쳐들어오는 봄 / 김정희
봄은 그 때
마루 끝에 앉은 고양이 이마에서 막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햇빛을 씹고있는 그 놈의 반쯤 닫힌 눈동자를 지나
겨드랑이를 비집고 나온 붓꽃잎을 지나
쪽마루 결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는데
몸살처럼 오소소 번지고 있었는데
바위들이 몸을 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반짝이며 흘러나왔다
새끼 밴 까만 쥐들이 오목눈이새들이 불개미떼가
나는 그 속으로 아픈 몸을 구겨 넣었다
누워서
햇빛들이 두런거리는 소리 들었다
목련 우듬지를 거슬러 오르는 물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방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리곤
속절없이 쳐들어오는 봄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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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삼월 하순경 / 김정희 간밤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목련꽃 모가지들이 斬首를 당했다
나뭇가지들만 멀뚱하니 서서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 모가지들 하나 하나 날아갈 때마다
흰 피가 솟구쳐 올랐을 거다
캄캄한 허공에서 소용돌이쳤을 거다
어둠이 흰 피로 얼룩진 채 돌아갔을 거다
누가 와서 그들의 목을 베었을까
바람이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 그랬을까
아니면 가지 속에 숨어있던 자객의 짓이었을까
봄이 일으켜놓은 목숨들을 뎅강 뎅강 쳐낸 그는
누구일까
청소하는 손길이 와서 모가지들을 거두어 간다
전봉준의 모가.......................지가..........................최
시형의......................이차돈의 모가지...............무명
으로 죽어간 A, B, C............................모가지들이
커다란 비닐봉투 안에 뒤엉켜 있다
못에 걸린 아버지 / 김정희
아버지가 후줄근하게 못에 걸려있네
목은 없이 팔 다리만 축 늘어진, 그
못에 걸린 아버지가 잠꼬대를 하네
거대한 바람벽이 턱 턱 그를 가로막네
너무도 완강하게 박힌 못과
너무도 헐렁헐렁한 아버지
허수아비 하나
잠언처럼 걸려있는 저 대못 위로
밤이 훌쩍 지나가고 있네
철둑길을 흔드는 / 김정희
도원동 철둑길 가
반 뼘 땅뙈기에 배추꽃들 피었드라
그것들
봄바람을 붙드느라 여념이 없드라
노란 배추꽃 속으로 철겅
철겅 철겅 전철이 지나 가드라
전철만큼이나 긴 소리가
꽃대궁 속으로 흘러들어 가더라
하늘이 꽃보다 노오래지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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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 / 김정희
난데없는 소나기가 거리를 습격하네
양파장수 노파 양파자루를 끌어안고 지하도 입구로 뛰어드네
거친 빗줄기에 지하도 층계가 마구 밀려 내려가네
노파가 헛발을 딛네 비명소리 층계 끝으로 곤두박질치네
몸에서 뭉글뭉글 영산홍이 피어나네
수천의 꽃잎들 타오르네
푸드덕, 허구렁 속에서 까마귀 한 마리 솟구쳐 올라, 지하도가
술렁거려, 수만 겹의 떨림, 진저리치는 입들, 붉은 층계들이
층층층 밀려와, 끊임없이 터지는 까마귀 울음소리, 사람들
고막을 떼어버려, 노파가 딛고 온 발자국들 빗물에 쓸려 내려가,
고요한 몸, 타오르는 영산홍 속에서 층계가 푸드덕, 날아 올라
앰뷸런스에 한 生이 실려가네
순식간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그것은
비는 사라지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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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 / 김정희
누워서
마루 깊숙이 들어와 노는 햇볕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너와 여행가고 싶어
어느 봄이 말한다
장롱 안의 옷들과 가방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신발이 귀를 세우고
가슴속에서 화석이 되어가던 숱한 길들이 출렁출렁
간이역을 매달고 달리던 기차소리 아득하게 날자
깨어나는 몇몇 절간들
푸릇한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강물 강물
우포라나 감포라나 부다페스트 하노이 DMZ라나
하는 것들이
봄꽃송이들처럼 터진다
마루는 순식간에 아 수 라
몽매한 봄아
무시로 아우성치는 통증들은 어디다 두고
저렇게
허공을 트느라 가쁜 숨 몰아쉬는 목련 빛들은
또 어디에다 걸어두고
떠나자는 것이냐
내 길들은 접힌 지 오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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