠만을 골라 딛으면서
몸이 곧 상처가 되는 삶들을 감행하며
흔들리는 平生을, 과장도 엄살도 없이 흔들며 간다
그 모습 가축들처럼 쓸쓸해
왜 연약한 짐승들만 겨울잠을 자지 않는지
작은곰자리에서 내려올 눈발을 헤치며,
왜 사람만이 겨울에 크는지,
묻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붕어빵을 입에 물고는
風警처럼 흔들리며 간다
깨어 있으려고
흔들려 깨어 있으려고

 

 

이파리 위의 생 /장만호



나무들은 대지의 푸르른 심지
한번도 이 촛불은 꺼지지 않았네
바람이 불면 더욱 더 일렁거릴 뿐
마을은 전생의 언덕에 머리를 괴고
가만히 최면에 들지


그런 밤이면,
간혹 궁수지리를 이탈한 별 하나
화살표를 남기고 사라지거나
새 한 마리
(후생에는 잘 할 수 있겠지)
푸드득거리며 날아 오르기도 하지만
산다는 것은 명백한 모호함
나는 이생을 생각하다가
조용히 심장을 두근거리며
푸른 촛불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네


그러나, 그 불길 속
잘못 내려앉은 인생인 듯
명명백백한 벌레 한 마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가듯
한 불꽃에서 다른 불꽃으로 건너가고 있네
생애가 그저 한 이파리였을 뿐이네

 

바람소리를 듣다/장만호




  아버지는 늙어갈수록 더 깊은 강으로 나갔다 늙은 아버지의 삿대
가 비단을 자르듯 저녁의 저 강, 저 저녁의 강으로 나아갈 때 아버
지, 자라 한 마리만 잡아다 주세요 푸른 자라를 키우고 싶어요 그물
을 펼치는 거미를 보면서 나는 자꾸 무언가를 키우고 싶었다 할머니
의 밭은기침 소리를 들으며 늙은 아버지는 더 먼 강심으로 배를 저
어갔지만 아버지의 그물에 걸릴 고기는 없었다 할머니, 기침소리가
너무 커요 아가, 속이 비어 있는 것들은 이렇게 소리를 낸단다


  바람이 가는 길을 마음이 가네 저녁 한때의 바람을 가르는 대숲에
서 아버지, 늙은 아버지가 살고 아버지 허물을 벗는 봄산의 기슭 아
래서 뼈를 깎듯 갈라진 발굽을 벗겨내는 할머니와 오래 거기 살았네
할머니 자라는 어디를 갔을까요 배 고프지 아가, 소쩍새 소리를 들
어라 그러나 새소리들은 낮고 어두운 집으로 들어와 마당을 떠다닐
뿐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네 푸른 소리들이 머무는 그곳에 늙은 아
버지, 거기서 우리 갑골문처럼 오래 살았네

 

 

적벽가/장만호



  사랑을 한 적이 있었는데 불 같은 상처를 얻은 적이 있었는데 가
령 한 말의 술을 마시고 한나절의 비를 맞고도 자벌레처럼 움츠리던
적이 있었는데 비 맞은 매미처럼 떨었는데 그런 날이면 나 적벽에
가고 싶었네 나 그저 생전에 하나의 태몽 어느 여름날 어머니의 꿈
속을 유영하던 어린 물고기였을 뿐인데 그 윤회의 강에서도 나는 이
사랑을 꿈꾸었던가
  큰물 지면 큰물이 흐르고, 물은 더욱 단단한 뼈와 흰 힘줄을 갖고,
그 힘으로 나를 덮치고, 사랑은 물처럼 흐르고, 젖은 깃털처럼 나를
가라앉히고, 나무들은 강둑으로 얼굴을 내밀고, 네 설움 가소롭다,
어디서 어머니의 목소리 들리고, 적벽은 보이지 않고, 나는 더 이상
물고기가 아니고 ······
  사랑을 하고서도 우화하지 못하네 그대의 龍文 아래 상처는 비늘
처럼 빛나고 나 화석처럼 단단해져만 가네 어느 새로운 날들은 오지
않고 그곳에 가서 차라리 풍화되고 싶었지만 나는 한 번도 물을 건
너지 않았네 물 건너지 않았으므로 가지 못한 적벽에 그대가 풍화하
고 있네

 

 

園 丁/장만호




아침 꽃을 저녁에 줍는다1)
하늘은 어디에 이 많은 음들을 숨겨두고 있었던 걸까
부딪히자마자 세상을 온통 악기로 만드는
환한 빗방울들, 이런 날이면
새들도 타악기다
흙들은 더욱 겸손해져서
길 잃어 젖은 개미에게도 발자국을 허락한다
덜 자란 풀꽃들을 솎아내는 일은 언제나 힘들다
무엇을 가꾼다는 것은 잘라내거나 뽑아내는 일이라는 걸
이 정원에서 배우기도 했지만,
모르겠다 꽃들에게도 말은 있어
그 꽃말들을 듣다 보면
작은 것들일수록 제 뿌리를 다해 흔들리거나
은화식물처럼 열망의 보따리를 감춰두고 있다는 것을
이 정원의 저녁
작고 덜 자란 것들이 나를 가르친다
아이들은 잘 살고 있을까,
영희, 영호, 영수......
내가 이름 붙인 부끄러운 꽃말들
볼품 없는 한 생이 떨군,
젖은 꽃잎들


아침의 꽃들을 저녁에 주워 올릴 때
깊은, 나무들이 울리는 푸른 풍금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