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검은 관 위의 흰 백합 / 유홍준

문근영 2008. 11. 1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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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관 위의 흰 백합 / 유홍준

 

어디를 눌러야 할지
눌러야 할 피스톤이 없다


저것은 죽음을 불러내는 트럼펫,

 

있는 대로 목구멍을 열어젖히고
저것은
비명을 지른다


최대한으로 입을 벌린, 흰 백합 트럼펫의 주둥이…


나는 조곡을 연주했다

 

누가 저것을 주검에게 바쳤나,

검은 상복을 입고 새하얀 면장갑을 끼고


나는 검은 관 위의 흰 백합 트럼펫을 불었다

 

 

 

오월 - 유홍준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앉아

종달새를 먹는다


조잘조잘 먹는다

까딱까딱 먹는다


벙어리의 어린 딸이 살구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있다 조잘거리고 있다


벙어리가 다시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시 종달새를 먹는다


보리밭 위로 날아가는

어린 딸을

밀짚모자 쓴 벙어리가 고개 한껏 쳐들어 바라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맑그미의 세상살기 블러그에서

 

북천 / 유홍준

 

 구름 같은 까마귀떼 저 하늘을 쪼았다 뱉는다 하늘밖

에 더 뜯어먹을 게 없는

 

  눈뜨지 마라 파먹을라 동안거에 들어간 하늘의 얼굴이

산비탈처럼 말랐다 두 볼에 골짜기가 패었다 하늘 눈(目)

에서 피가 흐른다 서산마루를 타고 흘러내린다

 

 주둥이마다 피를 묻힌 까마귀들이 앞산 넘어간다 금방,

캄캄해진다

 

 

나는, 웃는다  - 유홍준

 

  깜박,

  눈을 붙였다

  깼을 뿐인데 누가

  내 머리를 파먹은 거야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누가 내 눈동자를 쪼아먹은 거야 수박덩어리처럼

  누가 넝쿨에서 내 꼭지를 잘라낸 거야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다 숟가락으로 파먹다 만

  뒤통수를 감추고 웃는다

  이렇게 파먹힌 얼굴

  이렇게 파먹힌 뒤통수로

  이렇게 쪼아먹힌 눈 이렇게 갈라터진 흉터로

  누가 내 뒤통수에 빨간 소독약 묻힌 솜뭉치를 쑤셔넣

다 놔둔 거야

  누가 내 웃음에 주삿바늘을 꽂아놓은 거야 누가

  내 웃음에 링거 줄을 꽂고 포도당을 투약하는 거야

  누가 바퀴 달린 이 침대를 밀며 달리는 거야

  복도처럼 아득하게 웃는다 미닫이처럼

  드르륵 웃는다 하얀 시트가 깔린 이 수술대 위에서

  배를 잡고 웃는다 이 흉터 같은 입술

  이렇게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흉터 같은 입술로 누가

  흉터 위에

  립스틱을 바르는 거야

  누가 이 흉터끼리 뽀뽀를 시키는 거야

 

 

아교 - 유홍준

 

 

내 아버지의 종교는 아교,

하루도 아니고

연사흘 궂은비가 내리면

아버지는 선반 위의 아교를 내리고

불 피워 그것을 녹이셨네 세심하게

꼼꼼하게 느리게 낡은 런닝구 입고 마루 끝에 앉아

개다리소반 다리를 붙이셨다네

술 취해 돌아와 어머니랑 싸우다가

집어던진 개다리소반……
살점 떨어져나간 무릎이며 복사뼈며

어깻죽지를 감쪽같이 붙이시던 아버지, 감쪽같이

자신의 과오를 수습하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 아버지의 종교는 아교!

세심하게 꼼꼼하게 개다리소반을 수리하시던

아교의 교주 아버지 보고 싶네

내 뿔테안경 내 플라스틱 명찰 붙여주시던

아버지 만나 나도 이제 개종을 하고 싶다 말하고 싶네

아버지의 아교도가 되어

추적추적 비가 오는 아교도의 주일날

정확히 무언지도 모를 나의 무언가를 감쪽같이 붙이고 싶네

 

주석 없이 - 유홍준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버린 나를 이해해 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푸른 도장 / 유홍준

 

두 눈 때꾼해지는 야근을 마치고
공단 식당, 허름한 방석 위에 앉아 받는
희멀건 밀양돼지국밥
한 뚝배기

 

이렇게 싱겁고 이렇게 희멀건 삶엔
소금이라도 더 치고 맵고 짠 다대기라도 더 넣어 주어야지
암! 암! 누군가 우스개를 하면
그래 맞다 맞어
빈 창자에 소주부터 한 잔 붓고 건져 올리는 국밥 속 고깃덩어리 한 점!

 

이것 봐,
내가 만든 제품에
그대가 찍어준 합격 도장처럼

여기, 푸른 도장이 찍힌 내 숟가락 위의 비곗덩어리 한 점!

 

 

도화동 공터 / 유홍준

 

 중풍을 앓던 아버지가 삐딱삐딱 가로질러 가던 공터 디딜 수 없는, 나는 딛지 못한 공터 어디에 뒀더라 옷이 되지 못한 자투리 같은 공터 누더기 누더기 기운 공터 헛젖이 달린 공터 헛배를 곯던 공터 우울의 그림자 길게 키우던 공터 전봇대에 매달린 보안등만이 목격한 공터 다 늦게 춤바람 난 어머니 야반도주하던 공터 뻑뻑 담배를 빨며 멀리 오색 카바레 불빛을 바라보던 공터 입맛이 씁쓸하던 공터 억장이 무너지던 공터 석 달도 못 채우고 돌아온 어머니 금세 옆집 야쿠르트 아줌마랑 수다를 떨던 공터 한심한 공터 빌어먹을 공터 중풍을 앓던 아버지처럼 등짝이 삐딱한 공터 아모레 화장품 팔러 다니던 어머니처럼 낯짝이 얽은 공터 흉물의 공터 곰보딱지의 공터 카악 퉤, 가래침을 뱉고 떠나 온 공터 끝끝내 우리 집이 되지 못한 마포구 도화동 가든호텔 뒤의, 그 언덕배기의

 

 

 

저수지는 웃는다 / 유홍준

 

저수지에 간다

밤이 되면 붕어가 주둥이로

보름달을 툭 툭 밀며 노는 저수지에 간다

 

요즈음의 내 낙은

홀로

저수지 둑에 오래 앉아있는 것

 

아무 돌멩이나 하나 주워 멀리 던져보는 것

 

돌을 던져도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하는 저수지의 웃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긴 한숨을 내뱉어 보는 것이다

 

알겠다 저수지는

돌을 던져 괴롭혀도 웃는다 일평생 물로 웃기만 한다

생전에 후련하게 터지기는 글러먹은 둑, 내 가슴팍도 웃는다

 

 

복숭아밭에서 온 여자 / 유홍준

 

 새벽열차가 복숭아밭을 지난다 단물 빠진 껌을 씹으며 여자 하나가 올라탄다 화사하다 싸구려 비닐구두를 구겨 신고 있다 털퍼덕, 허벅지 위에 비닐가방을 올려놓고 빨간 손끝으로 떽떽 검은 풍선껌을 불고 있다 복숭아, 복숭아 냄새가 난다 저 여자 이내 잠이 들어 군복 입은 사내 어깨에 머리를 처박는다 생면부지 사내의 어깨 빌려 멀고도 먼 꿈을 꾼다 새벽기차표를 끊을 때 군복 입은 사내 곁엔 젊은 여자를 앉히는 이상한 역무원이 있다 몸 섞지 않고도 부부가 되어 종점까지 가는 사람들이 있다 퉤, 껌을 뱉듯 아침이 온다 두루마리 비닐같은 아침햇살이 복숭아밭을 덮는다 깨울 수도 없을 만치 깊이 잠든 싸구려 원피스 볼따구니에 밝고 환하고 고운 햇살 한 움큼이 어룽거리고 있다

 

 

喪家에 모인 구두들/유홍준

 

 

저녁 상가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들이 구두들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식구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북천)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몇 개

 

 

뇌신 / 유홍준

 

 

아버지의 종교가 <아교>였다면

어머니가 믿는 신은 <뇌신>이었네

<惱信> 혹은 <惱神>.

머리가 빠개질듯 아파

일자무식 어머니는 그 <뇌신>을 믿었다네

어머니 제발 그 따위 사이비 신은 믿지 마세요!

울음을 터뜨리며 큰누나가 어머니의 광신을 말렸지만

그런 말 마라, 이 풍진 세상

<뇌신>보다 강력한 어머니의 구세주는 없었네

그래도 내 고통 잊게 해주는건

오직 이 <뇌신>뿐이다

다시 또 어머니는 한 봉지

<뇌신>의 領聖體를 받아먹고 聖水를 들이켰다네

<아교>와 <뇌신>의 관계는 기독교와 이슬람 같은 것이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분쟁은 끊이지 않고

성지같은 우리 집, 가재 도구들은 날마다 박살이 났네

오오 우리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처럼 자랐다네

내 머리엔 <뇌신>, 내 몸엔 <아교>……

두개의 종교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했네

<아교>도 <뇌신>도 난 절대로 안 믿을거야!

어금니를 깨물며, 난背敎를 결심했고 무신론자가 되었다네

그나저나 이제는 다 거덜나고 말았지만,

내 아버지의 종교가 <아교>였다면

어머니가 믿던 신은 <뇌신>이었다네

 

*뇌신. 두통약

 

 

 

깊은 발자국 /유홍준


 

봄가뭄 보름에 그만

물 가둬놓은 못자리, 논바닥이 때글때글 말랐다

못자리 만든다고 내 맨발이 딛고 다닌 발자국 옴폭한 곳에

올챙이 새끼들이

오골오골 말라죽었다

아! 내 몸뚱어리 무게를 싣고 다녔던 발자국 속이

저 올챙이들의 生死가 걸린

궁지였다니,

울음으로 밤 하나 새워보지도 못한 저것들이

떡잎 같은 발꿈치 여린 울대 더 이상 적시지 못하고

죽어 갔다니,

봄가뭄 보름 끝에 기어이

후드득 비가 듣는다 금방, 깊은 발자국 속을 채운다

반갑다 어미개구리 哭소리......

봄가뭄 보름이 저 울대 저렇듯 맑게 단련시켜 놓다니,

바람 자는 내일 아침이면 무논 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백로처럼

죽음이 지나간 물 속의 내 발자국

물끄러미 들여다 볼 수 있겠다

무논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백로가

내 발자국 속의 주검 집어 올려 삼키는 것, 볼 수 있겠다

 

 사진/재료인의 이야기

 

안경 / 유홍준

 

이런
너는 두 다리를
귀에다 걸치고 있구나 아직
한 번도 어디를 걸어가 본 적이 없는 다리여
그러나 가야할 곳의 풍경을 다 알아서 지겨운 다리여
그렇구나 눈(目)의 발은
귀에다 걸치는 것
깊고 어두운 네 귓속
귀머거리 벌레 한 마리가
발이란 발을 모두 끌어 모으고 웅크리고 있구나
눈에서 귀로 발을 걸치는, 보고 듣는다는 것의 고역이여
얼마나 허우적거렸기에 너는
눈에서 귀로 발을 걸치는 법을 배웠을까
콧등 훌쩍이는 이 터무니없는 생각들
콧등 아래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이 형편없는 나의
眼目들

 

 

直放  / 유홍준


아아 이 두통 지금
나에겐 직방으로 듣는 약이 필요하다

 

그렇다 얼마나 간절히 직방을 원했던지
오늘 낮에 나는 하마터면 자동차 핸들을 꺾지 않아
직방으로 절벽에 떨어져 죽을 뻔했다

 

직방으로 骨로 갈 뻔했다

 

오, 직방으로

 

다가오는 연애, 쏟아져 내리는
눈물, 폭포

 

안다, 미친 자만이 직방으로 뛰어간다

 

십오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날린 直放人처럼
바닥 밑의 바닥, 과녁 뒤의 과녁을 향해 뛰어내리고 있는

 

이렇게 40년 동안을 뛰어내리고 있는  나는
 

북천 / 유홍준

 

 

  구름 같은 까마귀떼 저 하늘을 쪼았다 뱉는다 하늘밖

에 더 뜯어먹을 게 없는

 

  눈뜨지 마라 파먹을라 동안거에 들어간 하늘의 얼굴이

산비탈처럼 말랐다 두 볼에 골짜기가 패었다 하늘 눈(目)

에서 피가 흐른다 서산마루를 타고 흘러내린다

 

 주둥이마다 피를 묻힌 까마귀들이 앞산 넘어간다 금방,

캄캄해진다

 


 

북천 / 유홍준

 

 

  구름 같은 까마귀떼 저 하늘을 쪼았다 뱉는다 하늘밖

에 더 뜯어먹을 게 없는

 

  눈뜨지 마라 파먹을라 동안거에 들어간 하늘의 얼굴이

산비탈처럼 말랐다 두 볼에 골짜기가 패었다 하늘 눈(目)

에서 피가 흐른다 서산마루를 타고 흘러내린다

 

 주둥이마다 피를 묻힌 까마귀들이 앞산 넘어간다 금방,

캄캄해진다

 

 

식육 코너 앞에서/유홍준

 

 

  XX백화점

  저 식육 코너의 젊은 남자는

  말이 없다 표정이 없다 돼지머리처럼 핏기 없이

  하얗게 면도를 한 얼굴,

  저 무표정은 온종일 칼자루를 움켜쥔 채

  원하는 만큼 제 살점을 끊어 담아준다

  뱃속을 모조리 긁어낸 몸통에서

  뭉텅, 뭉텅, 살덩어리를 떼어내고 또 떼어낸다

  머리도 발도 없는 몸뚱어리에서 떨어져나오는

  저 한 덩어리 고기,

  갈고리에 꿰인 저 돼지는

  네 개의 발을 중심으로 잘리어져 걸렸고

  그대는 4부로 나누어 시집을 엮었다

  아아 저 네 토막 밖

  머릿고기처럼

  납작하고 납작하게 눌려서라도

  말하고 싶다 핏물이 스며나오는 책갈피

  넘길 때마다 핏물이 묻어나오는 시집을 묶어

  팔고 싶다 서점이 아닌 저 식육 코너에서 무표정하게

핏기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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