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농민신문 당선작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이 빌려 보는 연애소설 같다. 테이프 여러 번 붙인 표지에서 파스 냄새가 난다. 빛나는 손잡이에 밥주걱의 둥근 날을 가진 넉넉한 호미, 땅을 파는 일보다 아버지가 파 놓은 흙을 다시 훑어보는 돋보기 알 같은 눈 밝은 호미, 나란히 서 있는 아내와 내 호미는 주말이나 가끔 들고 나가는 장식용 백과사전, 철물점 쇳내도 가시지 않은 두 자루 쇳덩어리, 제대로 땅 한 번 파지 못하고 마늘이나 고구마 살점만 물어뜯는 날선 칼날, 그 옆에 장난처럼 걸려 있는 아이들의 호미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밭에 나가실 때 말동무로 따라 나서는 동화책같이 착한 호미가 한집에 산다.
대전일보 당선작
책장애벌레 / 이종섶
낡은 책장은 망치로 부수는 것보다 꼼지락거리는 것들 땅바닥에 던져버리려다
한국일보 당선작
차창밖, 풍경 빈곳 / 정은기
기차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긴장을 잃고 곡선으로 휘어지는 구간에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호수는 알고 있을까
전남일보 당선작
대동여지도 / 조다윗
1.
하나를 그리는 밤, 고요의 해진 발자국을 따라 걷다보면 어찌, 들이고 산이고 섬인지 헤아릴 수 있을 까마는 능선과 능선이
만나는 무등산엔 소리그림자 짙다. 평야와 평야가 나란히 도사리는 푸른 꿈도 젖는다. 지칠 줄 모르고 다가갈 것만 같은 어지간히 어지러운 삶 예견이라도 하는 듯이, 휘감고 되돌아가야 할 그 길 꼭 잊지 말란 듯이 그래도 살별처럼 떨고 있는 간이역을 처연(凄然)의 뒤안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2.
각하던 밤은 이토록 깊은 적막이다. 마치, 어머니의 가랑이처럼 길고 긴 포옹이다. 내 시의 근원지를 아직 잘 알지 못하겠으나, 늘 부려먹고 싶었던 어머니의 이름 대신 할미 가슴에 텃밭 한
평 가꾸던 이유가 옛 지도의 성지처럼 신성함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주 잠시 내 마음 속에도 초록의 활기가 꽃을 피우던 날, '모든 길은 다시 하나의 길로 마주본다.'고 여우비가 산
자와 죽은 자와 떠나간 자의 갈림길에서 등고선을 깊게 새겨두었다.
서울신문 당선작
가벼운 산 / 이선애
문화일보 당선작
하모니카 부는 오빠 / 문정
부풀어 오른 사철나무가 한그루 있고 그 아래에는 평상이 있고 평상 위에서는 오빠가 가끔 혼자 하모니카를 불죠 나는 비행기의 창문들을 생각하죠, 하모니카의 구멍들마다에는 설레는 숨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이륙하듯 검붉은 입술로 오빠가 하모니카를 불면 내 심장은 빠개질 듯 붉어지죠 그때마다 나는 캄보디아를 생각하죠 양은 밥그릇처럼 쪼그라들었다 죽 펴지는 듯한 캄보디아 지도를 생각하죠, 멀어서 작고 붉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오빠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난기류에 발목 잡힌 비행기처럼 덜컹거리는 발음으로 말해주었지요, 태어난 고향에 대해, 그곳 야자수 잎사귀에 쌓이는 기다란 달빛에 대해, 스퉁트랭, 캄퐁참, 콩퐁솜 등 울퉁불퉁 돋아나는 지명에 대해, 오빠의 등에 삐뚤빼뚤 눈초리와 입술들을 붙여놓은 담장 안쪽 사람들은 모르죠 오빠의 하모니카 소리가 바람처럼 나를 훅 뚫고 지나간다는 것도 모르죠 검은 줄무늬 교복치마가 펄렁, 하고 젖혀지는 것도 영원히 나 혼자만 알죠 하모니카 소리가 새어나오는 그 구멍들 속으로 시집가고 싶은 별들이 밤이면 우리 집 평상 위에 뜨죠 오빠가 공장에서 철야작업 하는 동안 별들도 나처럼 자지 않고 그냥 철야를 하죠
동아일보 당선작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 /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조선일보 당선작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 유희경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쪽 부엌 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저께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 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이 찾아올 곳이 없어졌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 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하게 간판이 하나 걸려진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아버지를 한 벌의 수저와 묻었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당신의 무덤 먼지들의 하얀 뒤꿈치가 사각거린다
세계일보 당선작
너와집 / 박미선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작
처음 찍은 발자국이 길이 되는 때 말의 반죽은 말랑말랑 할 것이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일 것이다
깊고 먼 어둠을 길어 올려 둥글게 반죽한다 천 개의 나뭇잎들이 천 개의 귀를 붙잡고 흔드는 소리, 목구멍 속에서 쏙독새 울음소리가 허공을 물고 터져나온다
처음부터 거기 살고 있는, 아직도 증발하지 않은 침묵의 긁힌 알몸이 보인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인 그 길이 보인다
부산일보 당선작
예의 / 조연미
손바닥으로 찬찬히 방을 쓸어본다 몸의 뜨거움으로
평화신문 당선작
좀들이쌀 / 김남수
이사하면서 지하실 구석진 곳에 슬그머니 놓고 왔다 묶인 짐들이 제자리를 찾는 사나흘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주소 바뀐 집에서 놓고 온 좀들이쌀 항아리를 생각했다 오래된 기억들이 출렁거렸다 뒤주 옆 좀들이쌀 항아리 바닥 긁는 소리 단잠을 깨우는 날이면 만장기도 없는 상여 한 채가 절뚝절뚝 뚝방 길을 밀고 떠나갔다 둘째 언니는 여전히 아침저녁 놋숟가락으로 어른 수만큼 쌀을 덜어냈다 항아리에 조금씩 쌓이는 좀들이쌀 이장집 할머니가 함지박 이고 사립문을 들어서면 반도 못 찬 항아리가 텅 비었다 그런 날이면 상여 한 채가 뚝방 너머로 사라지거나 타지에서 흘러온 영월댁이 몸을 풀었다며 어른들의 근심이 우물가로 모여들었다 이사한 지 두 주일 지나 손잡이 떨어져 나간 그 항아리를 찾아 나섰다 마음 앞세우고 서둘러 가는 길 예고 없이 비가 내렸다 골목의 수평이 기우뚱 발목을 적셨다 불교신문 당선작
그 흰 빛 / 박지선 달구어진 여름 내내 매미의 울음소리
경향신문 당선작 페루 /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창고大개방 / 방수진 1 아직, 연고 한 번 바르지 못한 상처들로 창고가 북적거린다 경남일보 당선작
여자의 풍선 /오자영
내 몸에 알록달록 풍선이 살고 있어요 알록달록 풍선을 몇 봉지 더 사왔지요 강원일보 당선작
소라의 집 / 김정임
외포리 뻘밭 소라의 집을 보셨나요
빈집의 적막이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올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간간이 파도 소리는 열어 둔 창으로 들어 왔다가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문 활짝 열어놓은 제 몸을 던져 꿈을 익혀가던 쭈꾸미처럼, 꿈은 꿈꿀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던가요
전북일보 당선작
오리 떼의 겨울 / 이지현
강 위에 오리가 머리를 숙였다 올린다 노란 부리로 쪼아낸 물방울은 베틀을 돌리지 않았는데도 모퉁이에서 가운데로 물결을 만들어간다 물결이 엉키지 않도록 휘휘 발 저어 옮기는 오리들, 혼자서는 저 넓은 강을 물고 날아오를 수 없다고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날갯소리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코와 코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삶의 보자기는 혼자 짜낼 수 없다는 것을 오리떼가 함께 날아 오를 때 알았다 살얼음이 발목을 조여와도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오리떼, 놓고 가는 건 없는지 막바지 점검을 끝낸 후 세상 바깥으로 일제히 날아 오른다 세상 안쪽으로 폭설이 쏟아진다
14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
낡은 의자 / 양호진
짙푸른 산 속, 푸서릿길을 지나는 꿈을 꾸었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가 기댄 저 낡은 의자 어디에서 왔을까
이제 지나온 질곡의 세월 낡은 의자의 魂(혼)으로 남아
매일신문 당선작
광주일보 당선작
시한폭탄을 해체할 때처럼 진땀나는 순간,
구두란 길과 걸음의 교차점,
구둣방 선반 위에서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세상에서
보행을 손보는 일은 손님의 몫이지만
신춘한라문예 가작
오월의 잠 / 김은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행방은 나무들의 습성을 닮아간다 뒤를 돌아보면 오롯이 되살아나는 잎새들의 발자국 기린처럼 도시를 넘겨보거나 하루의 마지막 햇살들을 꿈인듯 곱씹어간다 사막이 될 사랑과 목마름 하나로 건너야 할 기억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 나무들의 소문이 심상치 않다 뿌리째 뒤적여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해묵은 반란들, 나이테들의 구석에 처박혀 잠이 들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불면의 등성이들을 오르내린다 숨이 가빠지고 발목이 푸르러진다 누군가 적어놓은 유서들의 단서를 찾는 동안 문맹의 슬픔이 불어온다 심장의 한 켠에 푸른 병조각이 들어차고 이 도시에선 어떤 나무이든 술의 날들을 깨뜨리지 않으면 조금씩의 간격도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의문들은 나무들의 틈바구니에 묶인다 어제의 위치와 잎들의 수런거림이 나를 가둔 채 숲 저쪽으로 사라진다 오후의 통화와 몇개의 망각이 푸른 위궤양을 앓는다 기린처럼 목을 늘려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오월의 잠들, 계단을 타고 오르는 몇개의 잎새들을 상상하면서 나는 누군가 녹이다 만 박하사탕같은 사랑을 되짚어간다
2008년 전북도민일보 당선작
바람의 일 / 공인숙 바람의 일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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