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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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을 잃고 그는 울면서 찬밥을 먹는다. 손님이
적은 날은 버릴 수 없어서, 그렇지 않은 날은 남편
몫으로 퍼놓은 밥을 먹는다. 한번은 자신의 입맛으로,
새참은 남편의 식성으로 눈물 떨군다. 그가 살집에
갇힌 까닭도 그리움이고, 그가 풀려나올 수 있는
방법도 사랑이다. 뚱뚱한 세 딸 모두 엄마의 체질을
투덜거리지만 아버지가 보고플 때마다 그들도 밥을
먹는다. 사람들은 그 집을 살찌는 집이라 부르며
간혼 그의 살집에 갇히면 좋겠다 큰소리친다. 하지만
옛사랑은 너무 뚱뚱해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살찌는 집에 가면 슬픔도 비벼 먹을 수 있음을 알게 되고
살이 되는 눈물이 든든해진다.
찬밥 가득한 그의 몸은 보온 밥통이다.
눈물 젖은 손으로는 플러그를 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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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무를 꺼내다 / 이정록
무값이 똥값이라
밭 가운데 무를 묻었다
겨울에만 생겼다 없어지는 무덤
봄이 될 때까지 수없이 도굴당하는 무덤
절만 잘하면 무를 덤으로 주는 무덤 밭 한가운데에
겨우내 절을 받는 헛묘 하나 눈 맞고 있다 저 묘 속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얼마나 많이 머리를
들이 미셨던가, 그 누가 시퍼렇게 살아있기에
한 집안의 머리채를 모조리 다 잡아 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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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록
양수를 여섯 번이나 담았던
당신의 아랫배는
생명의 곳간, 옆으로 누우면
내가 제일 고생 많았다며
방바닥에 너부러진다
긴장을 놓아버린 아름다운 아랫배
누가 숨소리 싱싱한 저 방앗간을
똥배라 비웃을 수 있는가
허벅지와 아랫배의 터진 살은
마른 들녘을 적셔 나가는 은빛 강
깊고 아늑한 중심으로 도도히 흘러드는
눈부신 강줄기에 딸려들고파
나 문득 취수장의 물처럼 소용돌이친다
뒤룩뒤룩한 내 뱃살을
인품인 양 어루만지는 생명의 무진장이여
방바닥도 당신의 아랫배에 볼 비비며
쩔쩔 끊는다
희망의 거처 / 이정록
옥수숫대는
땅바닥에서 서너 마디까지
뿌리를 내딛는다
땅에 닿지 못할 헛발일지라도
길게 발가락을 들이민다
허방으로 내딛는 저 곁뿌리처럼
마디마다 맨발의 근성을 키우는 것이다
목 울대까지 울컥울컥
부젓가락 같은 뿌리를 내미는 것이다
옥수수밭 두둑의
저 버드나무는, 또한
제 흠집에서 뿌리를 내려 제 흠집에 박는다
상처의 지붕에서 상처의 주춧돌로
스스로 기둥을 세운다
생이란,
자신의 상처에서 자신의 버팀목을
꺼내는 것이라고
버드나무와 옥수수
푸른 이파리 눈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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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뒤 / 이정록
소나기가 안마당을 두드리고 지나가자 놀란 지렁이 몇 마리가 대문 쪽으로 서둘러 기어간다 방금 알을 낳은 암탉이 성큼성큼 뛰어와 지렁이를 삼키고선 연필을 다듬듯 바닥에 부리를 문지른다
천둥번개에 비틀거리던 하늘이 그 부리 끝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는다 개구리 한 마리를 안마당에 패대기친 수탉이 활개치며 울어 제치자 울밑 봉숭아며 물앵두 이파리들이 빗방울을 내려놓는다 병아리들이 엄마 아빠를 섞어 부르며 키질 위 메주콩처럼 몰려다닌다
모내기 중인 무논의 물살이 파르라니 떨린다 온 몸에 초록 침을 맞는 무논의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다 침 맞는 자리로 구름 몇이 다가온다 개구리의 똥꼬가 알 낳느라고 참 간지러웠겠다 암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논 쪽을 내다본다
나무기저귀 / 이정록
목수는
대패에 깎여 나오는
얇은 대팻밥을
나무기저귀라고 부른다
천 겹 만 겹
기저귀를 차고 있는,
나무는 갓난아이인 것이다
좋은 목수는
안쪽 젖은 기저귀까지 벗겨내고
나무아기의 맨살로
집을 짓는다
발가벗은 채
햇살만 입어도 좋고
연화문살에
때때옷을 입어도 좋아라
목수가
숲에 드는 것은
어린이집에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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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의 상처 / 이정록
삽날에 잘린 눈사람을 어루만진다
삽질 속에 결을 만들어놓은 흙 부스러기
때문에, 삽날이 지나간 자리가 꽃등심처럼 곱다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등을 찍혔는데도 무늬를 보여주는 눈사람
저 흙길을 따라가면 서걱서걱 기저귀 얼어 있던 안마당
또 배가 불러오던 어머니를 만날 것 같다
마음 짠해서 어둠을 밝히는 눈송이들
왱이낫이 박힌 옹이 많은 옛길을 덮는다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겹겹 붕대를 두른다
삽날이 지나간 눈사람, 그 흙밥의 나이테를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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