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구두 / 송찬호

문근영 2008. 11. 12. 12:08

구두/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사진/매화양산님 블러그

 

동백 /송찬호

어쩌자고 저 사람들
배를 끌고
산으로 갈까요
홍어는 썩고 썩어
술은 벌써 동이 났는데

짜디짠 소금 가마를 싣고
벌거숭이 갯망둥이를 데리고
어쩌자고 저 사람들
거친 풀과 나무로
길을 엮으며
산으로 산으로 들까요

어느 바닷가,
꽃 이름이 그랬던가요
꽃 보러 가는 길
산경으로 가는 길

사람들
울며 노래하며
산으로 노를 젓지요
홍어는 썩고 썩어
내륙의 봄도 벌써 갔는데

어쩌자고 저 사람들
산경 가자 할까요
길에서 주워
돌탑에 올린 돌 하나
그게 목 부러진 동백이었는데

 

 

 

☆ 2000년 제19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시

 

 

고래의 꿈  / 송찬호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맑은 날이면 아득히 망원경 코끝까지 걸어가

수평선 너머 고래의 항로를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한다 고래는 사라져버렸어

그런 커다란 꿈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는 바다의 목로에 앉아 여전히 고래의 이야기를 한다

해마들이 진주의 계곡을 발견했대

농게 가족이 새 펄집으로 이사를 한다더군

봐, 화분에서 분수가 벌써 이만큼 자랐는걸.....

 

내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내일은 5마력의 동력을

배에 더 얹어야겠다 깨진 파도의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겠다

저 아래 물밑을 쏜살같이 흐르는 어뢰의 아이들 손을 잡고 해협을

달려봐야겠다

 

누구나 그러하듯 내게도 오랜 꿈이 있다

하얗게 물을 뿜어올리는 화분 하나 등에 얹고

어린 고래로 돌아오는 꿈

 

 

 

 

『 창작과 비평』 2006 여름호 발표

 

봄날/송찬호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
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
자기의 엉덩짝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 놓았네
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
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네
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더없이 향기로웠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
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
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뿐이네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
십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
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
돼지 멱따는 소린 들리지 않았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아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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