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맨발 / 송수권
- 갑골문 甲骨文
뜨거운 모래밭 구멍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산문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날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여승/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뒤돌아 뛰어 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 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 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여자 / 송수권
이런 여자라면 딱 한번만이라도 살았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하나 없는 계산도 할 줄 모르는 여자
허나, 세상을 보고 세상을 보태는 마음은
누구보다 넉넉한 여자
어디선가 숨어 내 시집 속의 책갈피를 모조리 베끼고
찔레꽃 천지인 봄 숲과 미치도록 단풍 드는
가을과 내 시를 좋아한다고
내가 모르는 세상 밖에서 떠들고 다니는 여자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자기 시집 하나 보내지 못한 여자
어느 날 이 세상 큰 슬픔이 찾아와 내가 필요하다면
대책없이 떠날 여자, 여자라고 말하며
'여자'란 작품 속에만 숨어 있는 여자
이르크르츠쿠와 타슈켄트를 그리워하는
정말, 그 거리 모퉁이를 걸어가며 햄버거를 씹는
전신주에 걸린 봄 구름을 멍청히 쳐다보고 서 있는
이런 여자라면 딱 한 번만 살았으면 좋겠다
팔십리 해안 절벽 진달래가
산벼랑마다 드러눕는 봄날 오후에
사진/들꽃을 닮은 사람아 블러그에서
봄비는 즐겁다 / 송수권
며칠째 봄비가 지난다.
한 떼씩 마치 진군의 나팔 소리 같다.
샤넬 향수병을 따놓은 병마개 같다.
촉촉히 마음에 젖어 드는 얼굴,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가 있었다.
물구나무 서서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건네보던 친구가 있었다.
젖지도 못하고 마른 종이처럼 구겨졌으면 어쩌나.
큰 길로 나서니 빨강 분홍 초록 파랑 우산 속에
소녀들의 밝은 표정이 갇혀 있다.
한 떼의 봄비처럼 조잘거리며 내를 건너 숲을 건너
밀림 속으로 사라져간다. 저 가벼운 종아리들,
문득 발을 막고 제재소가 나무 켜는 톱질소리가 들려온다.
향긋하다. 눈을 감는다.
거대한 삼나무 숲 속살들이 톱밥으로 무너져내린다.
자꼬만 밀림 속에서 휘파람새, 휘파람새가 운다.
생각이 발통이 되어 축축한 통나무들을 몰고 간다.
나무 찍는 우리 나라 강릉 크낙새의 빨간 주둥이가 보인다.
뚝방길 위 버드나무에 하얀 젖니를 뱉고 가는 봄비는 즐겁다.
아, 들길에 서서 나는 명아주 싹이라도 세어볼 건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 떼의 봄비, 뒷발꿈치가 다 젖는다.
오늘은 강가에 나가 남풍에 실려 종종걸음 치는 한 떼의 봄비.
조용한 전별식을 갖고 싶다.
하얀 갈매기/ 송수권
목섬이 있고 누님의 바다가 있는 三千浦
살아서는 삼천포가 고향이라서 곧잘 삼천포로만
빳던 하얀 갈매기.
파란 바다 물결에 어려 노래하면서도
한 번도 물결 치는 삶을 살지 못한 하얀 갈매기.
한 번은 면목없이 면목동 하늘을 날다가
한 번은 고향 가까운 목섬 같은 변두리목동 하늘을 날다가
오늘은 공주다운 삶을 찾아
정말 공주로 이사가나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집을 옮겨야 하는 거지.
집들이 한다는 부름 소리 듣고도
나는 서해 뻘밭 진수렁 진펄을 밟으며
몇 번이나 끊기는 다큐멘터리 필름 속에서
생을 헛딛고 김 피디의 레이 고우 속에 몰래 울음을 삼킨다
무심코 눈 들어 수평선을 바라본다
순결한 믿음 하나가 억겁 회귀
벌써 이 세상에 와서 하얀 갈매기로 난다
우리 목섬이 있는 삼천포로 가서 살지 않을래
물 고랑 흔들며 자꾸만 끼룩인다
연엽에게 / 송수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고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을 몸에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 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가치마늘 같던 발아!
蓮 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 삭은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매며 운다
그 蓮 잎새 속에서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들불/ 송수권
먼 지평(地平)에 들불이 떴다.
빠른 속도로 벌판을 가로 질러 타들어 오고 있었다.
국도(國道)를 가로 질러가는 교차로(交叉路)
길을 막은 차단기(遮斷機) 앞에서
우리는 숨 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덜커덕거리며 지나가는 들불
불 켜진 창(窓)마다
툭툭 걸려 넘어진 수급(首級)들
코도 눈도 없는 해골들의 까무라치는 소리
참혹한 죽음을 태우며 다시 벌 끝을 타들어 가는 들불
그 입구 쪽에서 밤까마귀 한 마리 까옥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뒤돌아보았다.
기적(汽笛) 한 끝이 잘려 나간 밤국도(國道)에
어지러운 혼(魂)이 불티 날 듯 하고 있었다
나팔꽃 /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하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鐘(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사진/고태공님 블러그에서(밀잠자리)
밀잠자리/ 송수권
어찌나 이쁘든지요
이른 아침 논둑길을 걷다가 볏잎 뒤에 붙은
푸시시 막 잠깨는 밀잠자리 한 마리
어느 날 내 영혼도 저렇게 가벼울 수만 있다면
젖은 이슬 털어 말릴 수만 있다면…
어찌나 이쁘든지요
그 견인의 시간 다 지나고 신생의 아침
투명한 햇살에 날아오르는 아른아른한 빈 날개
저 알 수 없는 하늘 뒤로 사라지는…
조팝나무 가지 위의 흰 꽃들 / 송수권
온몸에 자잘한 흰 꽃을 달기로는
사오 월 우리 들에 핀 욕심 많은
조팝나무 가지의 꽃들만 한 것이 있을라고
조팝나무 가지 꽃들 속에 귀를 모아본다
조팝나무 가지 꽃들 속에는 네다섯 살짜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자치기를 하는지 사방차기를 하는지
온통 즐거움의 소리들이다
그것도 볼따구니에 정신 없이 밥풀을 쥐어발라서
머리에 송송 도장버짐이 찍힌 놈들이다
코를 훌쩍이는 녀석들도 있다
금방 지붕 위의 까치에게 헌 이빨을 내어주고 왔는지
앞니 빠진 밥투정이도 보인다
조팝나무 가지 꽃들 속엔 봄날 이런 아이들 웃음소리가
한종일 떠날 줄 모른다
혀 밑에 감춘 사과씨/ 송수권
가을이 오면 호주머니에 그 해의 첫 사과 한 알을
넣고 다닌 적이 있었다
색과 향과 감촉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때
불두덩에 털이 나기 시작했고, 달거리 한
그 소녀의 비밀스런 미소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때
사과 한 알을 끝내 깨물지 못하고 손바닥에 굴리며
혼자서 썩히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과밭을 하나 가지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사과향은커녕 내 몸에선 쉰내가 난다고
아내는 잠자리에서 투덜거린다
오늘 좌판대를 지나오며 햇사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오면서,
저 햇빛과 바람과 이름모를 벌레 소리가 그 치렁한
강물소리가 내 몸 안에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늘을 친 사과밭은커녕 아직 한 그루의 사과나무도 심지 못했다
햇사과를 먹으며 얼굴 붉히며, 사과씨를 뱉으며
혀 밑에 감춘 오래된 사과씨는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정 / 송수권
아이들이 크는 동안은 다 이렇듯 귀여운 것인가
꽃밭 하나를 차지하고 꽃을 가꾸는 아이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이 피워낸 꽃이 비록 작은
분꽃이나 나팔꽃일지라도
내 딸아이도 꽃밭 하나를 가지고 있다
무엇이 마음에 차지 않을 때에는
일부러 개 울음소리를 흉내 낸다
아빠가 성난 얼굴을 하면
월, 월, 월, 혀를 내둘러놓고는
냅다 뛴다
냅다 뛴 자리, 가만히 쫓아가 발을 딛고 서보면
그 애의 꽃밭에서 흘러온 듯한 나팔꽃 분꽃 내음새가
온통 개 오줌으로 엎질러져서 가슴을 적신다
오늘 아침은 그 애 먼저 꽃밭에 나가 물을 주었다
바지랑대를 타고 오른 나팔꽃 몇 송이가 푸르디푸른
종소리를 내고
분꽃 속에서 까맣게 토라져 나온 꽃술이
월, 월, 월, 개 울음소리를 내었다
까닭도 없이 슬픔이 향기로 남아서.
난蘭
난을 보고 사는 마음은
섣달 하늘의 쇠기러기 울음소리 같은 것이다
푸른 잎 사이 창창한 꽃대의 뻗쳐오름은
황산벌에 뜨는 계백의 창날인가
어린 관창이 보듯 난은 혀끝을 차며 나를 본다
얼마나 가야 나는 이 세상 용서하는 법을 배울까
아침마다 난은 제 그늘로 꽃대를 휘며
이 세상 너무 늙고 오래되었다 네 갈 길을 가라
스스로를 가르친다
휘어져라 휘어져라 곧은 잎새뿐 아니라
저무는 수락산도 그 잔등에 솔숲을 깔아
비탈길 내는 법을 안다고 타이른다
그 비탈길 위에 고깔 쓴 여승도 올려놓고
언뜻언뜻 장삼 자락도 얼비쳐내면서
그렇지 않느냐 우리 사는 법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난을 보고 사는 마음은
섣달 갈밭 사이 길을 가는 쇠기러기 울음소리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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