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날아라 원더우먼 / 정끝별

문근영 2008. 11. 12. 13:22

날아라! 원더우먼 /정끝별



뽀빠이 살려줘요-소리치면
기다려요 올리브! 파이프를 문 뽀빠이가 씽 달려와
시금치 깡통을 먹은 후 부르르 알통을 흔들고는
브루터스를 무찌르고 올리브를 구해주곤 했어
타잔 구해줘요 타잔 - 외칠 때마다
치타 가죽인지 표범 가죽인지를 둘러찬
타잔이 아- 아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와
악어를 물리치고 제인을 번쩍 안아들던
아 정글 속의 로맨스
베트맨-. 슈퍼맨- 외치면
망토자락 휘날리며 날아와 조커와 렉스로더를 해치우고
마고트 키더나 킴 베신저의 허리를 힘차게 낚아채던
무쇠 팔 무쇠 다리 육백만불의 사나이들

그때마다 온몸이 짜릿했어, 헌데 말야
문 프린세스 헐레이션-
세일러문 요술 봉을 휘두르는 딸아이를 붙잡고
날 좀 풀어줘- 날 좀 꺼내줘-
허우적댈 때마다 기억나는 이름은 왜
어떻게든 살아나가 물리쳐야 할 악당들뿐일까
왜 난 부를 이름이 없는걸까, 꿈에조차, 왜

 

 

천생연분 /정끝별
 


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딱딱해 너무 큰 데다 향기도 없어 그 열매를 좋아하는 건 쳇! 토끼만한 아고우티뿐이라네 앞니로 껍질을 깨 속살과 씨를 먹고 남은 씨를 땅 속에 숨긴다네 다른 짐승이 찾기 어려울 만큼 깊이, 싹이 돋아나기 쉬울 만큼 얕게, 잊어버릴 만큼 여기저기

너에게만은 독이 아니라 밥이고 싶은
너에게만은 쭉정이가 아니라 고갱이고 싶은
그리하여 네가 나를 만개케 하는

 

미라보는 어디 있는가/정끝별

                            

미라보
하면 파리의 세느강 위에 우뚝 선 다리였다가
옥탑방 벽에 붙어 있던 바람둥이 혁명가였다가
물리학자였다가 정치가였다가
당신이었다가
퐁네프의 연인들이 달리는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하면 신촌이나 부산 어디쯤 호텔이었다가
파리젠느 감자를 곁들인 스테이크였다가
볏은 다리를 감춰주던 침대시트였다가
영등포동에 있는 웨딩타운이었다가
당신 사는 상계동이나 대전의 아파트였다가
엔티크한 삼인용 소파였다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 보낸 사랑이었다가
미라보, 미라보, 미라보
하면 세면대에서 놓쳐버린 은반지였다가
간곡히 비어 있는 꽃병 속 그늘이었다
꼭꼭 숨어사는 누군가의 ID였다가
마른하늘에 살풋 걸리는 무지개였다가
문득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미라보, 미라보는 얼마나 격렬한가
이 얼마나 멸렬한가

 

 

월간『현대시』2003년 6월호 밢표

 

 

자작나무 내 인생 /정끝별
                             


속 싶은 기침을 오래하더니
무엇이 터졌을까
명치끝에 누르스름한 멍이 배어 나왔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 나오는 걸까
잎과 꽃 세상 모든 색들 다 버리고
해 달 별 세상 모든 빛들 제 속에 묻어놓고
뼈만 솟은 저 서릿몸
신경줄까지 드러낸 저 헝큰 마음
언 땅에 비껴 깔리는 그림자 소슬히 세워가며
제 멍을 완성해 가는 겨울 자작나무

숯덩이가 된 폐가(肺家) 하나 품고 있다
까치 한 마리 오래오래 맴돌고 있다

 

동백 한 그루 /정끝별

                                   

포크레인도 차마 무너뜨리지 못한
폐허(肺虛)에 동백 한 그루
화단 모퉁이에 서른의 아버지가
우리들 탯줄을 거름 삼아 심으셨던
저 동백 한 그루 아니었으면 지나칠 뻔했지 옛집
영산포 남교동 향미네 쌀집 뒤 먹기와 위로
높이 솟았던 굴뚝 벽돌뿌리와 나란히,
빗물이며 미꾸라지 가두어둔 물항아리 묻혀 있었지
어린 오빠들과 동백 한 그루 곁에서
해당화 밥태기꽃 함박꽃 알록달록 물들다
담을 넘던 이마에 흉터가 포도넝쿨처럼 뻗기도 했지
동백 한 그루 너머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버지 밥상 내던지셨지 그릇들 깨졌지 아버지 서재 오래 비어 있었지
영산포 이창동 소방도로 되기 직전
포크레인이 아버지 대들보를 밀어붙이고
콜타르와 시멘트가 깨진 아버지를 봉인해버렸어도
탯줄 끝에 손톱만한 열매를 붙잡고
봄볕에 자글자글 속 끓고 있었지 저 동백 한 그루
오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가까스로 서 있었지
나 쉬하던 뿌리 쪽으로 고개를 수구(首邱)린 채

 

 

 

『작가세계』2003년 겨울호 발표

 

 

개미와 앨범 /정끝별
                                 


책장 꼭대기에 쌓여가는 앨범들
주저앉을 것만 같아
바닥에 내려놓으려는데
아이 앨범에서 시커먼 덩어리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진다
파르르 바닥에 흩어지는 수천의 개미떼
앨범을 보던 아이가
먹던 비스켓과 함께 닫아두었나 보다
먹이를 찾아 몰려든 개미떼들
식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비스켓을 쏠고
앨범을 쏠고
환한 웃음을 쏠며
아이 얼굴에 주름집을 짓고 있었나 보다
에프킬러를 뿌린다

꿈틀거리는 개미 일가들아
비스켓만 먹고 가지,
휘발하는 검은 시간 벌레들아
추억만은 놓고 가지,

 

 

옹관(甕棺) 1 /정 끝 별




모든 길은 항아리를 추억한다
해묵은 항아리에 세상 한 짐 풀면
해가 뜨고 별 흐르고 비가 내리는 동안
흙이 되고 길이 되고
얼마간 뜨거운 꽃잎
또 하루처럼 열리고 잠겨
문득 매듭처럼 덫이 될 때
한 몸 딱 들어맞게 숨겨줄
그 항아리가 내 어미였다면,
길은 다시 구부러져 내 몸으로 들어오리라
둥근 길
길의 입에 숨을 불어넣고
내가 길의 어미가 될 것이니,
내 안에 길이 있다
내가 가득찬 항아리다

 

지나가고 지나가는 2 /정 끝 별 


  미끌하며 내 다섯 살 키를 삼켰던 빨래 툼벙의 틱, 톡, 텍, 톡, 방망이 소리가 오늘 아침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와 수챗구멍으로 지나간다 그 소리에 세수를 하고 쌀을 씻고 국을 끓여 먹은 후 틱, 톡, 텍, 톡, 쌀집과 보신원과 여관과 산부인과를 지나 르망과 아반테와 앰뷸런스와 견인차를 지나 화장터 길과 무악재와 서대문 로터리를 지나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지나간다 꾹 다문 입술 밖에서 서성이던 네 입술의 뭉클함도 삼일 밤 삼일 낮을 자지도 먹지도 못하던 배반의 고통도 끝장내고 말거야 내뱉던 악살의 순간도 지나간다 너의 첫 태동처럼 틱, 톡, 텍, 톡, 내 심장 한가운데를 지나 목덜미를 지나 손끝을 지나간다 지나가니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웃고 울고 입을 맞추고 쌀을 사고 종이와 볼펜을 사고 모자를 사고 집을 산다 한밤중이면 더욱 크게 들려오는 틱, 톡, 텍, 톡, 소리를 잊기 위해 잠을 자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틱, 톡, 텍, 톡, 날카로운 구두 뒤축으로 나를 밟고 지나가는 그 소리보다 더 크게 틱, 톡, 텍, 톡, 기침을 하고 틱, 톡, 텍, 톡, 노래를 하고 틱, 톡, 텍, 톡, 싸운다 틱, 톡, 텍, 톡, 소리가 들리는 한 틱, 톡, 텍, 톡, 나는, 지나가는 것이고 틱, 톡, 텍, 톡, 살아 있는 것이다 틱, 톡, 텍, 톡, 틱, 톡, 텍, 톡, 틱, 톡, 텍, 톡……

 

 

 

 

첫눈 / 정끝별


날선 삿대질을 되로 주고 말로 받던 그날밤의 창가에
느닷없는 점령군처럼 함박눈이 내렸것다
서로의 눈이 부딪치고 쨍그랑 겨누던 무기를 놓쳤던가
그랬던가 어둡던 창밖이 우연의 남발처럼 환해지는
저건 대체 누구의 과장된 헛기침이란 말인가
그러자 핸드폰을 귀에 댄 남자가 검은 허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우산을 옆으로 든 여자가 흔들리는 네온싸인에 사뿐사뿐 제 얼굴을 비춰보고
오토바이를 세운 폭주족 크라운 베이커리 앞에 서서 환한 라이터를 지피고
달리던 자동차가 멈칫 쌓인 눈을 쓸어내리고는 천천히 미끄러져 가고
그렇게 무섭게 굴러가던 것들이 일제히 제 둥근 모서리를 쓰다듬고 있었더란 말인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내려앉으며
누군가의 어깨가 누군가의 어깨에 쌓이며
생애 첫눈을 뜬 장님처럼 서로의 눈을 맞추고 말았더란 말인가
염치를 잊고 손을 내밀고 말았더란 말인가, 용서라는
보고 또 보고도 물리지 않는
아 저건 누구의 신파였고
누구의 한물간 낭만적 연출이었던가
그리하여 창밖에 펼쳐진 단막의 해피엔딩이 끝날 즈음
뜨겁게 내리는 저 첫눈에게
그리고 또다시 속아넘어가버리고 말았더란 말인가

 

 

 

 

소금호수 /정끝별

 

 

거꾸로 뿌리를 쳐든 바오밥나무가 웃는다

 

칼라하리사막 언저리의

거대한 보츠와나 소금호수는

일 년 중 열 달이 건기여서

바람이 모래를 쓸어올려 세운

끝없는 신기루들이 아른아른 웃는다

 

보아구렁이가 인간을 삼키면서 웃는다

 

소금호수를 향해 가는 길에는

맨발자국이 바다거북처럼 파여 있곤 한다

온통 소금밭이 씨앗처럼 빨아들였을까

수천 년 전의 바다를 기억하는

바닥이 젖지 않는

온 생의 물기를

소금호수를 나오는 맨발자국이 쭈글쭈글 웃는다

 

기억해보면

반짝이는 소금껍질을 우두둑

우두둑 부수며 달려온 것도 같다

맨발이었다

 

벗어놓은 신발이 웃는다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슴도치의 마을 / 최승호  (0) 2008.11.12
벚나무 아래서 / 장만호  (0) 2008.11.12
우리 살던 옛집 지붕 / 이문재  (0) 2008.11.12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 윤성택  (0) 2008.11.12
편지 / 이성복  (0) 2008.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