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고슴도치의 마을 / 최승호

문근영 2008. 11. 12. 13:33

고슴도치의 마을/최승호(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 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 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밤엔 莊子를 읽으리라

 

 

세속도시의 즐거움·2 -최승호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허(虛)

 

 

멍게/최승호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게는 참 조용하다.
천둥벼락 같았다는 유마의 침묵도
저렇게 고요했을 것이다.

 

허물덩어리인 나를 흉보지 않고
내 인생에 대해 충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멍게는 얼마나 배려깊은 존재인가?

 

바다에서 온 지우개 같은 멍게

멍게는 나를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


소리를 내면 벌써 입안이 울림의 공간
메아리치는 텅빈 골짜기
범종 소리가 난다.

멍.

 

 

텔레비전

                       최승호

하늘이라는 무한(無限) 화면에는
구름의 드라마,
늘 실시간으로 생방송으로 진행되네.
연출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수줍은지
전혀 얼굴을 드러내지 않네.
이번 여름의 주인공은
태풍 루사가 아니었을까.
루사는 비석과 무덤들을 넘어뜨렸고
오랜만에 뼈들은 진흙더미에서 나와
붉은 강물에 뛰어들었네
불멸을 향한 절규들,
울음 울던 말매미들이 사라지고
단풍이 높은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산 좋아하는 이들을 마지못해 따라나서도
개울가에서 그냥 혼자 어슬렁거리고 싶네.
누가 염치도 없이 버렸을까.
휑하니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이
무슨 면목없는 삐딱한 영정처럼
바위투성이 개울 한 구석에 박혀 있네.
텅 빈 텔레비전에서는
쉬임없이
서늘한 가을물이 흘러내리네.

 

 

 

고비/최승호

 

만약 내가 고비였다면 나에겐 아무 두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눈도 귀도 코도 없이 나는 늘 삼매에 빠져 있었을 것이고 돌

의 혀가 있었다 해도 침묵했을 것이다

 

모래들이 흘러 나오는 유방

붕괴된 궁둥이에서 흩어지는 돌 조각들

 

만약 내가 고비였다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죽였다고 누가 나를

비난한다 해도 나는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양들 수

천 마리 낙타 수백 마리가 내 품 안에서 죽어가도 나는 그저 무

심, 내가 고비였다면 나는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저 무심과 무

자비로 일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비도 아니고 돌도 아니

 

붉은 해가 훨훨 솟아오른다

마치 박제처럼 건조한 밤을 불사르듯이

사막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

바늘없는 텅 빈 시계처럼 돌아가는 사막의 하루.

 

 

 

입적/최승호

 

꽃이 없으면 어찌 하느님이 피어날 수 있으며

새가 없으면 어떻게 하느님이 노래할 수 있을까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데

하나님은 나를 믿고 나무들을 믿고 물고기들을 믿는다

그렇지만 이 사막에서

하나님은 그저 입적入寂해 있을 뿐이다

거친 모래

태양에 그을은 돌들

십자가도 없다 교회도 없다 구원도 없다

예수는 아마 이런 곳에서

홀로 영혼의 고비들을 넘겼으리라

 

 

그림자/ 최승호

 

 

 

개울에서 발을 씻는데

잔고기들이 몰려와

발의 때를 먹으려고 덤벼든다

떠내려가던 때를 입에 물고

서로 경쟁하는 놈들도 있다

내가 잠시

더러운 거인 같다

물 아래 너펄거리는

희미한 그림자 본다

그 너덜너덜한 그림자 속에서도

잔고기들이 천연스럽게 헤엄친다

어서 딴 데로 가라고 발을 흔들어도

손으로 물을 끼얹어도 잔고기들은

물러났다가 다시 온다

 

 

 

무서운 굴비/최승호 
 
 
 
나는 왜 굴비를 두려운 존재라고 말해야 하나
석쇠 위에 구워 먹거나 찌개 끓여도
얌전히 있는
저 무력하기 짝이 없는 굴비를
 
굴비는
소금에 절여 통째로 말린 조기라 한다
혹은 건석어(乾石魚)

굴비, 나의 적(敵), 나의 반역(反逆), 나의 비굴
비굴한 삶은 통째로
굴비를 닮아간다
그물을 뒤집어 쓰고 퍼덕이다가
결국 장님에 벙어리
귀머거리가 된 굴비를
나는 왜 두려운 존재라고 말해야 하나
 
 
 

자동판매기/최승호

 

 

오렌지 주스를 마신다는 게
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
습관의 무서움이다

무서운 습관이 나를 끌고다닌다
최면술사 같은 습관이
몽유병자 같은 나를
습관 또 습관의 안개나라로 끌고다닌다

정신 좀 차려야지
고정관념으로 굳어 가는 머리의
자욱한 안개를 걷으며
자, 차린다. 이제 나는 뜻밖의 커피를 마시며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賣春婦라 불러도 되겠다
黃金교회라 불러도 되겠다
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
그대가 돈의 權能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神의 오렌지 주스를 줄 것인가

 



 

거울/최승호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요귀妖鬼지 사람이랴

 

 

거울공장 노동자들은

늘 남의 거울을 만들어놓고

거울 뒤편에서 주물鑄物처럼 늙는다

 

 

구리거울을 만들던 어느 먼 시절의 남자를

훤히 비추던 보름달이

곰팡이도

녹도

이끼도 없이

빌딩 모서리 스모그 위로 솟고 있을 때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껄껄껄 웃을 만큼

낙천적인 해골은 누구인가?

 

 

담쟁이덩굴 / 최승호

 

 

허공이

드높은 담이었다면

담쟁이 덩굴들은 더듬더듬 기어 올라 가다가

허공을 훌쩍 넘어 갔을 것이다

 

허공 너머에

또 무슨 알 수 없는 담이 겹겹이 치솟아 있는지 모르겠으나

넘어가고 넘어간 뒤에도 무수한 덩굴손들은

끝없이 뻗어 나가고 힘차게 뻗어나가지 않았을까

 

참으로 질긴 담쟁이 덩굴이라면

담쟁이덩굴의 근성으로

허공이 바다 밑으로 주저 앉는다 해도 기어 오르고

줄기가 토막 다 해도 거대한 낙지발처럼 꿈틀?틀 뻗어 나갔을 것이다

 

 

 

 

오동나무 /최승호

 

 

 

예로부터 저쪽 한량들이
기타나 만돌린을 가지고 놀았듯이
이쪽에서도 생활에 구멍 뻥뻥 뚫려있는 축들이
거문고나 피리를 만지며 흥성거려 놀 줄 안다
피리나 대금은 속을 통과해 나오는 바람으로 소리가 나는데
그 속이란 게 그저 뻥 뚫려있는 듯해도
천태만상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허(虛)란 실(實)의 다른 이름인 법
거문고 마디마디 울혈진 가락이 하늘과 땅 사이를 진동시킬 수 있는 이치도 알고 보면
뜯는 이의 마음이 텅 비어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텅텅 비어 있는 마음에서 저며 나와 푸르게 여울져 흘러가는 소리가 바로
뜯는 이의 혼이자 거문고의 정신인 것
잘 익은 가을날 오동나무를 베어 보라
긴 줄기를 따라 虛의 정신으로 꽉 메워진
텅 빈 구멍이 나있을 것이다
잔뜩 움켜쥠보다 손을 탁 놓아 비워버림이
자유롭다는 것을 진즉 알았는지
오동은 씨앗 시절부터 그 안에 구멍을 키워 왔을 게다
마음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놀 줄 아는 축들만이
속이 텅 비어버려 쓸모 없는 오동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
구멍 없는 것들은
놀 줄도 놀 자유도 모른다
요새 사람들 노는 게 어디 노는 것인가

 

 

 

구름들 /최승호

 

 

구름에 걸려서 사람들이 넘어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덧없이 죽여 놓고
구름들이 조용히 여름 대낮을 흘러간다
보라! 큰 감자 모양의 구름
어떤 구름은 상어를 닮았다


구름은 넘어지는 법이 없다
넘어진 사람들을 넘어서
구름들이 낮과 밤을 흘러가고
남대문 시장에 북적거리던 인파가
오늘은 동대문시장에서 씨끌벅적 출렁거린다


옷,옷들,옷가게의 점원들
하나의 몸뚱이를 휘감는 천들이 있고
흘러가는 구름 아래 수많은 옷들이 있다
벌거벗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
그러나 구름을 걸친 채 누워 있는
알몸뚱이를 보았는가
이 세상 옷이 아니기 때문에
수의는 값이 비싸다
어느 여행객에게 수의를 입히고
먼길을 떠나는지 모르겠으나
느린 장의차에서는 벌써
구름 냄새가 피어오른다

 

 

네모를 향하여/최승호



은행 계단 앞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땡볕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

이 여름 도시에선 모두들

얼마나 피곤하게 살아오고 또 죽어가는지

빌딩 입구의 늙은 수위는

의무를 다하느라 침을 흘리며

눈을 뜬 채로 자면서도 빌딩을 지키고 있다


자라나는 빌딩들의

네모난 유리 속에 갇혀

네모나는 인간의 네모난 사고 방식, 그들은

네모난 관 속에 누워서야 비로소

네모를 이해하리라


---우리들은 네모 속에 던져지는 주사위였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선술집 /최승호


돈 버는 일도 禪이어서
아무리 돈을 벌어도 번 돈이 없다.

본래 영원한 가난이여,
무일푼인 노을과 저녁 어스름이 찾아와도
나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이
그 아름다운 빈털터리들의 장엄 앞에서
술을 마시노니

괴로움의 증류여,
나의 선술집인 수평선이여,
뭉게 구름같은 술꾼을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라.

 

 

 

뼈의 음악/ 최승호

 

 

 

 

만약 늑골들이 현이었다면, 그리고 등뼈가 활이였다면, 바람은 하나의 등뼈로 여러개의 늑골들을 긁어매며 연주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막이라는 청중으로 꽉 찬 사막에서 뼈들의 마찰음과 울림은 죽은 늑대의 뼈나 말의 뼈와 공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적막이라는 청중의 마음을 깊이 긁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뼈의 음악은 그렇다 아무런 악보도없이 뼈로 뼈를 연주해 텅 빈 뼈들을 뒤 흔든다 청중으로는 적막이 제일이고 연주자로는 바람이 적합하다

 
 


 게/최승호

 

어기적거리는, 엉성한, 눈을 흘기는 문체로 써야겠다, 아무래도 나는 순하고 착한 노인은 못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러 독 짓는 늙은이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다. 육신은 느리게 늙어가고 인생은 빨리 썩어간다. 아마 죽은 뒤에는 우울했던 해골도 이빨이 빠진 채 웃으리라. 이런 말도 아직은 혀 한조각이 뭉쳐져 있어 하는 것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려든 것 같은 일상적 삶을 게요리전문점 수족관의 게들도 경험한다. 그들도 몸을 팔려고 대도시로 왔다. 누가 내 몸을 사서 분해하거나 해체해도 그 왕성한 식욕을 원망하지 않겠소! 게들은, 왕게든 털게든 대게든, 늠름하게 최후를 맞이하겠다는 자세로 수족관 유리 밖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지금은 바퀴들이 지나간다. 구름은 흘러오고 사람들은 흘러가고, 사람 외에는 보이는 영장류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끌려나온 뒤에 게는 일종의 괴상한 괴물덩어리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보이는 것도 없고 보는 자도 없고 도대체 뭐가 뭔지, 과거에 참으로 게였는지, 텅 빈 껍데기가 현재인지, 미래는 이제 없는 건지, 이게 그 게 찌꺼기인지, 저게 그 게의 잔해인지, 모든 게 가짜인지 헛것인지, 뒤죽박죽 너절하게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래도 靈을 믿었던 게는 다리가 없어도 어기적거리고, 눈이 없어도 가야 할 길을 보며, 마침내 바다로 돌아간다고 말해야 할까,

 

 

발효/최승호  

 

 

부패해가는 마음 안의 거대한 저수지를
나는 발효시키려 한다

나는 충분히 썩으면서 살아왔다
묵은 관료들은 숙변을 내게 들이부었고
나는 낮은 자로서
치욕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땅에서 냄새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수렁 바닥에서 멍든 얼굴이 썩고 있을 때나
흐린 물 위로 떠오를 때에도
나는 침묵했고
그 슬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한때 이미 죽었거나
독약 먹이는 세월에 쓸개가 병든 자로서
울부짖음 대신 쓴 거품을 내뿜었을 뿐이다
문제는 스스로 마음에 뚜껑을 덮고 오물을 거부할수록
오물들이 더 불어났다는 사실이다
뒤늦게 나는 그 뚜껑이 성긴 그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물왕저수지라는 팻말이 내 마음의 한 변두리에 꽂혀 있다
나는 그 저수지를 가본 적이 없다
물왕저수지로 가는 길가의 팻말을 얼핏 보았을 뿐이다
그 저수지에
물의 법이 물왕의 도가
아직도 순환하고 있기를 바란다
그 저수지에 왕골을 헤치며 다니는 물뱀들이
춤처럼 살아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물과 진흙의 거대한 반죽에서 흰 갈대꽃이 피고
잉어들은 쩝쩝거리고 물오리떼는 날아올라
발효하는 숨결이 힘차게 움직이고 있음을
내 마음에도 전해 주기 바란다

 

 


 

 

쌍봉낙타 / 최승호

 

 

 만약 내가 야생 쌍봉낙타였다면, 그리고 수컷이었다면, 혼자 사막을 떠돌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 그게 그거인 사막에서 나는 방황이라는 말을 모르는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별로 씹을 것이 없이도 우물우물 되새김빌을 하면서 막막한 시간을 되씹어야 했을 것이다. 마땅히 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도 없는 사막에서, 가장 높은 것은 나의 머리, 커다란 나의 두 눈은 투명하게 이글거리는 공기에 둘러싸여 텅 비어 있는 먼 곳을 날마다 바라보지 않았을까. 고개를 숙이면 돌, 모래, 마른 풀, 그리고 고개를 들면 광활한 無와 다름없는 풍경 속에서 나는 다시 고개를 늘어뜨리고 느릿느릿 걸어가다가 언젠가 내가 쏟아놓은 똥무더기가 바짝 말라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갑자기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을지도 모른다. 여름철이면 털이 빠져 너덜너덜한 내 모습은 거의 걸레나 다름없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나의 암갈색 털들, 그 묵은 털들은 다 바람이 데려갈 털들이다. 해마다 털갈이를 거듭하다 보면, 그리고 고독에도 익숙해져서 내가 누군지도 잊어버린 채 우물우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나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많이 늙어 있다. 사막이 늙지 않는 것은 이미 죽은 땅이기 때문이다. 나의 앙상한 뼈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을 땅, 죽은 땅은 한낮이면 무척 덥다. 그 더위 속에서 오늘 나는 고개를 들고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는 늙은 쌍봉낙타를 나 역시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大雪注意報 (대설주의보)/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뭉게구름 - 최승호

 


나는 구름 숭배자는 아니다
내 가계엔 구름 숭배자가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구름 아래 방황하다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구름들의 변화 속에 뭉개졌으며 어머니는
먹구름들을 이고 힘들게 걷는 동안 늙으셨다
흰 머리칼과 들국화 위에 내리던 서리
지난해보다 더 이마를 찌는 여름이 오고
뭉쳐졌다 흩어지는 업의 덩치와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나는 뭉게구름을 보며 걸어간다
보석으로 결정되지 않는 고통의 어느 변두리에서
올해도 이슬 머금은 꽃들이 피었다 진다
매미 울음이 뚝 그치면
다시 구름 높은 가을이 오리라

 

 

 

비둘기 벽화/최승호

 

번쩍거리던 고드름들이 사라졌다. 그 대신, 건물 벽에는, 오래 가는 것, 잘 지워지지 않는 것이 나타났다. 그것은 점점 길쭉하게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 끈끈하게 흘러내리다 굳어버리는 카오스 같은 것. 똥의 힘은 그렇다. 무질서하게, 자연스러운 벽화를 만들어낸다. 겨울날의 비둘기들이, 벽 틈에 웅크린 하늘거지들처럼 볕을 쬐면서, 아무 뜻도 없이 배설물로 그려나간 희멀건 벽화를, 봄날의 절벽 같은 베란다에서, 나는 바라본다. 도회지의 비둘기는 鳥類가 아니라, 시궁쥐가 속한 쥐과 동물에 가깝다. 비둘기들은 이제 숲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길바닥의 찌꺼기를 주워먹다가, 발가락이 뭉개져도, 아스팔트에서 날개가 쓰레기로 변할지라도.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 최승호


수달 멧돼지 오소리 너구리 고라니 멧밭쥐 다람쥐 관박쥐 검은댕기해오라기 중대백로 쇠백로 왜가리 원앙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비오리 조롱이 새홀리기 꿩 깝작도요 멧비둘기 집비둘기 소쩍새 물총새 청딱다구리 가막딱다구리 오색딱다구리 쇠딱다구리 노랑할미새 알락할미새 직박구리 때까치 물가마귀 딱새 붉은머리오목눈이 오목눈이 쇠박새 진박새 곤줄박이 박새 동고비 멧새 쑥새 노랑턱멧새 어치 까치 큰부리까마귀 자라 아무르장지뱀 도마뱀 누룩뱀 무자치 구렁이 능구렁이 유혈목이 대륙유혈목이 살모사 쇠살모사 까치살모사 산줄점팔랑나비 뿔나비 푸른부전나비 암먹부전나비 먹부전나비 부전나비 작은멋쟁이나비 수노랑나비 제일줄나비 왕세줄나비 별박이세줄나비 애기세줄나비 네발나비 큰멋쟁이나비 사향제비나비 산제비나비 긴꼬리제비나비 호랑나비 꼬리명주나비 대만흰나비 큰줄흰나비 배추흰나비 노랑나비 남방노랑나비 각시멧노랑나비 굴뚝나비 물결나비 노랑누에나방 넉점물결애기자나방 두줄물결자나방 포플라잎말이명나방 뜰길앞잡이 애반딧불이 늦반딧불이 등빨간먼지벌레 노랑선두리먼지벌레 오이잎벌레 쑥잎벌레 열점박이잎벌레 풀색꽃무지 목하늘소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 장수허리노린재 깜보라노린재 얼룩대장노린재 큰광대노린재 광대노린재 참나무노린재 끝검은말매미충 늦털매미 말매미 애매미 호박벌 나나니 검은물잠자리 물잠자리 날개띠좀잠자리 깃동잠자리 밀잠자리 묵은실잠자리 명주잠자리 콩중이 벼메뚜기 왕귀뚜라미 모메뚜기 실베짱이 참밑들이 산느타리 잣버섯 노란갓벚꽃버섯 넓은솔버섯 애기낙엽버섯 흰삿갓갈때기버섯 자주졸각버섯 밀버섯 밤버섯 뽕나무버섯 그늘버섯 붉은꼭지버섯 못버섯 알광대버섯 암회색광대버섯아재비 독우산광대버섯 흰주름갓버섯 갈색먹물버섯 노랑먹물버섯 족제비눈물버섯 검은비늘버섯 비늘버섯 다색끈적버섯 젤리귀버섯 황소비단그물버섯 붉은비단그물버섯 접시껄껄이그물버섯 황금무당버섯 젖버섯아재비 새털젖버섯 잿빛젖버섯 노루궁뎅이 담자고약버섯 분홍껍질고약버섯 바늘버섯 갈색꽃구름버섯 구름버섯 옷솔버섯 아까시재목버섯 치마버섯 기와소나무비늘버섯 해면버섯 털목이 아교뿔버섯 붉은목이 먼지버섯 말불버섯 좀말불버섯 애기방귀버섯 작은주발버섯 긴대주발버섯 녹청균 콩버섯 콩꼬투리버섯 다형콩꼬투리버섯 구실사리 개부처손 물쇠뜨기 속새 산고사리삼 꿩고비 고비 황고사리 고사리 고비고사리 부싯깃고사리 청부싯깃고사리 개면마 만주우드풀 십자고사리 낚시고사리 관중 바위족제비고사리 뱀고사리 개고사리 거미고사리 일엽초 은행나무 일본잎갈나무 잣나무 소나무 측백나무 향나무 가래 말즘 실말 조릿대 실새풀 숲개밀 포아풀 갈대 용수염풀 그령 쥐꼬리새 잔디 강아지풀 금강아지풀 바랭이 주름조개풀 기장대풀 띠 큰기름새 조개풀 개솔새 솔새 옥수수 대사초 길뚝사초 산거울 그늘사초 넓은잎천남성 천남성 닭의장풀 꿩의밥 골풀 주걱비비추 큰원추리 애기원추리 산달래 산부추 참산부추 달래 털중나리 참나리 비짜루 각시둥굴레 둥글레 층층둥굴레 진화정 풀솜대 애기나리 선밀나물 청미래덩굴 청가시덩굴 마 도꼬로마 국화마 각시붓꽃 꽃창포 붓꽃 범부채 개불알꽃 병아리난초 제비난초 은대난초 타래난초 옥잠난초 홀아비꽃대 사시나무 은사시나무 이태리포플러 왕버들 분버들 버드나무 능수버들 호랑버들 키버들 가래나무 거제수나무 박달나무 개박달나무 물박달나무 오리나무 까치박달 서어나무 난티잎개암나무 개암나무 참개암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참느릅나무 비술나무 왕느릅나무 당느릅나무 시무나무 느티나무 산팽나무 검팽나무 산뽕나무 뽕나무 혹쐐기풀 모시물통이 개모시풀 꼬리겨우살이 겨우살이 쥐방울덩굴 족도리 애기수영 수영 개대황 참소리쟁이 소리쟁이 왜개싱아 이삭여뀌 며느리배꼽 며느리밑씻개 고마리 미꾸리낚시 여뀌 바보여뀌 기생여뀌 개여뀌 마디풀 취명아주 명아주 댑싸리 자리공 석류풀 쇠비름 털좀나도나물 쇠별꽃 별꽃 벼룩나물 술패랭이꽃 대나물 동자꽃 장구채 종덩굴 요강나물 자주조희풀 개버무리 큰꽃으아리 외대으아리 으아리 참으아리 할미밀망 사위질빵 동강할미꽃 할미꽃 노루귀 미나리아재비 꿩의다리 연잎꿩의다리 큰제비고깔 흰진범 진범 백부자 진돌쩌귀 노루삼 승마 촛대승마 눈빛승마 동의나물 으름 꿩의다리아재비 댕댕이덩굴 함박꽃나무 오미자 생강나무 애기똥풀 피나물 금낭화 산괴불주머니 무 갓 배추 유채 황새냉이 왜갓냉이 미나리냉이 속속이풀 꽃다지 장대나물 바위솔 세잎꿩의비름 꿩의비름 기린초 바위채송화 노루오줌 돌단풍 바위떡풀 괭이눈 물매화 말발도리 물참대 매화말발도리 고광나무 산수국 까마귀밥나무 가침박달 쉬땅나무 조팝나무 떡조팝나무 당조팝나무 꼬리조팝나무 갈기조팝나무 참조팝나무 국수나무 뱀딸기 가락지나물 양지꽃 민눈양지꽃 세잎양지꽃 물양지꽃 딱지꽃 큰뱀무 뱀무 산딸기 곰딸기 멍석딸기 복분자딸기 줄딸기 터리풀 오이풀 긴오이풀 짚신나물 찔레꽃 생열귀나무 개살구나무 귀룽나무 올벚나무 개벚나무 산사나무 아광나무 야광나무 아그배나무 산돌배나무 마가목 차풀 고삼 다릅나무 조록싸리 참싸리 싸리 큰도둑놈의갈고리 도둑놈의갈고리 갈퀴나물 네잎갈퀴 광릉갈퀴 노랑갈퀴 나비나물 활량나물 칡 돌콩 콩 새콩 낭아초 땅비싸리 아까시나무 벌노랑이 족제비싸리 황기 붉은토끼풀 토끼풀 전동싸리 활나물 쥐손이풀 이질풀 괭이밥 병아리풀 산초나무 소태나무 광대싸리 흰대극 회양목 개옻나무 화살나무 참회나무 버들회나무 참빗살나무 푼지나무(청다래넌출) 노박덩굴 미역줄나무 고추나무 신나무 고로쇠나무 당단풍 복자기 노랑물봉선화 물봉선 갈매나무 짝자래나무 왕머루 새머루 담쟁이덩굴 피나무(달피나무) 연밥피나무 뽕잎피나무 찰피나무 수박풀 수까치깨 개다래 쥐다래 다래 물레나물 고추나물 남산제비꽃 태백제비꽃 둥근털제비꽃 잔털제비꽃 고깔제비꽃 제비꽃 흰털제비꽃 알록제비꽃 뫼제비꽃 졸방제비꽃 콩제비꽃 노랑제비꽃 아마풀 보리수나무 부처꽃 달맞이꽃 음나무 오갈피 두릅나무 시호 참반디 사상자 개사상자 미나리 참나물 노루참나물 개발나물 바디나물 참당귀 구릿대 신감채 강활 묏미나리 큰참나물 기름나물 어수리 산딸나무 층층나무 노루발풀 꼬리진달래 진달래 산철쭉 철쭉꽃 산앵도나무 좁쌀풀 참좁쌀풀 까치수영 큰까치수영 고욤나무 감나무 노린재나무 쪽동백나무 때죽나무 물푸레나무 쇠물푸레 쥐똥나무 개회나무 자주쓴풀 구슬붕이 용담 칼잎용담 박주가리 산해박 백미꽃 애기메꽃 메꽃 새삼 실새삼 지치(지초) 꽃마리 작살나무 누리장나무 누린내풀 조개나물 황금 산골무꽃 골무꽃 참골무꽃 배초향 벌깨덩굴 개박하 꿀풀 익모초 광대수염 쉽사리 향유 꽃향유 산박하 속단 배풍등 까마중(까마종이) 독말풀 참오동 현삼 밭뚝외풀 논뚝외풀 절국대 알며느리밥풀 애기며느리밥풀 나도송이풀 송이풀 파리풀 질경이 큰꼭두서니 꼭두서니 갈퀴꼭두서니 솔나물 갈퀴덩굴 개갈퀴 딱총나무 덜꿩나무 가막살나무 백당나무 병꽃나무 인동 괴불나무 각시괴불나무 올괴불나무 돌마타리 금마타리 마타리 뚝갈 쥐오줌풀 산토끼꽃 체꽃 하늘타리 노랑하늘타리 수원잔대 자주꽃방망이 잔대 초롱꽃 더덕 도라지 금불초 바위구절초 뚱딴지 담배풀 솜나물 단풍취 돼지풀 도꼬마리 골등골나물 등골나물 벌등골나물 미역취 버드쟁이나물 가새쑥부쟁이 쑥부쟁이 갯쑥부쟁이 개미취 옹굿나물 까실쑥부쟁이 참취 눈개쑥부쟁이 개쑥부쟁이 단양쑥부쟁이 개망초 망초 머위 붉은서나물 쑥방망이 우산나물 톱풀 산구절초 구절초 제비쑥 더위지기 참쑥 산쑥 쑥 멸가치 진득찰 가막사리 삽주 지느러미엉겅퀴 큰엉겅퀴 엉겅퀴 지칭개 각시취 큰각시취 빗살서덜취 사창분취 당분취 구와취 톱분취 은분취 서덜취 분취 산비장이 뻐국채 큰수리취 국화수리취 수리취 절굿대 흰절굿대 조뱅이 쇠서나물 민들레 조밥나물 벋은씀바귀 벌씀바귀 씀바귀 왕고들빼기 이고들빼기 고들빼기

  

  「동강 유역 산림생태계 조사보고서」

  (1998. 12. 산림청 임업연구원)를 읽으면서

  내가 아무르장지뱀이나

  용수염풀,

  아니면 바보여뀌나 큰도둑놈의갈고리나 괴불나무로

  혹은 더위지기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더라면 내 이름이 어떻든

  이름의 감옥에서 멀리 벗어나

  삶을 사랑하는 일에 삶이 바쳐졌을 것이다.

  무덤에 핀 할미꽃이거나

  내가 동굴에서 날개를 펴는

  관박쥐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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