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 손택수

문근영 2008. 11. 12. 11:58

 

 

 

언덕위의 붉은 벽돌집                                
- 1998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연탄이 떨어진 방, 원고지 붉은 빈칸 속에 긴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들 듯 이불 돌돌 아랫도리에 손을 데우며, 창문 너머 금 간 하늘 아

래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 전학 온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보, 고, 싶, 다, 보, 고, 싶, 다 눈이 내리던 날들  
 

 벽돌 붉은 벽에 등을 기대고 싶었다 불의 뿌리에 닿고 싶은 하루하루 햇빛

이 묻어 놓고 간 온기라도 여직 남아 있다는 듯 눈사람이 되어, 눈사람이 되

어 만질 수 있는 희망이란 벽돌 속에 꿈을 수혈하는 일
 

 만져도 녹지 않는, 꺼지지 않는 불을
 

 새벽이 오도록 빈 벽돌 속에 시를 점화하며, 수신자 불명의 편지만 켜켜이

쌓여가던 세월, 그 아이는 떠나고 벽돌집도 이내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가슴

속 노을 한 채 지워지지 않는다 내 구워낸 불들 싸늘히 잠들고 비록 힘없이

깨어지곤 하였지만
 

 눈 내리는 황금빛 둥지 속으로 새 한 마리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다

 

 

 사과의 新房  /  손택수

 

사과가 너무 빨리 익으면
달고 진한 맛이 잘 나지 않는 법이다
조급하게 따가운 볕 그대로 받았다간
겉과 속이 따로 놀기 십상
그러니 사내나 볕이나 적당히
퉁겨낼 줄 알아야 한다
사과 껍질 위에 껍질을 한 꺼풀 더 얹었으니
벗겨야 될 옷을 한 겹 더 껴입은 거 아니냐
이러면 볕이야 마구 감질이 나겠지만
창호문이 걸러낸 볕처럼
직수굿해진 볕이라야만
사과 볼빛 만큼 달콤한 맛을
쟁일 수 있는 것이다

 

챙 모자 쓴 아낙들이
종이 봉투로 한참 사과알을 싸고 있다
신방에 창호문 새로 바르고,
머지 않아 분단장할 딸년들
연애 훈수라도 하듯이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토하 / 손택수

 

통통하게 살찐 냉동 토하土蝦를 손에 쥐자

새우가 톡, 튀어오른다

죽은 줄만 알았더니

참았던 숨을 파―

하고 터뜨리듯

깨어난 새우

 

마취가 풀리면서 꼬리가 연신 손바닥을 쳐댄다

으쯔쯔쯔 뭉쳤던 피가 기지개를 켜면서

굳은살 박인 내 손바닥이 무슨

연못이라도 된다는 듯

냇물이라도 된다는 듯

 

토하, 얼얼해진 손바닥 위로

근지러운 흙냄새를 토해낸다

 

 

어부림                                                  
 

딴은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는 날

물고기들이라고 뭍으로

꽃놀이 오지 말란 법 없겠지

남해는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에 드리우고

그물을 끌어당기듯,

바다로 휜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내린다

木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낚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꿰어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철썩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든다.

 

 

목련 전차 / 손택수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 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나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
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으련지 모른다
지난밤 내려치던 천둥번개도 쩌릿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동력을 얻진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저 꽃전차를 따라 가면, 어머니 아버지
신혼 첫밤을 보내신 동래 온천이 나온다

 

 

 

외할머니의 숟가락                                   

 

외갓집은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숟가락부터 우선 쥐여주고 본다

집에 사람이 있을 때도 그렇지만

사람이 없을 때도, 집을 찾아온 이는 누구나

밥부터 먼저 먹이고 봐야 한다는 게

고집 센 외할머니의 신조다

외할머니는 그래서 대문을 잠글 때 아직도 숟가락을 쓰는가

자물쇠 대신 숟가락을 꽂고 마실을 가는가

들은 바는 없지만, 그 지엄하신 신조대로라면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집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 그릇의 따순 공기밥이어야 한다

그것도 꾹꾹 눌러 퍼담은 고봉밥이어야 한다

빈털터리가 되어 십년 만에 찾은 외갓집

상보처럼 덮여 있는 양철대문 앞에 서니

시장기부터 먼저 몰려온다 나도

먼길 오시느라 얼마나 출출하겠는가

마실간 주인 대신 집이 

쥐여주는 숟가락을 들고 문을 딴다

 

 

방어진 해녀   - 손택수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멍기 있나, 멍기-)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래진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고
찾아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마터면 정신나간 여잔가 했더니
파도소리 그저 심드렁
갈매기 울음도 다만 무덤덤
그 사투리 저 혼자 자맥질하다 잠잠해진 바다
속에서 무엇인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하아, 하아- 파도를 끌고
손 흔들며 숨차게 헤엄쳐나오는 해녀,
내 놀란 눈엔 글쎄 물 속에서 방금 나온 그 해녀
실팍한 엉덩이며 볼록한 가슴이 갓 따 올린
멍게로 보이더니
아니 멍기로만 보이더니
한 잔 술에 미친 척 나도 문득 즉석에서
멍기 있나, 멍기- 수평선 너머를 향해
가슴에 멍이 든 이름 하나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다

 

 

홍어                                                      
 

어느날인가는 시큼한 홍어가 들어왔다

마을에 잔치가 있던 날이었다

김희수씨네 마당 한가운데선

김나는 돼지가 설겅설겅 썰어지고

국솥이 자꾸 들썩거렸다

파란 도장이 찍히지 않은 걸로다가

나는 고기가 한점 먹고 싶고

김치 한점 척 걸쳐서 오물거려보고 싶은데

웬일로 어머니 눈엔 시큼한 홍어만 보이는 것이었다

홍어를 먹으면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지느니라

지엄하신 할머니 몰래 삼킨 홍어

불그죽죽한 등을 타고 나는 무자맥질이라도 쳤던지

영산강 끝 바닷물이 밀려와서'흑산도 등대까지 실어다줄 것만 같았다

죄스런 마음에 몇번이고 망설이다, 어머니

채 소화도 시키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말았다는데

나는 문득문득 그 홍어란 놈이 생각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 처음 먹는 음식인데

언젠가 맛본 기억이 나고

무슨 곡절인지 울컥 서러움이 치솟으면

어머니 뱃속에 있던 열달이 생각나곤 하는 것이다.

 

 

제비에게 세를 주다 / 손택수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단칸집이다

시름시름 기울어가던 처마 끝이다


진흙둥지 되바르며

보수공사에 여념이 없는 제비 한쌍

신접살림을 차렸다


부스스 일어나 올려다보면

밤낮으로 깨소금을 떨어뜨린다

 

이 허름한 적산가옥에 세를 들어 온 두 내외

덕분에 가난한 나도

이제는 어엿한 집주인이 된 셈인가

 

관리 한번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방을 빼지나 않을까 전전긍긍

방세 대신 꼬박꼬박 챙겨주는

새울음소리를 염치없이 받아쓰고 있는 나도

이제는 집주인으로서의 그 알량하고 딱한

체면이라는 걸 알게 된 셈인가

 

달빛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와서 하룻밤 묵었다 간 뒤다

 

 


추석달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보이로 어서옵쇼, 손님들 구

두닦이로 밥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

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 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던지, 상

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 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

느껴 울던 추석달

 

 

감자꽃을 따다 / 손택수

 

주말농장 밭고랑에 서있던 동업자

장철문형이 감자꽃을 딴다

철문형, 감자꽃 이쁜데 왜 따우

내 묻는 말에

이놈아 사람이나 감자나

너무 오래 꽃을 피우면

알이 튼실하지 않은 법이여

꽃에 신경쓰느라

감자알이 굵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평소에 사형으로 모시는 형의 말씀을 따라

나도 감자꽃을 딴다

꽃 핀 마음 뚜우 뚝 끊어낸다

꽃시절 한창인 나이에 일찍 어미가 된 내 어머니도

눈 질끈 감고 아까운 꽃 다 꺾어냈으리라

조카애가 생기고 나선 누이도

화장품값 옷값을 말없이 줄여갔으리라

토실토실 잘 익은 딸애를 등에 업고

형이 감자꽃을 딴다

딸이 생기고 나선 그 좋은 담배도 끊고

술도 잘 마시질 않는다는 독종

꽃핀 마음 뚜우 뚝 분지르며

한 소쿠리 알감자 품에 안을 날을 기다린다

 

 

소가죽북                                                 

 

소는 죽어서도 매를 맞는다

살아서 맞던 채찍 대신 북채를 맞는다

살가죽만 남아 북이 된 소의

울음소리, 맞으면 맞을수록 신명을 더한다


노름꾼 아버지의 발길질 아래

피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울던

어머니가 그랬다

병든 사내를 버리지 못하고

버드나무처럼 쥐어뜯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던 울음에도

저런 청승맞은 가락이 실려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질기디질긴 습성대로

죽어서도 여물여물

살가죽에 와닿는 아픔을 되새기며

둥 둥 둥 둥 지친 북채를 끌어당긴다

끌어 당겨 연신 제 몸을 친다

 

 

 

 

가슴에 묻은 김치 국물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 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 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 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 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일이다

 

 

 

감나무의 수사학 / 손택수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 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있자, 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먹는다는 것
도로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 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물새 발자국 따라가다                                

 

모래밭 위에 무수한 화살표들,

앞으로 걸어간 것 같은데
 
끝없이 뒤쪽을 향하여 있다

 

저물어가는 해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드센 바람 속을

뒷걸음질치며 나아가는 힘, 저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펴는가

제 몸의 시윗줄을 끌어당겨

가뜬히 지상으로 떠오르는가

 

따라가던 물새 발자국

끊어진 곳 쯤에서 우둑하니 파도에 잠긴다

 

 

앙큼한 꽃 / 손택수

 

 

이 골목에 부쩍
싸움이 는 건
평상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다

 

평상 위에 지지배배 배를 깔고 누워
숙제를 하던 아이들과
부은 다리를 쉬어가곤 하던 보험 아줌마,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던 할미들이 사라져버린 뒤부터다

평상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동백 화분이 꽃을 피웠다
평상 몰아내고 주차금지 앙큼한 꽃을 피웠다

 

 


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                           

 

가시 끝에 탱글탱글 빗방울이 열렸다

나무는 빗방울 속에 들어가

물장구치며 노는 햇살과 구름,

터질 것처럼 부풀어오른 새울음 소리까지를

고동 속처럼 알뜰히 빼어 먹는다


가시 끝에 맺힌 빗방울들,

가슴 깊이 가시를 물고 떨고 있다


살속을 파고든 비수를 품고

둥그래진다는 것, 그건

욱신거린는 상처를 머금고 사는 일이다

입술을 윽 깨물고 상처 속으로 들어가 한몸이 되는

일이다


열매들은 모두 빗방울을 닮아 둥그래질 것이다

빗방울의 아픔을 궁글려 탱탱한 탱자알이 될 것이다


바람이 불자, 내 어둔 이마 위로

빗방울 하나가 고동껍질처럼 떼구루루 떨어져내렸다

 

 

풀벌레 울음소리 / 손택수

 

 

그 여자는 무릎 부근이 성감대였다

무릎 아래 종아리나

그 위를 쓰다듬어 주면 금세

상기된 얼굴이 되곤 하였다

둘만의 은밀한 시간

거기에 살짝 손끝이라도 대고 간질여주면

진저리를 치며,

내가 깜박 넘어가도 좋을 음악소리를 내곤 하였다

풀벌레들 중 몇몇은 다리로 운다는데

다리 관절 어디에 울음통이 있어

가을밤이 자지러지도록 울어주곤 한다는데

그 여자는 아무래도 풀벌레들의 후예인가보았다

그래, 풀벌레들 가늘디가는 다리를 물려받았나보았다

살면서 어디에 무릎 꿇을 일 그리 많았던지

구두코가 다 벗겨지도록

오르내릴 계단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가끔씩 쥐가 나서 주물러주던 다리

장난스레 쓰다듬으면, 끄집어내던 치마 속에 숨어

곱게 눈을 흘기던 그 슬픈 무르팍 
 

 

연꽃 에밀레                                              

 

연꽃잎 위에 비가 내려 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소금쟁이의 연애  - 손택수

 

 

 

바람 한 점 없는데 못물 위에 파문이 번지는 건
소금쟁이 때문이다 소금쟁이의 순전한 연애 때문이다
가만 보면 암컷인지 수컷인지 바람기 농한 소금쟁이 한 마리가
멀찌감치 떨어진 짝에게 무슨 신호를 보낸다
제 미미한 몸을 상하좌우로 흔들어 고요한 수면을 깨우더니
보일 듯 말 듯한 파문이 스르르 번져가서
좀체로 곁을 두려 하지 않는 짝의 발바닥을 간질인다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푸르르 떠는 건너편의 소금쟁이
가장 미세한 덜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민하게 가늘어진 다리, 파문에 감전된
다리의 떨림도 답신처럼 넌지시, 보기에 따라서는 수줍게
잔잔한 물결을 이루며 연못을 건너간다


소금쟁이 한 쌍의 은근한 수작 때문에
잠시도 잠들지 못하고 술렁이는 연못.


 
집                                                          
 

 알껍질은 뜯어먹는다 방금 나온 애벌레가 껍질을 깨고 나오자마자 놀라운

식욕으로, 그동안 나를 품어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품어주마, 뛰쳐나온

집을 하나도 빠짐없이 오물오물 뜯어먹는다

 

 애벌레의 몸속으로 통째로 들어간 집, 애벌레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곰실곰

실 기어다니다가 더듬이를 쭉 내밀어보고, 양 날개를 활짝 펴보는 집, 알집

속에 수많은 새끼집을 짓고 눈을 감으리라 그렇게 집이 나의 양식이 되고,

나는 집의 처소가 되어 살다 가리라

 

 무얼 잘못 먹었는지 생똥을 싸고 자꾸 헛구역질을 한다 녹화해둔 「환경

스페셜」비디오 테이프도 다 돌아가고 차디찬 꽃무늬 장판바닥에 누워 나

비잠을 청해보는 하루, 어쩐지 벗어논 허물처럼 집이 헐렁하다
 

 

장생포 우체국 / 손택수


지난 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의 사이는 고작 몇 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 소리가

부풀어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드센 파도가 아직도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

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

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

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

가슴을 조릴 사람이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

바다의 획순을 그대로 따라간 편지

수평선을 긋듯 반듯하게 접은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넣고

뭍에 올랐던 파도 소리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뿌- 뱃고동 소리에 깜짝 놀란 갈매기 한 마리

우표 속에서 마악 날개를 펴고 있다

 

 


 
시골버스                                                

 

아직도 어느 외진 산골에선

사람이 내리고 싶은 자리가 곧 정류장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더러는 장바구니를 두고 내린 할머니가

손주놈 같은 기사의 눈치를 살피고

억새숲으로 들어갔다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싱글벙글쑈 김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옆구리를 슬쩍슬쩍 간질러대는 시골버스

멈춘 자리가 곧 휴게소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기다리던 버스가

그냥 지나쳐 간다 하더라도

먼지 폴폴 날리며 투덜투덜 한참을 지나쳤다

다시 후진해 온다 하더라도

정류소 팻말도 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팔을 들어올린 나여, 너무 불평을 하진 말자

가지를 번쩍 들어올린 포플러나무와 내가

어쩌면 버스 기사의 노곤한 눈에는 잠시나마

한 풍경으로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니

 

 

 거미줄/손택수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냐고,

꿈자리까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放心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뒷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뒷문으로 나락드락 불

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모기 선(禪)에 빠지다/손택수


죽비(竹扉)

열대야다 바람 한 점 들어올 창문도 없이 오후 내내 달궈놓은 옥탑방
허리를 잔뜩  구부러트리는 낮은 천장 아래 속옷이  후줄근하게 젖어
졸다 찰싹, 정신을 차린다  축축 늘어져가는 정신에 얼음송곳처럼 따
끔 침을 놓고 간 모기

 

 

불립문자(不立文字)

지난 밤 읽다 만 책장을 펼쳐보니  모기 한 마리  납작하게 눌려 죽어
있다 이 뭣꼬, 후 불어냈지만 책장에 착 달라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체액을 터트려서 활자와 활자  사이에 박혀 있는 모기,  너도
문자에  눈이 멀었더냐 책장이 덮이는 줄도 모르고 용맹정진  문자에
눈 먼 자의 최후를 그렇게 몸소 보여주는 것이냐 책속의 활자들이 이
뭣꼬, 모기 눈을 뜨고 앵앵거린다.

 

향(香)

꼬리부터 머리까지 무엇이 되고 싶으냐  짙푸른 독을 품고 치잉칭 또
아리튼 몸을 토막토막  아침이면 떨어져 누운 모기와 함께  쓰레받기
속에 재가 되어 쓸려나가는 배암의 허물

은산철벽(銀山鐵壁)

찬바람이 불면서 기력이 다했는가 날쌘 몸놀림이 슬로우모션으로 잔
바람 한 줄에도 휘청거린다 싶더니, 조금 성가시다 싶으면 그 울음소

은산철벽(銀山鐵壁)

 

찬바람이 불면서 기력이 다했는가 날쌘 몸놀림이 슬로우모션으로 잔
바람 한 줄에도 휘청거린다 싶더니, 조금 성가시다 싶으면 그 울음소
리 엄지와 집게만을  가지고도 능히  꺼트릴 수 있다 싶더니,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울음소리,  사라진 그쯤에서 잊고 살던 시계 초침 소리
가 들려온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간간
이 앓아 누우신  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도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저
많은 소리들을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다니


화살나무                                               

 

언뜻 내민 촉들은 바깥을 향해

기세 좋게 뻗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제 살을 관통하여, 자신을 명중시키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고 있는 가지들

 

자신의 몸 속에 과녁을 갖고 산다

살아갈수록 중심으로부터 점덤 더

멀어지는 동심원, 나이테를 품고 산다

가장 먼 목표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으니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시윗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산길 위에서


 돌종 / 손택수

 

돌 쪼는 소리 쩡 쩡
여름 한낮 나른한 대기를 흔든다
뭘 만드느냐 물으니
석수장이, 돌종을 만든단다
큰절 부방장 스님 석종 부도를 만든단다
그러고 보니 돌은 반쯤 종신 모양을 하고 있다
저 돌종이  다 완성되면
종은 이제 다시는 울지 못하는
버버리 종이 되겠구나
그래, 버버리 종으로 굳어지기 전에
석수장이 내려치는 정 끝에서
저렇게 얼얼하게 아파 실컷 울고 있는 모양이구나
울음 뚝 그친 돌 속으로 들어가서
어떤 중이 돌종이 될는지
엉덩이 묵직한 돌종으로 깊디깊은 참선에 빠져들는지
돌은 벌써 반쯤 문 딱 걸어잠근
침묵이다 챙 챙
불꽃 튀기는 침묵으로
남은 울음을 마저 쪼아내고 있다

 


버려진 집 속에 거울이 있다                            
 
집을 버리면서, 거울을

두고 오는 건 차마 못할 짓이다

 

버려진 제 모습을 쳐다볼 수 없어

먼지를 풀썩이며 조용히 미쳐가는

집의 거울을 보라

 

집은 제 얼굴에 화장을 하는 대신

거울에 화장을 한다

거울에 파우더 분가루 같은

먼지를 덕지덕지 처발라

망가져가는 제 얼굴을 흐릿하게 뭉개어본다

 

그렇게 남은 날을 견뎌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형벌이다

 

폐가는 금이 가거나, 깨어진

거울조각을 품고 있다

 

 

 

 

낡은 자전거가 있는 바다                            

 

 외갓집 소금창고 구석진 자리에 낡은 자전거 한대가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슬었지만, 수리하면 쓸 만하겠는걸. 아마도 나는 길  닿는

이면 어디든지 쌩쌩 미끄러져 다녔을 은륜의 눈부신 전성기를 생각했는

모른다. 논둑길 밭둑길로 새참을 나르고 포플러 푸른 방둑길 따라 바다

이르던 시절, 그는 아마도 내 이모들의 풋풋한 젊은 날을  빠짐없이 지켜

았으리라. 읍내 영화관 앞에서 빵집 앞에서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

다, 아카시아 향기 어지러운 방둑길로 푸르릉 푸르릉  바큇살마다 파도를

끼고 굴러다니기도 했을, 어쩌면 그는  열아홉 꽃된 처녀아이를 태우고 두

근두근 내 아버지가 될 청년을  만나러 가기도 했으리라. 바다가 보이는 풀

밭에 누워 클레멘타인 클레멘타인, 썰물져가는 하모니카 소리에 하염없이

젖어들기도 하였으리라. 그때 풀밭과 바다는 잘 구분이 되질 않아, 멀리서

보면 그는 마치 바다에 누워 즐겨 꿈에 젖는 행복한 몽상가로  보이지 않았

을까. 첫사랑처럼 한 번 익히고 나면 여간해선 잘 잊혀지질 않는 자전거, 손

잡이 위의 거울 먼지를 닦아본다. 거울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나를 품고 있

었다는 눈치다. 턱없이 높은 앉을깨 위에서 페달이 발에 잘 닿지 않는다고 

툭하면 투정을  부리던 철부지 아이를, 맥빠진 앞바퀴 뒷바퀴 타이어에 바

람 빵빵 밤 늦도록 소금자루 같은 달을  태우고 비틀대던 방둑길을.

 

 

하늘 우물 / 손택수

 

성당 종탑 위에 종을 매다는 건 하늘에 우물이 있기 때문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우물을 파고 우물 속에 띄워 놓는 쇠두레박

 

꼰벤뚜알 꼰벤뚜알 성프란치코 수도회

종지기가 종줄을 당기면

두레박이

수면에 부딪힐 때

찰랑, 하는 소리가 들리지

 

저 높은 곳에 바닥  모를 깊이로 파 내려간  우물이 있었다니

허나 끌어올려도, 끌어올려도

찰랑찰랑 흘러넘치는

물소리만 내는 쇠두레박

 

그 아래 내가 한참을 멈춰 서 있는 건,

내 두 귀가 잠시 목 마른 물지게통이 되기 때문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 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히며

걸을 때마다 챙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 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 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 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 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가는 동안

들려오지 않으면 이제는 왠지 허전해진다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럇

뒷굽을 치며 갈기를 휘갈기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무거운 몸에 리듬을 실어주는 소리

 

 

 

     가시잎은 시들지 않는다 / 손택수

 


 하늘에 매가 없다 솔개 한 마리, 독수리 한 마리 없다 이게 새들을 절망케한다 매서운 부리와 발톱에 쫓길 때 그는 차라리 그 죽을 지경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겨울 아침 새들이 눈 쌓인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와서 운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펼쳐진 저 드넓은 하늘을 두고 결사코, 여린 가슴을 겨누는 가시 밀림을 찾아든다

 

 오늘 빙벽을 찾아 나선 사내들이 추락사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얼음 속의 가시, 살을 쿡쿡 찔러대는 빙벽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팽팽한 밧줄을 타고 아찔한 빙벽 사이를 날아다녔을 새들

 

 시들지 않기 위해 피어나는 잎이 가시가 된다 연하디 연한 이파리로부터 시퍼 렇게 담금질한 무쇠잎이 된다 이파리 투둑 떨어지고 적설량에 와지끈 가지가 꺾어져도 잠들지 마라 잠들지 마라 겨우내 시들지 않고 남아 얼어붙은 땅을 찔러대는 가시

   

 

 

곡비                                                      


 눈이 많이 내린 한겨울이면 새들에게 모이를 줘서 아들 내외에게 자주 잔

소리를 듣던 함평쌀집 할머니


 세상 버리던 날 새들은 오지 않았다 밥 달라고, 밥 달라고,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 양철문을 바지런히 쪼아대던 새들


 등쌀에 이놈의 장사도 집어치워야겠다, 그 아드님 허구헌 날 술만 푸고 있

더니


 쌀집 앞 평상마루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들려준다 장지의 소나무 위에

서 울던 새울음 소리가 어째 영 낯설지만은 않더라고


 울 어매가 주는 마지막 모이를 받으러 왔나 싶어 고수레 고수레 한상 걸게

차려주었더니, 구성진 곡비 소리 해종일 끊이질 않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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