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의자 / 이정록

문근영 2008. 11. 8. 00:21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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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찌는 집] 이정록

슬픔은 살이 된다

신랑을 잃고 그는 울면서 찬밥을 먹는다. 손님이
적은 날은 버릴 수 없어서, 그렇지 않은 날은 남편
몫으로 퍼놓은 밥을 먹는다. 한번은 자신의 입맛으로,
새참은 남편의 식성으로 눈물 떨군다. 그가 살집에
갇힌 까닭도 그리움이고, 그가 풀려나올 수 있는
방법도 사랑이다. 뚱뚱한 세 딸 모두 엄마의 체질을
투덜거리지만 아버지가 보고플 때마다 그들도 밥을
먹는다. 사람들은 그 집을 살찌는 집이라 부르며
간혼 그의 살집에 갇히면 좋겠다 큰소리친다. 하지만
옛사랑은 너무 뚱뚱해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살찌는 집에 가면 슬픔도 비벼 먹을 수 있음을 알게 되고
살이 되는 눈물이 든든해진다.

찬밥 가득한 그의 몸은 보온 밥통이다.

눈물 젖은 손으로는 플러그를 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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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무를 꺼내다 / 이정록

 

 

                             무값이 똥값이라

                       밭 가운데 무를 묻었다

                   겨울에만 생겼다 없어지는 무덤

                봄이 될 때까지 수없이 도굴당하는 무덤

            절만 잘하면 무를 덤으로 주는 무덤 밭 한가운데에

         겨우내 절을 받는 헛묘 하나 눈 맞고 있다 저 묘 속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얼마나 많이 머리를

     들이 미셨던가, 그 누가 시퍼렇게 살아있기에

   한 집안의 머리채를 모조리 다 잡아 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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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록

 

양수를 여섯 번이나  담았던

당신의 아랫배는

생명의 곳간, 옆으로 누우면

내가 제일 고생 많았다며

방바닥에 너부러진다

긴장을 놓아버린 아름다운 아랫배

누가 숨소리 싱싱한 저 방앗간을

똥배라 비웃을 수 있는가

허벅지와 아랫배의 터진 살은

마른 들녘을 적셔 나가는 은빛 강

깊고 아늑한 중심으로 도도히 흘러드는

눈부신 강줄기에 딸려들고파

나 문득 취수장의 물처럼 소용돌이친다

뒤룩뒤룩한 내 뱃살을

인품인 양 어루만지는 생명의 무진장이여

방바닥도 당신의 아랫배에 볼 비비며

쩔쩔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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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거처 / 이정록

 

옥수숫대는

땅바닥에서 서너 마디까지

뿌리를 내딛는다

땅에 닿지 못할 헛발일지라도

길게 발가락을 들이민다

 

허방으로 내딛는 저 곁뿌리처럼

마디마다 맨발의 근성을 키우는 것이다

목 울대까지 울컥울컥

부젓가락 같은 뿌리를 내미는 것이다


옥수수밭 두둑의

저 버드나무는, 또한

제 흠집에서 뿌리를 내려 제 흠집에 박는다

상처의 지붕에서 상처의 주춧돌로

스스로 기둥을 세운다


생이란,

자신의 상처에서 자신의 버팀목을

꺼내는 것이라고

버드나무와 옥수수

푸른 이파리 눈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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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뒤 / 이정록

                       
 소나기가 안마당을 두드리고 지나가자 놀란 지렁이 몇 마리가 대문 쪽으로 서둘러 기어간다 방금 알을 낳은 암탉이 성큼성큼 뛰어와 지렁이를 삼키고선 연필을 다듬듯 바닥에 부리를 문지른다

 

  천둥번개에 비틀거리던 하늘이 그 부리 끝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는다 개구리 한 마리를 안마당에 패대기친 수탉이 활개치며 울어 제치자 울밑 봉숭아며 물앵두 이파리들이 빗방울을 내려놓는다 병아리들이 엄마 아빠를 섞어 부르며 키질 위 메주콩처럼 몰려다닌다

 

  모내기 중인 무논의 물살이 파르라니 떨린다 온 몸에 초록 침을 맞는 무논의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다 침 맞는 자리로 구름 몇이 다가온다 개구리의 똥꼬가 알 낳느라고 참 간지러웠겠다 암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논 쪽을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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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기저귀 / 이정록  

            

목수는
대패에 깎여 나오는
얇은 대팻밥을
나무기저귀라고 부른다

 

천 겹 만 겹
기저귀를 차고 있는,
나무는 갓난아이인 것이다

 

좋은 목수는
안쪽 젖은 기저귀까지 벗겨내고
나무아기의 맨살로
집을 짓는다


발가벗은 채
햇살만 입어도 좋고
연화문살에
때때옷을 입어도 좋아라

 

목수가
숲에 드는 것은
어린이집에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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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의 상처 / 이정록


삽날에 잘린 눈사람을 어루만진다

삽질 속에 결을 만들어놓은 흙 부스러기

때문에, 삽날이 지나간 자리가 꽃등심처럼 곱다

아름다운 것이 이렇게 무서울 수가 있구나

등을 찍혔는데도 무늬를 보여주는 눈사람

저 흙길을 따라가면 서걱서걱 기저귀 얼어  있던 안마당

또 배가 불러오던 어머니를 만날 것 같다

마음 짠해서 어둠을 밝히는 눈송이들

왱이낫이 박힌 옹이 많은 옛길을 덮는다

아물지 않은 상처 위에 겹겹 붕대를 두른다

삽날이 지나간 눈사람, 그 흙밥의 나이테를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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