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서랍 ....... 강연호
이제는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자신했던
아픈 기억들 바늘처럼 찔러올 때
무수히 찔리면서 바늘귀에 매인 실오라기 따라가면
보인다 입술 다문 마음의 서랍
허나 지금까지 엎지르고 퍼담은 세월 적지 않아서
손잡이는 귀가 빠지고 깊게 패인 흠집마다 어둠
고여 있을 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뻑뻑한 더께 쌓여 있는 걸까
마음의 서랍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워
나는 어쩔 줄 모른다 거기 뒤죽박죽의 또 한 세상
열면 잊혀진 시절 고스란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는 동안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벨이 울려
아무도 수신하지 않는 그리움을 전송하는 소리 적박하다
나야, 외출했나보구나, 그냥
걸어봤어,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야,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신호음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마냥 낯설기만 한
마음의 서랍 끝내 열어보지 못한다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금지의 팻말 걸린 문 앞에
서성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는
대낮에도 붉은 등 켜고 앉아 화투패 돌리며
쉬어가라고 가끔 고개 돌려 유혹하는 여자들의 거리에
와 있는 것만 같아 안절부절이다 순정만화처럼
고만고만한 일에 울고 웃던 날들은 이미 강 건너
어디 먼 대양에라도 떠다니는지
오늘 풍랑 심하게 일어 마음의 서랍 기우뚱거리면
멀미 어지러워 나도 쓸쓸해진다 언젠가
뭘 그렇게 감춘 것 많냐고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나조차 열어보지 못한 마음의 서랍
우격다짐으로 열어본 사람들 기겁하여 도망치며 혀차던
마음의 서랍은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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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 강연호
그는 지금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더는 밀려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이제 박차고 일어설 일만 남은 것 같다
들끓는 세상이 잠시 식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갈증은 그런 게 아니다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
여기가 바로 밑바닥이구나 싶을 때
바닥은 다시 천길 만길의 굴욕을 들이민다는 것을
굴욕은 굴욕답게 캄캄하게 더듬어 온다는 것을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어보지만
스스로를 달래기가 그렇게 쉬운 게 정말 아니다
그는 바닥의 실체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골똘히 생각해온 듯하다
그렇다고 문제의 본질에 가까워진 것은 아니지만
바닥이란 무엇인가
털썩 주저앉기 좋은 곳이다
물론 그게 편안해지면
진짜 바닥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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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다 / 강연호
솥뚜껑 위의 삼겹살이 지글거린다고 해서
생의 갈증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찍 취한 사람들은 여전히 호기롭다
그들도 박박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남루나 불우를 그저 견디겠다는 듯
반쯤 남은 술잔은 건너편의
한가로운 젓가락질을 우두커니 바라볼 뿐
이제 출렁거리지도 기울어지지도 않는다
참다 참다 그예 저질러버린 생이 있다는 듯
창 밖으로 지그시 내리는 빗줄기
빨래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고
쌀알을 펼쳐본들 점괘는 눅눅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마
이 밤이 지나가면 냉장고의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야 할 새벽이 온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어쩌면 이 술잔은
여기 이 생에 건네질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삼겹살을 뒤집어봐야 달라질 것 없고
희망은 늘 실날같지만
오늘의 운세는 언제나 재기발랄 명쾌하다
62년생 범띠, 살다 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다
가변차선의 날들
아이들이 초인종을 누르고 달아난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서는 오지 않는 날들
죄다 불러들여 같이 놀고 싶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을 신호 하나로 바꾸는
가변차선의 날들은 없는 걸까
가령 세월이 회전문이라면
밀리고 밀려봐야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일 수는 없는 걸까
엉킨 마음만 벌집 주위를 잉잉거려
문을 꽝 닫는다 가동 808호
뒤통수로 문패가 싱겁게 떨어진다
이제 나는 주소불명이며 신원미상이다
신문도 사절이다 입술 앙다물지만
아이들이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 달아난다
가지 마
감옥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 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난 가로등이나 공원 의자 근처
그는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강
저 강물
내가 반쯤은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저 강물
그대도 반쯤 건넜다고 생각했지요
그대가 반 내가 반 건너면
우리 강물 한 가운데서 만나
더 큰 강물되어 흐를 수도 있었으련만
돌아보면 저 강물
우리 다만 자리 바꾸었을 뿐
이쪽과 저쪽 엇갈린 채 저 강물
까마득히 손짓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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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빛
우듬지에 겨울 햇살이 이명처럼 매달려 있다
초록이 없으므로 더이상 햇살은 빛나지 않는다
나무는 제 발치께를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발로 쓸어모으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허전한 법이다
한때 웅숭깊었던 그늘의 넓이를 가늠하며
나무는 체온계를 문 아이처럼 생각에 잠긴다
텅 빈 고요가 압박붕대에 묶인 허리춤을 더듬는다
동그랗게 말린 이파리 몇 장이 마저 떨어져
이미 탕진한 삶을 둔탁하게 덧칠한다
저 잎들이 움켜쥔 허공조차 내 몫이 아니었구나
바람도 없는데 나무는 진저리 친다
나뭇잎 대신 이명의 햇살이 떨어져내린다
그늘이 있던 자리를 비춘다 배추 속같이 환하다
나무를 지탱하는 힘은 이제 고요가 아니다
9월도 저녁이면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 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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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의 끝
이른 봄날 그 여자
길 위에 있네
화장이 조금씩 밀리는 나이
철 지난 단풍같이 차려입고 그 여자
갈 길은 떠밀듯
지나온 길은 떠메듯 걸어가네
시선 미치는 곳까지는
인연도 닿으리
마음 한 자락 애써 움켜쥐고
그 여자 입술 깨무네
국도 끊어지면 발길 돌려야 하나
이대로 저기 산에나 들까
망설여지면 그 여자
잠시 멈추어 화장을 고치네
하지만 누가 먼저 들어 헤매는지
산은 자꾸 뒤로 물러설 뿐
그 여자 거부당하네
가까운 비탈마다 누운
높거나 낮은 봉분의 생애처럼
그 여자 출렁거리네
이른 봄날
집도 절도 없이 그 여자
길 위에 있네
그대 있어야 할 자리에 2
집 밖에 행상트럭이 와서 낮잠을 깨웠습니다 알타리 무우가 왔습니다 얼
갈이 배추가 왔습니다 마늘 상추 쑥갓이 왔습니다 감자 양파 부추가 왔습니
다 시금치 오이 깻잎도 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다림이 왔습니다 신이난 확
성기 소리가 얼핏 낮잠을 깨웠습니다 그대도 그렇게 잠 깨우듯 오실 건가요
지금 어디쯤 오고 계시는 중인가요 언제라도 그대 오시기는 오실 건가요 그
립고 슬픈 생각에 다시 잠들지 못했습니다 돌아누우면 왼쪽 눈에서 흐른 눈
물이 콧등을 타고 넘어 오른족 눈에서 흐른 눈물과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눈
물과 눈물이 만나듯 그대 만나고 싶었습니다 집 밖에 행상트럭이 와서 낮잠
을 깨우고 눈물을 깨우고 세상의 모든 기다림을 깨웠습니다
기억에서
기억하지만
도시는 쓸쓸했고 젊음은 배반이었네
승냥이 울음 같은 경적을 울리며
복면 쓴 자동차가 지나갔네
담뱃진에 짓이겨진 낙엽들이
여기저기서 비명횡사했네
흥건한 핏덩이가 하늘까지 튀어
충혈된 조각달로 꽂혀 있었네
얇게 저며진 고깃점들은
발 동동 구르며 막차를 기다렸네
공장 폐수에 절은 안개가
창백한 두 뺨 위로 흘러내렸네
밤새도록 마셔도 갈증은 송곳처럼
폐부를 찌르고 달아났네
새벽마다 구토의 비등점을 향해
머리 깎인 가로수는 고래고래 소리질렀네
정수기에 싹둑 거세된 물 분자는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네
꺼억꺼억 트림과 함께 뛰쳐나온 내장들이
하수구마다 집결하여 행패부렸네
아, 다음날 늦잠을 깨면
천년 뒤에도 썩지 않을 것 같은
저 방부 처리된 절망의 눈부신 반짝임
도시는 언제나 쓸쓸했고
젊음은 노상 배반이었네
그 기억을 내 황홀히 기억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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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누구나 그렇듯이
더러 잠들고 싶지 않은 밤은 있다
하얗게 지새운다는 말뜻 그대로
창틀에 턱을 괸 채 골똘해지고 싶은 밤은 있다
멀리 나간 마음은 퉁퉁 불어터져
어둠 속에 익사하는데 우수수
별들은 쏟아져 손톱 밑에서 으깨지는데
미처 걷지 못한 밤빨래는
언제나 죽음처럼 펄럭이는데
진저리치는 전신주의 늑골마다
바람은 사무치게 훑어가는데
누구나 그렇듯이
비듬처럼 쏟아지는 잠꼬대를 또박또박
받아적고 싶은 밤은 있다
한번 잠들면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는
그런 밤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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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가방
마지막으로 빈 가방을 버리기 전에 그는 무엇을 버렸을까
그가 버린 게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빈 가방을 버리기 전에 먼저 버린 것이 있을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언제나 가득 차고 무거웠던 그의 가방은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비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버린 것들 중에는
물론 그가 버리고 싶어서 버린 것도 있겠지만
세상에는 버리고 싶지 않아도 버려야만 하는 것이 있고
삶이란 또한 꼼꼼히 챙겨도 조금씩 새어나가게 마련이므로
불룩하던 그의 가방은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방이 가벼워질수록 그의 어깨는
웬일인지 자꾸 쳐지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마침내 더이상 버릴 것 없어 가방이 텅 비었을 때
그는 결국 마지막으로 빈 가방을 버렸을 것이다
아니 지금 남은 것은 빈 가방이고 그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빈 가방 대신 그 자신을 버린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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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밑바닥 상처는 고요한 법이라고
나 어느 날 무심코 중얼거렸네 강물 위
빗방울에 흔들리는 무수한 파문처럼
사소하게 가슴 다치면서 살아왔는데
하지만 그것도 아파서 자주 엄살 떨었는데
저 파문 이는 강물의 표면
한없이 부드러운 물살도 제 힘 다해
빗방울 튕겨내는 걸 보았네
깊은 속내까지는 덧내지 않으려
멈칫멈칫 맺혔다 풀리는 동심원을 보았네
이 사내 저사내 다 받아주는 작부의 자궁 속에도
딱딱한 각질처럼 굳은 순정 하나는 있어
열리지 않고 끝내 고요하리라
나는 너무 쉽게 가장했나 보네
돌아보면 한 뼘도 못 되는 길을 걸어오면서
상처 아닌 상처를 들쑤셨더랬네
그 길의 상처에 빚 갚을 일 많았네
나 어느 날 강물 위 무수한 파문을 따라가다
무심코 중얼거림에 걸려 넘어졌지만
가슴 밑바닥 돌쩌귀처럼 박힌 상처는
꿈쩍도 않고 고요했네 이상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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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길
신발 문수를 잊어버린 지 오래다
나는 늘 발이 아파서 업어줘 업어줘 칭얼거렸지만 이 길을 어찌 다 지우랴
문득 길이 너무 멀어 둘러보면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아니 바로 말하자
나는 혼자가 되어서야 겨우 둘러보았구나
너무 늦은 것이다
아니 정말 바로 말하자
나는 처음부터 없는 길을 애써 내고 싶었구나
없는 길이 어찌 나를 업어주랴
번지 점프에 목숨을 매단 사람들,
누구나 때로는 생애를 저렇게 던져버리고 싶어하는구나
그때마다 저 밧줄 끊어졌으면 제발 끊어졌으면, 부들부들 떨며 대신 빌고
있는 빌어먹을 나를 본다
여자애들이 놀이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다
아직도 저런 놀이를 하나? 무심코 호주머니에 손이 간다
어라, 내 도루코 면도칼이 어디 갔지?
어렸을 때 언젠가 동시 상영의 전단지를 뿌리며 달려가던 자동차를 쫓아갔
다가 길 잃은 적이 있다
영화 같은 삶에 길들여지면 집에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 너무 일찍 알았구
나
집은 내 발목에 걸린 밧줄이었다
발목에 감겨 엉킨 길, 이 실타래를 끊지 못하면 영영 지나갈 수 없다
하지만 집이 없다면 처음부터 길도 없다는 것을, 집이 길을 만들었다는 것
을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엄마를 기다리다 허기마저 지친 오후
방죽 너머 긴 머리채를 푸는 산그늘이 서러워질 때
언젠가 무작정 상경하고 싶었지만 갈 곳 몰라
이름 모를 역광장에 입간판처럼 서 있을 때
어느 새 조약돌만큼 자란 목젖이 싫어
겨울 다 가도록 목도리를 풀지 않고 상심할 때
쉽게 다치는 내성의 한 시절을 조용히 흔들며
가만가만 가지마다 둥지를 트는 속삭임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내가 실연의 강가에서 하염없이 출렁거리는
작은 배 한 척으로 남아 쓸쓸해질 때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은 도무지
누군가 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 줄 모른다며
알면서도 모른 척 무시한다며 야속해질 때
그래, 비밀같은 바람소리였네 숨 죽여 들을수록
낮아져 하마 끊길 듯 이어지는 다독거림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허나 운명은 언제나 텅 빈 복도를 울리며
뚜벅뚜벅 걸어와 벌컥 문을 열어젖히는 법이네
다짜고짜 따귀를 후려치고 멱살 낚아채
눈 가리고 어디론가 무작정 끌고가는 것이네
내 어느 날 문득 더 자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묵념처럼 세상은 함부로 권태로워지고
더 이상 간직할 슬픔 하나 없이 늙어가는 동안
옛날에 나무에 스치며 나를 키우던 바람소리
다시는 듣지 못했네
들을 수 없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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