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독설 / 조옥엽

문근영 2019. 2. 11. 10:15

독설


    조옥엽


  수십 년 낮과 밤이 쌓은 단단한 철벽 단숨에 뚫고 나타났다 산산한 가슴 찌르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날렵한 야수


  놈이 어디에 사는지는 아무도 몰라


  몸통도 얼굴도 색깔도 정년도 없는 유령, 날이 갈수록 혈기왕성 기세등등 단언컨대 놈의 가슴에 불로초 이파리 무성한 게 틀림없어


  예고 없이 들이닥쳐 순식간에 번쩍이는 면도날 가슴팍에 들이대 한 점 한 점 포 떠 접시에 담아 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핏기 가실 만하면 다시 나타나 칼날 들이대


  덧난 상처 딛고 올라가는 가풀막 그 끝이 어딘지 나는 몰라


  남몰래 소리 죽여 울던 시간이 만든 꼬부랑길 돌고 돌아가다 한숨 돌리려 들면 또다시 캄캄하게 앞을 가로막는


  거듭거듭 곱씹어 봐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뼈아픈 바늘들


  삼키지 못한 말에는 불생불멸의 날개가 있어


  시공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 날아다니다 오늘도 내 등뼈에 불시착해 도끼눈 부릅뜨며 작업 시작하려 식칼 빼 들어




                   《애지》2013년 겨울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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