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능금밭 앞을 서성이다 / 고재종

문근영 2008. 11. 12. 10:12

능금밭 앞을 서성이 / 고재종


내가 시방 어쩌려고 능금밭 앞에서 서성이며
내가 요렇듯이 바잡는 마음인 것은
저 가시 탱자울의 삼엄한 경비 탓이 아니다

내가 차마 두려운 건, 저 금단의 탱자울 너머
벌써 신신해진 앞강물소리와
벌써 쟁명해진 햇살을 먹고
이 봐라, 이 봐라, 입 딱! 벌게는 주렁거리며
빨갛게 볼을 붉히고 있을 능금알들의 황혼

어느해 가을 저곳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볼이 달아오를대로 올라선
그 능금알을 따는 처녀들과
그것을 한광주리씩 들어올리는
먹구리빛 팔뚝의 사내들을 훔쳐본 적이 있다

나는 아직도 저 능금밭에 들려거든
두근두근 숨을 죽이고, 콩당콩당 숨을 되살리며
개구멍을 뚫는 벌때추니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익을대로 익은 빛깔이
그토록 견딜 수 없는 향기로 퍼지는
저 풍성한 축제를 누가 방자하게 바라볼 것인가

내가 능금밭 앞에서 여전히 두려운 것은
시방 무슨 장한 기운이 서리서리 둘러치는!
저 금기의 신성의 공간, 그것을
내 차마 좀팽이로도 바잡는 마음 다하여
아직도 몰래 훔치고 싶은 이 황홀한 죄, 죄 때문

 

독학자  / 고재종
 


깬 소주병을 긋고 싶은 밤들이었다 겁도 없이
돋는 별들의 벌판을 그는 혼자 걸었다 밤이 지나면
더 이상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날들이었다
풀잎 끝마다 맺히는 새벽이슬은 불면이 짜낸 진액
같았다 해도 해도 또다시 안달하는 성기능항진증
환자처럼 대책 없는 생의 과잉은 끝이 없었다
견딜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어쩌다 만난
수수 모감처럼 그에겐 고개 숙이고 싶은 푸른 하늘이
없었다 아무도 몰래 끌려가서 아무도 몰래
그대로 처박힐 수도 없었다 생도막 쳐질 수 없었다
눈물이 굳어서 벌판의 돌이 되고 그 돌들이
그를 처음 보고 놀라서 산맥이 될지라도
오직 해석만이 있고 원문은 알 수 없는 생을 읽고자
운명을 포기해도 좋았다 운명에겐 모욕이었겠지만
미물 짐승에게라도 밥그릇을 주었다가 빼앗지는 말아야
했다 빼앗은 그릇을 모래 속에 처박는 세상이거나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때마침 도둑을 맞은
애인 집에서 되레 도둑으로 몰린 경우거나처럼
도대체 아니 되는 그 잔혹한 고통의 독재를 밀며
그에겐 인간만 남았다 자신의 불행을 춤으로 추었던
조르바처럼 한 번이라도 춤을 추지 않는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도 되는 것 같아 춤을 멈추지 않는
사람처럼, 벌판의 황량경이 삭풍에 쓸리는 나날을 불러
그는 고독의 신전에 향촉을 피웠다 그처럼
무장무장 단순한 인간만 남아 보리수 아래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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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통리의 여름                                         

                                       
닷새만에 헛간에서 발견된

월평할매의 썩은 주검에서

수백 수천의 파리떼가 우수수,

살촉처럼 날아오르는 처참에 울고


빈대 뛰는 온 방안 뒤지고 뒤져

찾아낸 전화번호 속의 일곱 자녀들

기름때 묻은 머리로 하나 둘 달려와

뒤늦게 뉘우치며 목놓는 아픔에 울고


급기야 상여를 멜 남정네들 모자라

경운기로 울퉁불퉁 북망길 떠난 할매

굴삭기로 파놓은 구렁에 묻히는

그 험한 종말에 또 울었지만


어디 그뿐이랴 이 사양의 마을

그 어디건 헐린 담장, 텅 빈 마당에

개망초 눈물꽃은 흐드러지고

뻐꾹새 피울음은 종일 쏟아지고


이제 불과 예닐곱집 연기나는 곳

퀭한 눈만 남은 또 다른 월평네들의

간단없는 해소기침만 너무 질겨서

사방 산천 진초록도 목숨껏 노엽고

 

 

 

 

외로움에 대하여                                

 

들어봐, 저 처서절의 나뭇잎이

저렇게 서걱이는 소리,

풀잎들이 스치는 소리,

시방 달빛은 휘영청하고

앞들의 수숫대는 마냥 일렁이는 소리


들어봐, 저 풀섶의 씨르래기며

귀뚜라미 울어 끓는 소리에

동구밖 느티나무의 잎새들

바르르 떠는 소리,

그 옆 대숲 위에 부시럭부시럭

참새떼 뒤척이는 소리


외로운 이는 소리에 민감하나니

들어봐, 저기 저렇게

기차오는 소리,

기적 소리를 뿜으며 달려와

기차는 또 저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버리는 소리


그러면 그러면, 그때마다

그 기차 불빛 한 줄기에도 반짝반짝

온 목숨 꽃사래치다간

이제 무척은 야위어버린, 저 간이역

코스모스들의 목 늘어지는 소리,

역사 위로는 툭, 툭

오동잎 아득히 지는 소리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하늘의 정정한 것이 수면에 비친다. 네가 거기 흰구름 으로 환하다. 산제비

가 찰랑, 수면을 깨뜨린다. 너는 내 쓸쓸한 지경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제

그렇게 너를 꿈꾸겠다. 草露를 잊은 산봉우리로 서겠다. 미루나무가 길게

수면에 눕는다. 그건 내 기다림의 길이. 그 길이가 네게 닿을지 모르겠다.

꿩꿩 장닭꿩이 수면을 뒤흔든다. 너는 내 그리운 지경으로 다시 구불거린

다. 나는 이제 너를 그렇게 기다리겠다. 길은 외줄기, 飛潛 밖으로 멀어지듯

요하겠다. 나는 한가로이 거닌다. 방죽가를 거닌다. 거기 윤기 흐르는 까

만 염소에게서 듣는다. 머리에 높은 뿔은 풀만 먹는 외골수의 단단함임을.

너는 하마 그렇게 드높겠지. 日月 너머에서도 뿔은 뿔이듯 너를 향하여 단

단하겠다. 바람이 분다. 천리향 향기가 싱그럽다. 너는 그렇게 향기부터 보

내오리라. 하면 거기 굼뜬 황소마저 코를 벌름거리지 않을까. 나는 이제 그

렇게 아득하겠다. 그 향기 아득한 것으로 먼 곳을 보면, 삶에 대하여 무얼

더 바래 부산해질까. 물결 잔잔해져 水心이 깊어진다. 나는 네게로 자꾸 깊

어진다.

 

 

푸른 자전거의 때 / 고재종


말매미 말매미 떼 수천 마리의 전기톱질로

온 들판을 고문해대어선

콩밭에서 콩순 따는 함평댁의 등지기 위로

살 타는 훈짐 피어오르는 오후 숲참때


저기 신작로 하학길을

은륜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막내녀석,

그 씽씽 그 의기양양

문득 허리를 펴다 가늠한 함평댁의 입이

함박만하게 함박만하게 벌어질 때


때마침 목덜미를 감아오는 바람자락과 함께

푸르고 푸른 풋것들이

환호작약, 온각 손사래를 쳐대는 것이었다

 

그리운 죄                                              

 

산 아래 사는 내가

산 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뜨거운 죄 아니랴

포르릉, 어치가 날며 흩어놓는

눈꽃의 길을 또한 나는 안다

 

 

수숫대 높이만큼 / 고재종

 

네가 그리다 말고 간
달이 휘영청 밝아서는
댓그림자 쓰윽 쓰윽
마당을 잘 쓸고 있다
백 리까지 확 트여서는
귀뚜라미 찌찌찌찌찌
너를 향해 타전을 하는데
아무 장애는 없다
바람이 한결 선선해져서
날개가 까실까실 잘 마른
씨르래기의 연주도
씨르릉 씨르릉 넘친다
텃밭의 수숫대 높이를 하곤
이 깊고 푸른 잔을 든다
나는 아직 견딜 만하다
시방 제 이름을 못 얻는
대숲 속의 저 새울음만큼,

 

 

수선화, 그 환한 자리                           

 

거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아직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저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샛노란 꽃을 밀어올리다니

 

네 오롯한 호흡 앞에서

이젠 나도 모르게 환해진다

 

거기 문득 네가 있음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는 시간

 

네 서늘한 기운을 느낀 죄로

나는 조금만 더 높아야겠다

 

 

 

 

날랜 사랑                                         

 

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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