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행군
고영민
설악산과 오대산에서 시작된 단풍
잎새 가득 꽉 채운 붉음의 완전군장으로
10월 5일 치악산을 거쳐
8일 지리산으로 남하한다
단풍은 하루에 남쪽으로 약 25킬로미터씩
능선을 타고 이동한다
무장공비처럼 빠르다
등산로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일사불란한
군홧발 소리
10월 중순에 속리산, 계룡산, 가야산,
내장산, 무등산을 거쳐
10월말과 11월 초에 이르면
전남 해남 두륜산과 제주도 한라산에 닿아
온 산하를 핏빛으로 무장해제 시킨다
남녘 끝 산정에 올라서서
외치는 저 붉음, 피 끓는 소리
조국통일 만세! 조국통일 만세
-고영민 시집 <악어>, 실천문학사, 2005.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단풍에 관한 많은 시들 중에서 이 시가 생각난다면 그것은 소재나 발상의 참신함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 전체가 서서히 단풍 드는 것을 보며 “잎새 가득 꽉 채운 붉음의 완전군장으로” “남하한다”고 말한다. 날짜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실감을 더하고, “하루에” “약 25킬로미터씩” “이동”하는 거리가 있어 속도감이 느껴지고, “등산로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일사불란한/군홧발 소리”까지 청각을 자극해 여러모로 실감에 실감을 더한다. 마침내 “한라산”까지 가서 “온 산하를 핏빛으로 무장해제시킨” 후 “조국통일만세! 조국통일만세!”를 “피 끓는 소리”로 “외치는 저 붉음”을 본다.
이 시를 보면서 대번에 직감하는 것은 시대를 잘 만났다는 우스운 생각이다. 그 옛날 서슬 퍼렇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이 시를 쓴 시인은 물고를 단단히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농을 하고 싶어진다. “능선을 타고 이동”하는 “무장공비”며 “일사불란한/군홧발 소리”며 “온 산하를 핏빛으로 무장해제시”키는 표현이 그렇다. “남녘 끝 산정에 올라서서” “피 끓는 소리”로 “조국통일 만세! 조국통일만세!”를 “외치는” 것은 더욱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집을 읽은 사람으로서 고영민 시인의 시풍을 알기에 사상보다는 단풍에 관한 실감나는 묘사로 수긍하며 재미있게 읽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단풍의 남하에 대해 이처럼 실감나게 표현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 재미를 수긍하다보니 다른 재미 하나가 떠오른다. ‘단풍이 남하’한다면 ‘꽃은 북진’한다는 것. 매년 봄마다 남쪽에서 시작한 꽃소식이 북으로 북으로 “천리행군”을 한다는 것. 그런 이야기 얼개를 가지고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니 슬몃 웃음이 번진다. 북진한 꽃에 대한 답방으로 단풍이 남하하고, 단풍의 남하에 대한 답방으로 다시 꽃이 북진하고…… 이런 상상은 어디까지나 고영민 시인의 기발한 발상 덕분인바, 덕분에 오늘 전국적인 단풍놀이를 참 잘 했다는 인사를 드려야겠다. (이종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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