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시월의 시 류시화

문근영 2008. 11. 14. 02:24

시월의 시 / 류시화


그리고는
가을 나비가 날아왔다

아,
그렇게도 빨리

기억하는가
시월의 짧은 눈짓을

서리들이 점령한 이곳은
이제 더 이상
태양의 영토가 아니다

곤충들은 딱딱한 집을 짓고
흙 가까이
나는 몸을 굽힌다

내 혼은 더욱 가벼워져서
몸을 거의 누르지도 않게 되리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두 사람의 아침 / 류시화 ◈

    나무들 위에 아직 안개와
    떠나지 않은 날개들이 있었다.
    다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었다 오솔길 위로
    염소와 구름들이 걸어 왔지만
    어떤 시간이 되었지만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여기 이 눈을 아프게 하는 것들
    한때 한없이 투명하던 것들
    기억 저편에 모여 지금
    어떤 둥근 세계를 이루고 잇는 것들
    그리고 한때 우리가
    빛의 기둥들 사이에서 두 팔로
    껴안던 것들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한때 우리가 물가에서
    귀 기울여 주고받던 말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고

    새와 안개가 떠나간
    숲에서 나는 걷는다 걸어가면서
    내안에 일어나는 옛날의 불꽃을
    본다 그 둘레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숲의 끝에 이르러
    나는 뒤돌아 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안의 물고기 한 마리 / 류시화 ◈

      나는 내안에 물고기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물고기는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내안의 푸른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고
      때로는 날개없이 하늘을 날기도 한다.

      물이 부족하면 나는 물을 마신다.
      내안의 물고기를 위해
      내가 춤을 추면 물고기도 춤을 춘다.

      내가 슬플 때 물고기는 돌틈에 숨어
      눈을 깜박이지도 않은 채 나를 응시한다.

      모든것으로 부터 달아난다 해도
      나 자신으로 부터는 달아날 수 없는거
      날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내안의 물고기를 행복하게 하는일

      나는 내안에 행복한 한 마리 물고기를 키우고 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시월 / 류시화 ◈

      잎사귀들은 흙 위에 얼굴을 묻고
      이슬 얹혀 팽팽해진 거미줄들
      한때는 냉정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럴수록 눈물이 많아졌다.
      이슬 얹힌 거미줄처럼
      내 온 존재에
      눈물이 가득 걸렸던 적이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길 위에서의 생각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 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 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간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 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 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 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 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버릴 수 있다면



                   류시화



      누가 말했었다.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면 고통도 그리움도 추억도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꽃들은 왜 빨리 피었다 지는가.

      흰 구름은 왜 빨리 모였다가 빨리 흩어져 가는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가 너무도 빨리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 것들.



      들꽃들은 왜 한적한 곳에서

      그리도 빨리 피었다 지는 것인가.

      강물은 왜 작은 돌들 위로 물살져 흘러내리고

      마음은 왜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가.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누구든 떠나갈 때는

                     류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봄이 아니라도
      저 빛 눈부셔 하며 가자


      누구든 떠나갈 때는
      우리 함께 부르던 노래
      우리 나누었던 말
      강에 버리고 가자
      그 말과 노래 세상을 적시도록


      때로 용서하지 못하고
      작별의 말조차 잊은 채로
      우리는 떠나왔네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네


      누구든 떠나갈 때는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가자
      지는 해 노을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잊었는가 우리가



                      류시화



      잊었는가 우리가 손잡고
      나무들 사이를 걸어간 그 저녁의 일을

      우리 등뒤에서 한숨 지며 스러지던

      그 황혼의 일을

      나무에서 나무에게로 우리 사랑의 말 전하던

      그 저녁 새들의 일을



      잊었는가 우리가 숨죽이고

      앉아서 은자 처럼 바라보던 그 강의 일을

      그 강에 저물던 세상의 불빛들을

      잊지 않았겠지 밤에 우리를 내려다보던

      큰곰별자리의 일을, 그 약속들을

      별에서 별에게로 은밀한 말 전하던

      그 별똥별의 일을



      곧 추운 날들이 시작되리라

      사랑은 끝나고 사랑의 말이 유행하리라

      곧 추운 날들이 와서

      별들이 떨어지리라

      별들이 떨어져 심장에 박히리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집을 떠나 길 위에 서면
      이름없는 풀들은 바람에 지고
      사랑을 원하는 자와
      사랑을 잃을까 염려하는 자를
      나는 보았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길은 또다른 길로 이어지고
      집을 떠나 그 길 위에 서면
      바람이 또 내게 가르쳐 주었네
      인간으로 태어난 슬픔을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자와
      이제 막 태어나는 자
      삶의 의미를 묻는 자와
      모든 의미를 놓아 버린 자를
      나는 보았네

      길가는 자의 노래-류시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민들레 / 류시화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슬픔은 왜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슬프지 않는 것일까
      민들레 풀씨처럼
      얼마만큼의 거리를 갖고
      그렇게 세상 위를 떠다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

       

       

      첫사랑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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