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을
기형도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볕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린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몆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 번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칙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들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 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말없이 우산처럼 펼처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는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빠르게 스처가는 일상의 공포
보여다오.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있는 그대여
오후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거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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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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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내
영혼이 타오르는 날이면
가슴앓는 그대 정원에서
그대의
온 밤내 뜨겁게 토해내는 피가 되어
꽃으로 설 것이다.
그대라면
내 허리를 잘리어도 좋으리.
짙은 입김으로
그대 가슴을 깁고
바람 부는 곳으로 머리를 두면
선 채로 잠이 들어도 좋을 것이다.
- 기 형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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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한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기 형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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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 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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專門家
이사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
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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