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워질 때 / 엄원태
금호강 방죽 위를 걷는다
해는 저물었지만
잉크병 같은 박명薄明의 푸른빛이 있다
오래전부터 이 시간을 사랑하였다
강변 풍경엔 뭔지 모를 이끌림 같은 게 있다
어스름이란, 마음에도 그늘처럼 微微한 흔적을 남긴다
강바닥 버드나무들은 언제부턴가 둥근 무덤들을 닮았다
그때 너를 놓아 보냈던 게
내 손아귀 안간힘이 다해서였던가,
생각하면 모래알같이 쓸쓸해지지만 여한은 없다
해오라기 하나 물에 발을 담그고 가만히 있다
저대로 밤이라도 새우려는지,
가슴께에 보드라운 흰 털이 바람에 부스스 일어난다
새들도 저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가졌다
나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본다
버드나무에 걸린 지난 홍수의 비닐조각들은
내 등허리에도 틍증처럼 걸려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미련도 남아 있지 앟다
이제 곧 밤이다
* 2007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중에서
물방울 무덤들 / 엄원태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동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내며
부스러져 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거리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장력처럼 널 만났다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언제까지고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저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귀한 마주침, 텅 빈 충만 / 엄원태
목요일 늦은 오후, 텅 빈 강의실 복도에서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는 청소 아주머니와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자 몸피가 조그만 아주머니는 내게 다소곳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내가 마치 '높은 사람'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공손한 인사. 무슨 종류일지 짐작가는 바 없지 않지만, 아마도 어떤 '결핍'이 저 아주머니 마음에 가득하여서, 마음 자리를 저리 낮고 겸손하게 만든 것이겠다. 저 나지막한 마음의 그루터기로 떠받치고 품어안지 못할 것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일까?
아주머니, 쓰레기들을 일일이 뒤적여 종이며 캔과 병같은 것들을 골라내어 따로 챙긴다. 함부로 버려진 것들에서 '소중한 어떤 것'을 챙기는 사람 여기 있다. 아주머니는 온몸으로, 시인이다.
메간 / 엄원태
메간은 네 살 아이 몸피를 지녔지만 실제 나이는 열 살, 할아
버지 같은 얼굴을 가졌다. 세상에 단 네 명뿐인 희귀병 '프로
제리아’를 앓고 있지만, 아픈 내색 하나 없다. 이제 열세 살이
면 다만 늙어서, 죽어야 한다. 하루를 두 달만큼씩이나 성큼
성큼, 살아갈 터이다.
할아버지 얼굴 메간, 생의 이슥한 골짜기와 깊은 그늘, 일찌
감치 들여다보며 그것들과 함께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고스란히, 아이 마음이다. 아이 마음으로, 죽을
준비가 되어간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굴뚝들 / 엄원태
온산유화공단의 저 굴뚝들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病! 굴뚝들, 지상에서 가장 절실한 모습으로 외팔을 쳐들었다. 가장 높이 쳐들 수 있는 데까지, 저의 가능성과 한계를 다해. 굴뚝들, 제 팔을 너무 쳐든 나머지 한쪽 팔만 남았다. 공장들은 저 굴뚝들 때문에 아주 어깨가 삐딱해지거나, 힘을 다해 용쓰느라 핏줄들까지 툭, 툭, 불거져나온 게다.
불꽃을 태우는 굴뚝도 있다. 낮엔 그저 이글거리는 손짓으로만 보였을 굴뚝 끝의 화염. 밤 되어 어두워지자, 붉고 투명한 불꽃의 손바닥은 더욱 선명하고 애처롭게 흔들린다. 춤추는 불꽃의 손가락들은 파랗게 질려 있기도 하다. 나를 봐주세요! 그대여! 제발, 제발, 하면서.
계간 <시향> 2004년 가을호
저녁
비 그치자 저녁이다 내 가고자 하는 곳 있는데 못 가는 게 아닌데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 저녁이다 저녁엔 종일 일어서던 마음을 어떻게든 앉혀야 할 게다 뜨물에 쌀을 안치듯 빗물로라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리라, 하고 앉아서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 새 저녁이다 종일 빗속을 생각의 나비들,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젖어가는 날개 가진 것들의 젖어가는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저녁이 되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늙어가는 어떤 마음에 다름 아닌 것을…… 뽀얗게 우러나는 마음의 뜨물 같은 것…… 비가 그 무슨 말씀인가를 전해주었나 보다
애월
- 엄원태
하귀에서 애월 가는 해안도로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었다
밤이 짧았단 얘긴 아니다
우린 애월포구 콘크리트 방파제 위를
맨발로 천천히 걷기도 햇으니까
달의 안색이 마냥 샐쭉했지만 사랑스러웠다
그래선지, 내가 널 업기까지 했으니까
먼 갈치 잡이 뱃불들까지 내게 업혔던가
샐죽하던 초생달까지 업혔던가
업혀 기우뚱했던가, 묶여 있던
배들마저 컴컴하게 기우둥거렸던가, 머리칼처럼
검고 긴, 밤바람 속살을 내가 문득 스쳤던가
손톱 반달처럼 짧아, 가뭇없는 것들만
뇌수에 인화되듯 새겨졌던 거다
이젠 백지처럼 흰 그늘만 남았다
사람들 애월, 애월, 하고 말한다면
흰 그늘 백지 한 장, 말없이 내밀겠다
갯우렁 / 엄원태
갯우렁은 연체동물
백합조개를 잡아먹을 때
껍질에 빨판으로 달라붙어 가만히 있다
마치 꼭 껴안고 있는 듯 보일테지만
나중엔 백합조개의 볼록한 이마쯤에
갯우렁은 빨판으로 조개껍질에
드릴로 뚫어놓은 듯 정확한 원형의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몸짓에
집요한 추궁,
뜨거운 궁구가 있었던 것
갯우렁의 먹이사냥에는
가차없는 집중력이 숨어 있다
너를 향한 물컹한 그리움에도
어디엔가 숨겨진 송곳,
숨겨진 드릴이 있을 게다
내 속에 너무 깊어 꺼내볼 수 없는 그대여
내 슬픔의 빨판, 어딘가에
이 앙다문 견고함이 숨어 있음을 기억하라
시집 <물방울 무덤>2007년 창비
무릎을 잊어버린다 / 엄원태
한동안 무릎은 시큰거리고 아파서 내게 각별한 관심
과 사랑을 받아왔다. 아침산책 몇 달 만에 아프지 않게
되자 무릎은 쉽게 잊혀졌다. 어머니는 모시고 사는 우리
부부에게 무관심하고 무뚝뚝하시다. 때로는 잘 삐치시
고 짜증까지 내신다. 어머니 보시기에, 우리가 아프지 않
은 탓일게다. 아직도 삼시 세 끼를 꼭 챙겨드려야 마지
못한 듯 드신다. 어쩌다 외출이 길어져 늦게 귀가하는 날
이면, 그때까지 밥을 굶으시며 아주 시위를 하신다. 어머
니는 우리 부부에게 아픈 무릎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안
깨물어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 아우는 마흔 넘도록 대척
지인 아르헨티나로 멕시코로 홀로 떠돌아다니며 아프
다. 아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각별하시다. 아우는
어머니의 아픈 무릎이다.
* 내리사랑이라고도 했던가. 슬하에서 자란 자식이 성장하여 이제 제 아픈 무릎 같은 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있건만, 그 어머니의 관심은 마흔이 넘도록 이국을 떠도는 아우이다.
어머니에게 아우는 한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나의 무릎 같은 것. 어머니는 제 아픈 무릎을 돌보듯, 아우 걱정이시만, 나는 그런 어머니 깊은 속 마음을 알기에 밉기보다 더욱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
봄에 소박하게 질문하다 / 엄원태
몸 풀린 청량천 냇가 살가운 미풍 아래
수북해서 푸근한 연둣빛 미나릿단 위에
은실삼단 햇살다발 소복하니 얹혀 있고
방울방울 공기의 해맑은 기포들
바라보는 눈자위에서 자글자글 터진다
냇물에 발 담근 채 봇둑에 퍼질고 앉은 아낙네 셋
미나리를 냇물에 씻는 아낙네들의 분주한 손들
너희에게 묻고 싶다, 다만,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산자락 비탈에 한 무더기 조릿대들
칼바람도 아주 잘 견뎠노라 자랑하듯
햇살에 반짝이며 글썽이는 잎, 잎들
너희에게도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폭설과 혹한, 칼바람 따윈 잊을 만하다고
꽃샘추위며 황사바람까지 견딜만하다고
그래서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노래
그 여자는 그의 가슴에 있는 아득한 골짜기를 본다. 그녀는 그 깊은 상처에
제 몸 파묻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깊어지는
그의 아픔, 세상으로 난 길마다 외롭지 않은 곳 없다. 바라볼수록 깊어가는
그의 어둠, 세상의 기름 으로는 불 밝힐 수 없다. 가슴에 박힌 커다란 바위
속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물은 메마르고 바람도 끊긴다. 여자는 이제 그
의 가슴을 열고 햇살이 눈부신 바깥으로 나간다. 세상은 그저 찬란한 눈부
심이다. 그녀는 곧 온몸이 더워지고, 흰이마는 밝게 빛난다. 여자는 노래 부
른다. 한 아픔을 딛고 나와 세상에 부르는 노래는 그렇게 맑고 아름답다.
표충사 가는 길 / 엄원태
여름철 주말이면
표충사 가는 길은 늘 막힌다
햇살 아래 주차장은 삶에서 한참 벗어나 있고
절로 가는 길은 양쪽에 늘어세워진 차들로 비좁다
성긴 참나무숲 그늘의 길가에는
도토리묵, 막걸리, 부침개, 국화빵이며
산나물, 고사리 산초 열매까지
주전부리 먹거리를 파는 아낙네들이
땀을 흘리며 화덕들을 하나씩 끼고 전을 부치고 있다
가다보면 그 아낙네들 팔려는 먹거리들이
질리도록 널려 있다는 느낌이 뜨거운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절로 들어가는 길이 마치 숙변 낀 창자 같다
일주문을 지날 때 근처 숲에서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다리 밑 개울가에서 사람들은 더위에 벗어제치고들 있다
개들이 지쳐 헐떡이며 어슬렁거리고,
늙은 거지 영감님은 대웅전의 부처님들처럼
시주함을 대신한 바가지를 앞에 놓고
반그늘에 앉은 채 러닝 바람으로 참선중이시다
동전 몇 닢이 바가지 속에서 뜨거워져 있다
절에 들 때까지, 삶의 뜨겁고 끈적거리는 욕망은
그렇듯 끈질기게 그대들 발길에 채이며 걸리적거리는 것이다
사천왕문 지나 절에 들어보라, 거기엔
뿌연 햇살로 가득찬 넓은 사각 마당이
깨끗이 비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똥자루가 확, 터지는 느낌 같은 것인데,
해탈, 해탈이란 것이 뭐 그런 것은 아닌지
삶의 묵은 똥자루가 확, 터지는
아름다움에 관하여
수사(修辭)에 갇힌 시인을 안다. 그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어둠을 특유의
꼼꼼하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하나씩 뜯어서는 주변에 뿌리며, 삶을 정리하
고자 하였다. 삶이 굳潁?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자신이 갇혀 있는
세계를 향해 곧잘 욕설을 퍼붓곤 하였다. 나는 그 욕설이 아름다운 修辭가
되기를 꿈꾼 적이 있다.
병원에서, 특히나 응급실 같은 곳에서 술 취한 채 칼에 찔리거나, 사고로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제 상처에 스스로 놀라 내지르는 단말마적인 비
명 소리에서, 비감한 아름다움 같은 것을 느낀다. 깊어진 아름다움, 때로 그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아름답다'라는 말의 어원은 '안다'에서 나왔다고
한다. 우리가 결국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처절하도록 비감한 아름다움을
거기서 쓸쓸히 느껴보는 것은 아닐까?
어떤 연애에 관하여
어릴 때부터 앓아온 만성신부전증으로 인해 열서너살 때 한 차례씩 신장이
식 수술을 받았었고, 불과 몇 개월을 못 견뎌온 거부반응으로 다시 일주일
에 사흘씩 지긋지긋한 혈액투석을 받으며 인공장기에 매달려 파란만장한
병상에서의 사춘기를 고스란히 통과해와, 이제 푸르다는 스물을 갓 넘긴 광
우와 윤희는, 이틀 만에 한 번씩 병원에 올 때마다 마주 보는 침상에 나란히
누워서는 투석기에 매달린 다섯 시간 동안 내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쉬지 않고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대화란 것이 그러나 무
릇 연인들의 속삭임과는 거리가 먼 다소 엉뚱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는 것
이, 윤희가 오랜 약물치료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
인데, 광우가 윤희에게 입모양과 손짓으로 말하면 윤희는 곧잘(제 귀에 들
리지 않으니까) 온 실내가 다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뭐라 뭐라 한참씩을 지
껄이는 것이었으니, 그래서 곧잘 간호사들의 조용 조용하라는 지청구를 듣
곤 하지만......
다른 동료환자들은 속으로 그들의 연애를 짐작했으므로, 아무도 그들이 시
끄럽다고 싫은 내색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연애의 내
용이 그만큼 나이보다 어리기도 하였고 또 보기에 영 서툴렀기도 한 것이어
서, 행여나, 하고 그만 조심하는 마음들이 조금씩 생겼기에 그러하겠지요.
자전차포 김 사장
졸부가 된 사람이 또 하나 있다
천성이 껄렁했던 그는 읍의 종합고등학교를
다니다 말다 하며 시들시들 졸업한 뒤
소위 무위도식배로 청춘을 탕진하고는
늦장가를 들어 아이 둘 낳고 정신을 차릴 때쯤에
부친께서 짓던 논밭들이 구획정리 사업에 편입되면서
환지받은 상가부지에 보상비로 건물을 하나 올리고는
세를 놓아 먹으면서 무위도식의 팔자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는데
이 양반 놀고먹자에 팔자 좋은 몇 년을 보내니
사람들 그저 김씨 김가 부르는 호칭도 맘에 들지 않고
주색잡기에 난봉질도 한 청춘일 터
무엇보다 허구한 날을 심심해서 못 살겠는지라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드디어
가게 한쪽을 비워 자전차포를 차렸는데,
그리하여 자전차포 사장님, 김사장님이 되기는 되었는데
사장님이 된 기념으로다 자가용도 한 대 뽑고
명함도 새로 박고, 개업식도 요란뻑쩍 치렀는데
아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 것들은 자전거도 안 타는지
갖다놓은 자전거는 팔리지 않아 먼지만 쓰고
기껏 동네 아이들 빵구나 때워주고, 떨어진 페달이나 달아줄 뿐
그나마 요즘은 뜸해 그야말로 파리만 날리니
우리 김사장님 무료함을 그 누가 달래줄꼬!
오늘도 우리 김사장님 런닝에 반바지 맨발에
안락의자에 앉아 부채를 든 채 낮잠으로 오후를 보내시는구나
그놈의 파리란 놈들이 우리 사장님 단잠을 방해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오늘도 그리하여 그럭저럭 가고 가는구나
꽃샘바람/엄원태
꽃샘바람이 며칠 불고
나는 메말라 목이 마르다
이 며칠은 속절없이 아프다
그래도 이 한 몸
세상의 바람에 실린 것은
행운이었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는 것을
언제나 뒤늦게야 깨닫는다
봄이 미처 오기 전에
이 며칠은 또 속절없이 앓게 될 것이다
철 이른 황사바람이
코끝에 차고 맵다
눈물어린 풍경을 건너
봄은 산너머 어딘가에 와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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