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
김충규
거대한 군불을 쬐려고 젖은 새들이 날아간다
아랫도리가 축축한 나무들은
이미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매운 연기 한 줌 피어오르지 않는 맑은 군불,
새들은 세상을 떠돌다 날개에 묻혀온
그을음을 탁탁 털어내고 날아간다
깨끗한 몸으로 쬐어야 하는 맑은 군불,
어떤 거대한 혀가 몰래 천국의 밑바닥을 쓱 핥아와
그것을 연료로 지피는 듯한 맑은 군불,
숨 막힐 듯 조여 오는 어둠을 간신히 밀쳐내고 있는 맑은 군불,
그곳으로 가서 새들은 제 탁한 눈알을 소독하고 눈 밝아져
아득한 허공을 질주하면서도 세상 훤히 내려다보는 힘을 얻는다
저 거대한 군불 앞에 놓인 지구라는 제단,
그 제단 위 버둥거리는 사람이라는 것들,
누구의 후식인가
살짝 그슬러 먹으려고 저리 거대한 군불을 지폈나
-열린시학 200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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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계단 / 김충규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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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국 / 김충규
보수공사를 끝낸 시멘트 골목길,
누가 찍어 놓은 것일까
발자국이 아닌 손자국 선명하게 찍혀있다
시멘트 굳기 전 누가 작심하고 찍어놓은 자국
자세히 보니 새끼손가락 턱없이 짧다
斷指 -. 분명 그 흔적인 듯!
옛적 병중인 부모에게 제 피를 내어 먹이려고 끊었다던,
조폭 세계에서 의리를 보이려고 끊는다던,
입대하지 않고 작두에 넣고 자른다던,
화석같은 손자국을 보며 별의별 상상을 다해보는 아침.
내 오랜 친구 녀석은 연상의 여인에게 제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온통 붉은 문장의 편지로 고백했다고 말하며
훗날 사실은 그게 아니라 돼지 피였다고 농을 한 적이 있지만,
손가락 마디 하나 없는 손자국
섬뜩해서
누군지 몰라도 세상을 향해 뭔가 항의를 하려고 찍어놓은 듯해서
쭈그리고 앉아 그 자국 위에 내 손 맞춰 보는데
허, 마치 내가 찍어놓은 듯 별 어긋남이 없다
다만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자국 밖으로 삐죽 나와
만약 내가 마디 하나를 끊게 된다면
그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생각해보다가 흠칫 놀란다
그 손자국, 길 가던 이들을 섬뜩하게 했던지
저물 무렵 다시 그곳을 지나쳐 오는데
새 시멘트가 뭉클 덧씌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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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 殉葬 /김충규
죽은 사람을 싣고 가는 버스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죽지 않은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사이
햇빛들이 거머리떼처럼 버스에 달라붙는다
죽은 사람이 이승에 남기고 가는
최후의 말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유족의
삶의 방향이 바뀌거나 뒤틀리기도 한다
어떤 말을 들었던 것인지 버스 안의 유족들은
유리관 안의 밀랍인형처럽 표정이 굳어 있다
버스 안의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다
저들은 마치 순장을 치르기 위해
죽은 사람을 따라가는 무리 같다
신호가 바뀌자 버스는 정자처럼 꼬리를 흔들며
캄캄하도록 깊고
아득한 자궁 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간다
그 숲엔 무수한 뼈가 있다
머리칼 서로 엉켜 햇볕을 허락하지 않는 나무들 하체가 희고 늘 축축하게
젖어 있다 곰팡이가 나무들의 음부 속에서 제 일생을 꽃피우고 있다 숲 속
을 서성거리다 끝내 길 못 찾고 스러져 간 자들의 뼈가 낙엽들 위를 뒹굴고
있다 썩지 않는 뼈들이 낮 밤 없이 인광(燐光)처럼 반짝거린다 언제였던가
숲 속에 들어갔다가 헤맨 적이 있었다 내 뼈를 하나씩 뽑아내어 던졌다 반
짝이는 내 뼈를 딛고 숲을 나온 적이 있었다 몸 속의 뼈를 버리고서야 비로
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숲은 낮 밤 없이 무수한 뼈들 중에서 제 뼈를 찾으
려는 자들로 시끄럽다 뼈 없는 내 몸이 잔바람에도 휘어질 때 나는 내 뼈를
찾으려 숲 속으로 들어간다 길을 잃을까 두렵다 더 이상 뽑아낼 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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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이민화
눈 오는 밤, 차가운 반달이
내 입술을 더듬는다
하얀 실밥이 너덜너덜 붙어 있는
반달 표면은 얼음처럼
소름이 돋았지만 이내 뒷목에 힘을 빼고
오렌지 나무가 자라는 꿈을 꾼다
실밥 수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고
반달 표면에는 부드러운 전율을, 중심부로
갈수록 풀숲의 소리를 고이게 했다
애초부터 달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실밥마저 사랑하게 되는 것,
근육의 돌기를 모이게 하는 것
반달이 깊게 내 혀에 눕는 순간
내 혀 절반은 한 마리 여우
서로의 돌기가 엇박자를 냈을 때
여우는 반달을 사정없이 깨문다
새콤한 달들이 펑펑펑
내 몸은 온통 오렌지 밭이다
-시와문화 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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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 생각
최영철
파장 무렵 집 근처 노점에서 산 호박잎
스무 장에 오백 원이다
호박씨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씨를 키운 흙의 노고는 적게 잡아 오백 원
해와 비와 바람의 노고도 적게 잡아 각각 오백 원
호박잎을 거둔 농부의 노고야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실어 나른 트럭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파느라 저녁도 굶고 있는 노점 할머니의 노고도 적게 잡아 오백 원
그것을 씻고 다듬어 밥상에 올린 아내의 노고는 값을 따질 수 없다지만
호박잎을 사들고 온 나의 노고도 오백 원
그것을 입안에 다 넣으려고
호박 쌈을 먹는 내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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