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문근영 2008. 11. 8. 07:22

가난한 사랑 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현대불교문학상 제6회 시부분 수상자 수록작품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시집 "무량한 소리"[도서출판 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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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裸木)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트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경림 시전집2 "쓰러진 자의 꿈"[창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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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신 경 림

 

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썩고 병든 것들을 뿌리째 뽑고

너절한 쓰레기며 누더기 따위 한파람에 몰아다가

서해바다에 갖다 처박는

보아라, 저 엄청난 힘을.

온갖 자질구레한 싸움질과 야비한 음모로 얼룩져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벌판을

검붉은 빛깔 하나로 뒤덮는

들어보아라, 저 크고 높은 통곡을.

혁명은 있어야겠다

아무래도 혁명은 있어야겠다.

더러 꼿곳하게 잘 자란 나무가 잘못 꺾이고

생글거리며 웃는 예쁜 꽃목이

어이없이 부러지는 일이 있더라도,

때로 연약한 벌레들이 휩쓸려 떠내려가며

애타게 연약한 벌레들이 휩쓸려 떠내려가며

애타게 울부짖는 안타까움이 있더라도,

그것들을 지켜보는 허망한 눈길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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