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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춘향전』, 역사와 소설의 사이 / 신병주

문근영 2019. 1. 18. 01:13

제158호 (2009.12.16)


『춘향전』, 역사와 소설의 사이


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우리 고전의 대명사처럼 되어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소설 『춘향전』. 신분을 뛰어 넘는 청춘 남녀의 사랑이야기와 부패한 수령에 대한 통쾌한 응징 등 시대를 넘어 공감되는 요소들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 『춘향전』의 스토리를 그대로 믿으면서 이것이 역사적 실제인 것처럼 해석해 버린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춘향전 또한 허구적 상황을 담은 소설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시대의 소설에도 허구와 과장이 적절히 놓이면서 그럴듯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가장 있음직한 상황들을 설정하긴 하지만. 과연 『춘향전』에는 어떤 허구적 상황들이 숨어 있을까?


1년여만의 천재 탄생?


『춘향전』에서는 퇴기(退妓)의 딸 춘향과 남원부사의 아들로 잘 나가는 양반집 선비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다. 신분의 벽을 극복한 남녀의 결합이지만 신분사회가 무너져가는 조선후기 사회에서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이외에도 『춘향전』은 여러 허구적인 상황들과 마주친다. 이도령이 춘향과의 만남 후 1년여만에 과거에 장원급제한다는 설정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3년마다 한 번씩 뽑는 식년시(式年試)와 특별한 경우 실시하는 별시(別試)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과 급제자가 33인이니 식년시라면 3년에 전국에서 33인이 뽑히는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만큼 힘든 관문이었다. 또한 문과에 급제하려면 소과에 해당하는 생원시나 진사시를 거쳐 성균관에서 일정기간(대개 4~5년) 수학해야만 했으니 이몽룡이 문과를 거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 별시 합격의 가능성이 남는다. 이몽룡이 별시를 쳤을 가능성은 시험 문제가 ‘춘당춘색 고금동(春塘春色 古今同)’으로, 창덕궁 춘당대에서 실시한 시험이라는 점과 시험을 치룬 후 바로 왕이 급제자들을 시상했다는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이몽룡이 별시에 장원급제했다는 설정을 해도 천하의 인재가 모여드는 과거시험에서 1년여만에 수석 합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처녀가 그네 뛰는 것을 충분히 감상하고 적당한 로맨스를 즐겼던 위인이 말이다. 물론 점찍은 여자 춘향을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했을 테지만, 어쨌든 『춘향전』은 극적 효과를 위해 한 천재를 탄생시키고 있다.


상피제(相避制)를 무시한 부임지


비록 장원급제이긴 하지만 신출 관리 이도령이 바로 암행어사로 나가는 것도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다. 대개 과거에 급제하면 종9품이라는 최하위직에서 출발하는데 장원급제인 경우는 품계를 더해서 종6품직을 제수했다. 따라서 장원급제자는 동기생 보다 보통 4~5년 정도 승진 시기가 빠르다. 암행어사로 파견될 수 있는 최소한의 직급이 종 6품직으로 이것도 가능한 설정이긴 하지만, 암행은 말 그대로 비밀리에 왕이 지시한 업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왕의 시종신(侍從臣)을 파견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신참을 바로 암행어사로 파견할 만큼 조선왕조가 엉망이지는 않았다.

 

이도령이 남원에 파견된 사례에서는 소설적 허구의 극치를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상피제가 엄격히 적용되어 자신의 출신지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연고지역에 나가 안면이 있는 벼슬아치들의 청탁을 받는다면 공정한 암행의 업무를 어찌 수행할 수 있겠는가. 상피제의 적용은 부정과 청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조선시대 내내 지켜졌다. 특히 암행어사의 파견지를 결정할 때는 추생(抽 )이란 엄격한 추첨 제도를 적용했다. '추(抽)'는 뽑는다는 뜻이며, ‘생( )’은 나무의 껍질로 만든 ‘제빗대’란 뜻으로 직접 제비를 뽑아 왕명을 받아 감찰할 지역을 정하게 했다. 요즘도 흔히 사용하는 용어인 '제비뽑기'란 '잡다'의 명사형인 ‘잽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는데 한자로 쓰면 추첨(抽籤)이 된다.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조선후기 전국의 군현은 대략 400 여개에 달했다. 물론 상피제의 적용으로 이도령은 남원으로 갈 수 없었지만 추첨을 한다 할지라도 확률은 1/400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설이니까 이도령은 춘향이가 고통을 받는 남원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소불위의 변사또, 실제에서 가능한가?


 『춘향전』에서 독자의 가장 큰 공분을 자아내는 부분은 바로 춘향이 투옥되는 부분이다. 특히 영화로 제작된 『춘향전』에서는 춘향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긴 칼을 목에 두른 처참한 상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 관객들의 분노를 자아낸다. 과연 수청을 들지 않는 춘향의 죄는 나 살인을 저지른 대역죄인인가? 이 역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거의 나타날 수 없는 설정이다. 지방의 치안과 풍속을 책임져야 할 지방의 수령이 이처럼 함부로 법 집행을 해도 되는가. 소설 속의 구성은 특히 조선시대 지방관들 모두를 부패하고 여성을 노리개로 삼는 인물로 몰아가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수령이 함부로 사법권을 집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단지 자신에게 수청을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에 칼을 씌우는 죄는 더더욱 줄 수 없었다. 물론 실록에 이런 사례들이 일부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그만큼 특수한 경우임을 반증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삼심제(三審制)가 엄격히 시행되었으며,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각종의 법적 제도가 완비되었음이 잘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미 노비들에게까지 출산 전 30일, 출산 후 50일의 출산 휴가를 줄 만큼 나름의 인권 보호책이 수립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음미할만하다. 『춘향전』에서는 사또의 잔혹성을 부각시키고 이를 통쾌한 복수로 연결시키기 위해 변사또를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법집행과 고문을 일삼는 인물로 묘사했지만 이러한 설정은 자칫 조선사회의 법 집행과 형벌제도가 나름대로 짜임새를 갖추고 있으면서 인권 보호를 위한 조치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한다.

 

고전소설이건 현대소설이건 모두 그 시대의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소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과감히 폭로하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대리만족감을 불러 일으켜 준다. 『춘향전』은 수령의 부패와 탐학, 청춘남녀의 사랑, 선비의 출세와 여성의 절개 등 당시 사회에서 중시되던 덕목과 시대상을 적절히 반영하면서 당시인들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설에서 설정된 장면들이 모두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보다 극적인 효과를 담아내기 위하여 과장되고 허구적인 사실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된 것도 주목해야 할 사실들이다. ‘옥(玉)의 티’처럼 고전소설에 담긴 이러한 허점(?)들을 과감하게 파고들 때 역사소설을 읽어보는 재미가 보다 더해지지 않을까.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9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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