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 윤성택

문근영 2008. 11. 12. 12:27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들고 있던 화분이 떨어지고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억을 엎지르는 동안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내 안 실뿌리처럼

추억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흙을 모아 채워 넣고

손으로 꾹꾹 눌러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꽃잎은 말없이 흔들렸습니다

앞으로는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위태하게 볕 좋은 옥상으로

봄을 옮기지 않겠노라고

원래 있었던 자리가 그대가 있었던 자리였노라

물을 뿌리며 꽃잎을 닦아 내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탈수 오 분간                                           
 

세탁기가 아귀 맞지 않은 구석으로

가늘게 떨며 부딪쳐 왔다

자폐증 환자처럼 벽에 머리를 찧는 것은

내 안 엉킨 것들이 한없이 원심력을 얻기 때문,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편지는 보풀이 되어

온 빨래에 들러붙었을 것이다 번진 마스카라,

흐느끼는 그녀를 안고 있을 때도 그랬다

어깨며 등 떨리는 오 분간, 상처는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인지

세탁기는 중심에서 울음을 비워내고서야

멈췄다, 멈출 수가 있었다

티셔츠 끝에 바지가, 남방이 엉켜 나왔다

탁탁탁! 풀어내며 언젠가 가졌던 집착도

이 빨래와 같았을까

건조대에 빨래를 가지런히 널다가

조금씩 헤져 가거나 바래가는 게

너이거나 나이거나 세상 오 분간이라는 것

햇살 아래 서서 나는, 한참동안

젖어 있는 것을 생각했다

 

 

 

스트로                                                     

 

오렌지 주스에 발대를 꽂네. 소용돌이가 일며 주스가 올라오고 북상한 비구름 한가운데 장대비가 꽂히네. 성급한 맨홀이 벌컥벌컥 빗물을 마실 때 저녁을 들이마신 가로등도 힘껏 붉어지네. 끝이 뾰쪽한 빨대로 유리잔 바닥을 더듬네. 모든 결핍은 밑바닥에서 소리나는 법이라고, 튀어 오른 빗방울 왕관처럼 소리를 거느리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비는 지상을 향해 빨대를 꽂는 것이네. 빗줄기 꽂히면 꽂힐수록 지상의 것들이 구름을 삼키는 것이네. 기울인 유리잔 바닥에서 빗소리 자꾸만 들려, 나 사레 들 듯 운 적이 있었네. 누군가 내 안바닥까지 헤집은 것 같은 하루 종일, 빨대를 물 듯 비가 내리네.

 

 

 

 

담장과 나무의 관계                                     

 

담장 틈에서 나뭇가지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아주 천천히 금이 자라도 좋았다 

바람조차 알 수 없는 금의 방향은 

담장의 천형이었다 견딘다는 것은 

상처를 제 안에 새기는 것이다

담장 곳곳 나무의 실뿌리가 번졌다  

그 틈으로 수액처럼 물이 올랐고

바람 불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나무는 말라가고 있었다

날이 풀리자 담장은 기어이

금 밖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무가 활짝 몸을 열었다

검은 금들이 가지로 뻗어 올랐다

 

 

 

 

너를 기억하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종료된 과거에

전구하나 켜 놓고

그 밝아오는 영역만큼

시간의 내력을 읽는 것

가느다란 필라멘트가

끊어지지 않았다면

기억이 환해질 때까지

마음을 보내보는 것이다

 

 

 

 

외출                                                        

 

햇볕이 유리창에 착 붙어

온기가 전해지는 아침, 

노인은 무릎에 파스를 붙이며

외출을 준비하고 있다  

고무줄로 묶인 파스다발이

약상자에서 솔솔 냄새를 낸다

우표 한 장의 힘으로 

편지가 배달되듯 

파스 한 장의 힘으로

가뿐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세월의 내력이 적혀진 몸에

겉봉 같은 외투를 걸치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어쩌면 

아름다운 그녀를 위해

그리움을 봉하고 제 몸에 

우표를 붙였는지 모른다

중절모 쓰고 지팡이 짚고

대일파스 후끈후끈하게 

붙은 봄날, 환한 골목에서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다

사진/송화가루님의 블러그에서

 

밤기차                                                   

 

나,

밤기차를 탔었다

검은 산을 하나씩 돌려 세워 보낼 때마다

덜컹거리는 기차는

사선으로 몸을 틀었다

별빛은 조금씩

하늘을 나눠가졌다

종착역으로 향하는 기차는 인생을 닮았다

하루하루 세상에 침목을 대고

나 태어나자마자 이 길을 따라 왔다

빠르게 흐르는 어둠 너머

가로등 속 누군가의 고단한 길이 들어 있었다

간이역처럼 나를 스쳐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차창 밖은 세상의 가장 바깥이었다

함부로 내려설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

기차표를 들여다보았다

가는 곳이 낯설어 지고 있었다

 

 

 

 

주유소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 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두 우회로에 있다

 

 

 

 

너에게 가는 길                                         

 

노을이 약봉지처럼 터지고 있었다

몸살을 앓아내는 것인지

갈대들은 야윈 채로 서성거렸다

사는 게 늘 초행길이어서

능선이 선명할수록 그 아래는

덧칠할 수 없는 생의 여백이었다

저녁 해가 안간힘으로 길을 끌어다

잇대어도 부재중인 것들,

하늘 어딘가 별빛처럼 문자메시지가 떴을까

가야할 길을 아는 저녁놀을 볼 때마다

단 한 번 선택으로 엇갈렸던

길들이 궁금해졌다 기어이

이 길을 걸어 너에게 가자고

한 번 믿어보자고 걷는 한때,

산이 지나온 아픈 길을 당기며

천천히 돌아눕고 있었다

 

 

 

 

수배전단을 보고                                              

 

귀갓길에 현상수배 벽보를 보았다

얼마나 많은 곳에 그의 자유를 알려야 하는지

붉은 글씨로 잘못 든 생의 내력이 적혀 있다

어쩌다 저리 유명해진 삶을

지켜 봐달라는 것일까

어떤 부릅뜬 눈은

생경한 이곳의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이름 석자로 수배중이다

납부 마감일로 독촉되는 고지서로

열자리 숫자로 배포된 전화번호로

포위망을 좁혀오는지도 모른다

 

칸 속의 얼굴은 하나 둘 붉은 동그라미로

검거되어 가는데, 나를 수배한 것들은

어디서 잠복중일까

 

무덤으로 연행되는 남은 날들,

그 어딘가

잡히지 않는 희망을

일망타진할 때까지

나는 매일 은신처로 귀가하는 것이다

 

 

흔적                                                      

 

두 다리가 없는 사내는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엎드려 있다 

그가 밀고 가는 삶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동전들 굴욕의 또 다른 얼굴처럼

바구니에 들어 있다

손이라도 밟힐 때면 

올려다보는 그의 아랫눈동자가 희번덕거린다 

무리의 행인이 건널목을 건너자

그는 마스크를 내리고 

누런 가래침을 뱉는다

그때마다 핏줄 같은 전선을 따라

고무 속에서 흔적 없는 다리가 꿈틀거린다
 
지친 배를 시멘트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은 

세상을 품고 산다는 것일까 

언젠가는 그의 꿈이 부화되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밤마다

고무 속에서 완성 되가는

희고 단단한 다리로 生의 건널목을

건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한낮 노래를 읊조리며

가장 낮은 세상을 굽어보는 건지도 모른다
 
그가 느릿느릿 자리를 옮길 때

쓸리는 바닥, 닳은 고무 틈새로 

햇빛이 꺾여 들어가고 있다.
 

 

 

청춘은 간다                                              

 

내 청춘은 가스통처럼 옮겨다녔다

비바람이 헬맷을 거세게 흘러갈 때

달리지 않는 것들은 미끄러운 시선 밖으로

줄기차게 밀려난다

색색을 늘어뜨린 네온간판들

번번이 골목골목으로 사라진다

길은 인연같이 뻗어와

막다른 곳으로 쓸쓸히 흩어지는 것을

가스통을 짊어진 좁은 골목길에서 보았다

헤드라이트가 빠르게 난간을 더듬자

빗줄기가 뇌관처럼 즐비하다

턱을 바싹 당긴 채

굉음으로 앞바퀴 들어 달리다보면

나를 앞서간 사랑까지 가닿을 수 있을까

흘깃, 덜컹거리는 가스통을 돌아본다

매여 있는 것은 늘 괴롭다

가끔씩 물보라로 튀어 오르는 잔돌멩이들

길의 방점처럼 귀퉁이에 찍힌다

일순 번개가 치울린다 몸을,

납작 엎드린다 발기된 엔진이 뜨겁다

生 위에 길들여진 길이 끝날지라도

점화되지 못한 청춘을 싣고

나는야 폭탄처럼 달린다

 

 

 

쓸쓸한 연애                                            

백사장 입구 철 지난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얽매여 군데군데 찢겨진 채였다

기어이 그녀는 바다에 와서 울었다

버려진 슬리퍼 한 짝과 라면봉지,

둥근 병 조각조차 추억의 이정표였을까

해질 녘 바위에 앉아 캔맥주 마개를 뜯을 때

들리는 파도소리, 벌겋게 취한 것은

서쪽으로 난 모든 창들이어서

그 인력권 안으로 포말이 일었다

유효기간 지난 플래카드처럼

매여 있는 것이 얼마나 치욕이냐고,

상처의 끈을 풀어준다면 금방이라도

막다른 곳으로 사라질 것 같은 그녀

왜 한줌 알약 같은 조가비를 모아

민박집 창문에 놓았을까, 창 모서리까지

밀물 드는 방에서 우리는 알몸을 기댔다

낡은 홑이불의 꽃들이 저녁내

파도 위를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그녀가 잠든 사이, 밖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바람이 불었다

꺼질 듯한 모닥불에 마지막으로

찢겨진 플래카드를 던져 넣었다

 

사진/음양의 진리님 블러그에서

 

 

꽃이 피다                                                         

 1 

공사장 모퉁이 플라타너스가 표지판으로 아랫몸을 가리고 서 있다.  인부는

어디로 갔는지 퍼런 철근들이 저희끼리 묶여 있다. 간간이 잡초들만 바람을

불러모아 수근거릴 뿐, 계절을 문신한 잎새 하나  후미진 골목에서 뛰어오

다 멈춰 선다. 늙은 전신주가 제 힘줄로 끌어 모은 낮은 집들 너머,  잠시 정

전이 되는 하늘에는 길을 서두르는 먹구름이 송신탑에 걸려 있다. 

 2 

전기 스토브가 덜 마른 속옷에게 낯빛을 붉힌다. 형광등이 한낮을 키우

며  시들지 않는 것들을 읽어낸다.  두통에 시달리다보면  꽉 잠가지지 않는

수돗물이 웅크려 떨어지고, 거리를 배회하던 빗소리 굵어진다. 몇 알의 감

기약 삼키자 빗물이 휘청휘청 진눈깨비로 주저앉는다.  미술학원 창가,  젖

은 스케치북 밑그림 밖으로 봄꽃들이 번져 나온다. 

스위치를 내리면 발끝까지 환하게 불이 들어올 것만 같아, 유폐된 이 공

간,  숲으로 가득 차 나뭇잎마다  뚝뚝 빛을 튕겨낼 것만 같아,  온몸에 열꽃

만발한 밤, 창가 성에를 지우며 산수유나무 붉은 알전구 반짝이고.  

 

 

 

 

희망이라 싶은                                                  

 

베란다 버려진 화분에서 가늘게 뻗어 오르는 

잡풀들이 싱그럽다 

누군가 씨를 뿌린 것도 아닌데 

햇살에 기대어 제 목숨으로 살아내는 것을 보면 

문득 나는 사람이 그리워진다 

놓여진 술병에라도 둘러앉아 

스스럼없이 생각들을 펼치고 

서로서로 나누고 마시며 

우습거나 슬프거나 이미 떠나간 일이거나 

엄지와 검지로 들어올리는 술잔의 

그 더워진 마음을 보고 싶다 

병뚜껑을 돌려 따면서 차가운 술이 어떻게

뜨거움으로 마음 덥혀 오는지 

바람이 부는 길로 

풀씨들이 날아온 길로 

점점이 피어나는 생각들 

무심코 화분을 들여다보았을 때도 

내 마음 다그치며 

보여준게로구나 

바람 속에서 마음 풀씨하나 품고 

살아갈 긴긴 세상을 위하여

 

 

 

 

산동네의 밤                                            

춥다, 웅크린 채 서로를 맞대고 있는 

집들이 작은 창으로 불씨를 품고 있었다 

가로등은 언덕배기부터 뚜벅뚜벅 걸어와 

골목의 담장을 세워주고 지나갔다

가까이 실뿌리처럼 금이 간

담벼락 위엔 아직 걷지 않은 빨래가

바람을 차고 오르내렸다

나는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을 나와

이정표로 서 있는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샀다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몇 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점점이 피어난 저 창의 작은 불빛들 

불러모아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따스하게 안겨오는 환한 불빛 아래

나는 수수꽃처럼 서서 웃었다 

창밖을 보면 보일러의 연기 따라 별들이 

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마다 내려와 

불씨 하나씩 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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