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북 /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2003년 제3회 노작문학상 수상시]
드라이플라워 / 문인수
마음 옮긴 애인은 빛깔만 남긴다
동백 씹는 남자 - 문인수
한 이레 일찍 온 셈이 되어버렸다. 남해 이 섬엔 아직 동백이 활짝 피지 않았다. 완전 헛걸음했다. 꽃샘바람이 차다. 일행 중 좌장께서 이제 겨우 눈 뜬, 쬐끄맣게 핀 동백 한 송이를 꺾어 들고 다녔다. 들여다보고, 향기 맡고, 어린 속잠지 만한 것에 혀 대보고 하더니 어, 먹었다. 아작아작아작 씹어 꿀꺽, 삼켰다. 나도, 둘러앉은 일행도 낄 낄 낄 웃었다. 그의 안색이 동백 독이 오른 것처럼 잠시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벽의 풀 / 문인수
풀들은 어떻게 시멘트를 삭이는가, 사귀는가
시집 <쉬> 2006년 문학동네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 문인수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 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 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 몸, 온 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 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 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 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피어라 석유!" 에서.
동강에서 울다/ 문인수
대숲 /문인수
시퍼렇게 털 세운 대숲 한 덩어리가 크다. 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사실 전국 어디에나 붙박힌 유적 같은 것이다. 그 들은 왜 마을 뒤, 산 아래에다 대숲 우거지게 했을까 대숲 속은 아직 덜 마른 암흑이 축축하다. 꽉 다문 입, 마음의 그 깜깜한 짐승을 풀어놓았을까. 날 풀어놓고 싶어하 는 비밀이 지금 사방 눈앞에, 귀에 자자하다. 댓잎 자잘한 동작들이 소리들 이 그렇듯 무수한 것인데, 울부짖음이란 본디 제 것이어서 잘디 잘게 씹히거 나 또 한 떼 새까맣게 끓어오르는 것. 아, 新生하는 바람의 몸, 바람의 성대가 하늘 쪽으로 몰리면서 폭포 같다. 무넘이 무넘이 시퍼렇게 넘어가곤 한다.
새떼 / 문인수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논두렁논두렁 휘어지게 달리며 논물에 빠지며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후우여 후여 쫓으면 새떼는 여러 번 날아 오른다 한 삽 퍼 던진 자갈돌들처럼 한꺼번에 새까맣게 요란하게 날아오른다 휘영청 헌 보자기 내려 덮이듯 논빼미 저쪽 끄트머리로 다시 가 내려 앉는다 쥑이뿔고 싶도록 얄밉게 또 내려 앉는다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논두렁논두렁 휘어지게 달리며 땡볕에 악 받히며 종아리 긁히며 깡깡깡깡깡 깡통을 두들기며 후우여 후여 쫓으면 지친다 어느덧 거물거물 해 늘어지고 마지막으로 두어 바퀴 휘이 나락논을 돌아 서천 붉은 구름 속으로 팍팍팍팍팍 꽂히는 새떼 자욱하게 스민
노을의 측백나무 울타리 속으로 씻은 듯이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2006년 문학의전당
굿모닝 / 문인수
나는 어느 날 저녁 퇴근해오는 아내더러 느닷없이 굿모닝! 그랬다. 아내가 웬 무식? 그랬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나는 그 후 매일 저녁 굿모닝,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나는 이제 아침이고 대낮이고 저녁이고 밤중이고 뭐고 수년 째 굿모닝, 그런다. 한 술 더 떠 아내의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여행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도 예외 없이 굿모닝, 그런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수고했다 보고 싶었다 축하한다 해야 할 때도 고저장단을 맞춰 굿모닝, 그런다. 꽃바구니라도 안겨주는 것처럼 굿모닝, 그런다. 그런데 이 거 너무 가벼운가, 아내가 눈 흘기거나 말았거나 나는 굿모닝, 그런다. 그 무슨 화두가 요런 쪽지보다 잔재미보다 더 기쁘냐, 깊으냐. 마음은 통신용 비둘기처럼 잘 날아간다. 나의 애완 개그, ‘굿모닝’도 훈련되고 진화하는 것 같다. 말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민망하고 시끄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 엑기스, 혹은 통폐합이라는 게 참 편리하고 영양가도 높구나 싶다. 종합비타민 같다. 일체형 가전제품처럼 다기능으로 다 통한다. 아내도 요즘 굿모닝, 그런다. 나도 웃으며 웬 무식? 그런다. 내가 겪은 시절은 전부 호미자루처럼, 노루꼬리처럼 짤막짤막했다. 바로 지금, 당신이 내 눈 앞에 있다. 나는 자주 굿모닝! 그런다.
<애지> 2006년 겨울호
지네 / 문인수
- 서정춘 傳
어머니는 그 때 만삭에 가까웠다 아버지와 어떤 사내가 드잡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한사코 말리고 있었는데 그만 누군가의 팔꿈치에 된통 떠받혀 벌러덩 자빠져 버렸다
나는 태중에서부터 늑골 아래가 아파 몹시 울었다. 세상에 툭, 떨어지자 나는 냅다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잠시도 그치지않고 새파랗게, 새파랗게 질리며 울었다 1941년 생, 나는 아직도 피고름 짜듯 가끔, 찔끔, 운다
난 지 삼 칠 일만에 늑막염 수술을 받았다 난 지 두 돌만에 어머니가 죽었다 마부 아버지와 형들은 모두 거구였지만 배냇앓이 때문일까, 젖배를 곯았기 때문일까, "나는 평생 삼 短이다. 체구가 작고 가방끈이 짧고 시인 정 아무개의 말처럼 '극약 같은 짤막한 시'만 쓴다 가난이야 본래대로 바짝 조여 웅크리면 된다 당시엔 당연히 가슴 쪽에 나있던 수술자국이 이 시각, 왼쪽 등 뒤 주걱뼈 저 아래까지 와 있다. 이것은 이미 의학이 잘알고 있는 현상이긴 하지만 생각컨대 이 징그러운 흉터야말로 몸을 두고 공전하는 기억이지 싶다, 궂은 날, 지금도 수천의 잔발로 간질간질간질간질 세밀하게 기면서 씨부럴, 이 썩을 놈의 슬픔이 또, 온다, 간다
푸른 시 (2006년 제8호)
빨래궁전 / 문인수
- 인도소풍
야므나 강변 작은 촌락 한 움막집에, 그 집 빨랫줄 위로 옛날 옛적 사랑 많이 받은 왕비의 화려한 무덤, 타즈마할 궁전이 원경으로 보입니다. 궁의 둥근 지붕이 거대한 비눗방울처럼, 분홍 엷은 나비처럼 아련하게 사뿐 얹혀 있고요 빨래가, 원색의 낡고 초라한 옷가지들이 젖어 축 처진 채 널려 있습니다.
족보에도 없는, 이 무슨 경계일까요. 오색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나 죽음은 그 어떤 역사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이 가볍고 가벼워서 짐이 없는데요. 삶이란 또 몇 벌의 누더기에도 당장 저토록 고단하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그 때, 어린 새댁이 하얗게 웃으며 얼른 움막으로 숨어버렸는데요, 개똥밭에 굴러도 역시 이승에 땡깁니다, 오래 내 마음을 끄는 그녀의 남루한 빨래궁전 쪽, 저 검고 깊은 눈이 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중화리 /문인수
폐가의 배꼽 / 문인수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밝은 구석 / 문인수
민들레는 여하튼 노랗게 웃는다.
창포
- 문인수
창포를 보았다.
파냄새 / 문인수 노점 아주머니가 지금 부지런히 대파를 다듬고 있다 아주머니한테 아직 묻어있는 色이 잠시 입을 가리며 킬킬킬킬 웃으며 오늘도 펑퍼짐한 몸 한 무더기를 털썩 낳아 놓았다. 어둑살 아래, 좌판 위에 쑥 쑥 뽑아놓는 대파, 파는 벗겨져 하얗게 가지런히 깔리고 건반 같다. 그 옛날 어느 시골 초등학교 교실의 풍금 소리가 날 것 같다는 내 생각 따위의 파껍질들은 아무렇게나 희끗희끗 언 길바닥에 나부끼고 들러붙고 밟히고 깨끗한, 毒한 파냄새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저 아주머니 속에는 더 많은 입김이, 긴 화차 같은 인생이 꽉 꽉 채워져 악물려 있을 것이다. 또한 아주머니의 오십대 중반을 시꺼먼 방한복에다 뚤뚤 뭉쳐 눌러 앉혀 놓았으니 낮은, 최종학력의 저 바닥은 사실 이 놈의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는 않겠다
꽉 다문 입, 태풍이 오고 있다 / 문인수
새벽에 들어오는고깃배들을 본다 빈 그물엔 불가사리만 흉흉하게 붙어있다 밤새 건져올린 죽은 별들 저것이 희망이었겠으나 힘껏 탁 탁 털어낸다
마음이 또 꽉 다무는 입, 저 긴 수평선
방파제 굵은 팔뚝이 태풍의 샅을 깊숙이 틀어잡고 있다
꼭지 / 문인수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
젖 / 문 인수
오랜만에 고향엘 다녀왔다. 대구에 가면 이런 거 흔하고 흔합니다 헐하고 헐합니다 하고 말렸으나 어머니는, 나도 많이 늙었다 오래는 더 못 살겠다 하시면서, 무말랭이며 머귀나물 매운 풋고추 같은 걸 자꾸 챙겨 주셨다. 이만큼 전송 나오시다가 또 쫓아들어가 다른 거 한 보퉁이 들고 나오셨다. 무릎 앞에다가 이것들을 끌러놓고 깊이 냄새를 맡는다 어느덧, 여름밤 천지에 가득하고 그윽한 먼 별빛, 긴 바람의 젖을 물고 나는...
두메, 빈 집에 들어서니/ 문인수
수장(樹葬)
중심을 잡다 /문인수
하늘이 잠시도 눈 떼지 못한다.
2박 3일의 섬 / 문인수
2박 3일 일정으로 섬에 들어갔다. 섬은 허퍼 한 번도 섬을 구경하지 않았다.
바다가 바다를 구경하지 않듯이 파도 소리가 파도 소리를 구경하지 않듯이 갈매기가 갈매기를 구경하지 않듯이 수평선이 수평선을 구경하지 않듯이 통통배가 통통배를 구경하지 않듯이 일몰이 일몰을 구경하지 않듯이 별빛이 별빛을 구경하지 않듯이 또한 그 무엇도 다른 무엇을 구경하지 않듯이
바삐 바삐 漁具를 챙기는 어부들,
한 팀 꽉 짜인 저 바다.
어깨 너머 기웃거리다 머뭇거리다 가는
나는 섬, 2박 3일 떠돈 섬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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