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가 갖고 있는 덕목들/ 이승하
―등단작을 중심으로
계간평을 죽 써오면서 제가 느낀 아쉬움 중에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미주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는 시인들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부족하구나 하는 점입니다. 연세도 대개 높고, 새로운 자극을 받을 기회도 적고, 한국 현대시의 동향에 대해서도 어둡고, 남들보다 뛰어난 시를 써야겠다는 경쟁의식도 적고, 미국에서 살기에 신간 시집이나 문예지를 사서 보기도 쉽지 않고……. 뭐 이런 이유들로 고국에 있을 때 보았던 그 시풍으로 지금껏 쓰고 계신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인의 애송시며 명시는 아직도 1920∼30년대의 시입니다. 만해와 미당, 소월과 영랑, 백석과 상화, 윤동주와 이육사, 청록파 3인 등. 자, 그런데 우리 시단에는 모더니즘의 세례를 확실히 받은 김수영과 김춘수가 있었고 '후반기' 동인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스트들도 있었고, 80년대의 해체시가 있었습니다. 해체시는 실험시, 포스트모더니즘 시, 형태파괴시 등의 명칭으로 불리면서 80년대를 풍미하였고 90년대에도 적지 않은 작품이 씌어졌습니다. 천재시인 이상(李箱) 이래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뭇 시인이 시 창작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미주한국문인협회의 일원으로 시를 쓰고 계시는 여러분은 과거의 시 창작 방법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날로 새로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과거로 도피하거나 현재에 안주한다면 여러분의 시는 답보상태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미주문학}이 동인지의 성격에 머물지 않고 한국 시단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어야만 그 값어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충격'을 주는 시
시가 지향하는 것에는 '감동', '충격', '깨달음' 같은 것이 있을진대 우선 '충격'에 무게중심을 둔 것을 몇 편 살펴보겠습니다. 고국의 일간지 가운데 중앙일보는 여름에 신춘문예 작품을 공모하는데, 지난해에 당선작으로 뽑힌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 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 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렌지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박연준, [얼음을 주세요] 전문
저는 이 시가 수천 편이 투고된다는 신춘문예에 당당히 당선될 만큼 뛰어난 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시, 혹은 좋은 시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방황하는 젊은이의 내면세계를 다룬 시로서, 신세대적인 감각과 문체, 발랄한 어법과 상상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무척 신선한 느낌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생리혈을 손에 묻혀/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만큼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요, 도발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기는 하지만 성욕은 함부로 이야기하기에는 부끄러운 본능입니다. 그런데 성 담론을 하면서 박연준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떳떳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시인의 자기독백체의 어투에는 당당함과 아울러 반항기도 배어 있습니다. 기성세대를 향한, 기성시인을 향한 반항기 말입니다. 따뜻한 차 대신에 얼음을 달라고 하는 신세대의 어법 속에는 분명히 도발적인 것이 있습니다. 심사위원은 이런 도발과 반항기를 높이 샀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문예지 당선작을 보겠습니다.
여름 학기
여성학 종강한 뒤, 화장실 바닥에
거울 놓고
양다리 활짝 열었다.
선분홍
꽃잎 한 점 보았다.
이럴 수가!
오, 모르게 꽃이었다니
아랫배 깊숙이
이렇게 숨겨져 있었구나
하얀 크리넥스
잎잎으로 피워낸 꽃잎처럼
철따라
점점(點點)이 피꽃 게우며, 울컥울컥
목젖 헹구며, 나
물오른
한 줄기 꽃대였다네.
―진수미, [바기날 플라워] 전문
1997년 계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여성학 강좌를 지도한 교수가 이제 여성은 자신의 신체를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랑스럽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었나 봅니다. 여성의 자궁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여 출산하는 거룩한 곳이기에 위대한 모성의 상징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강좌를 들은 여대생 진수미는 화장실 바닥에 거울을 놓고 양다리를 활짝 열어 자신의 성기를 비춰보고 감탄을 합니다. 아랫배 깊숙이 숨겨져 있던 자궁의 입구인 외음부를 보고 "철따라/점점이 피꽃 게우며", "울컥울컥/목젖 헹구며" 운운하는 내용으로 시를 써 당당히 시인이 되었습니다. 시인의 부모님은 이 시를 읽고 조금은 놀랐을 것입니다. 이 시 역시 후세에 남을 명시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수미라는 사람은 남들 다 아는, 혹은 다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남들보다 한 발 앞서서 색다르게 자신의 신체 일부에 대해 담론을 펼쳤기에 당선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의 관찰력이 무뎌서는 안 되며, 상상력이 진부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사물과 이 세계, 인간과 자연, 이 사회와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고 재구성해 내는 자가 바로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계간지 당선작을 봤으니 이번에는 월간 문예지 {현대시}의 2000년도 신인추천 작품상 수상작을 봅시다.
블랙 먼데이에서 블랙 후라이데이까지
시간은 검은 칠로 보디 페인팅한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영혼의 춤,
그보다는 조용한 몸짓,
창백한 미소와 예리한 눈빛,
추락하는 펀드매니저는 자기 운명을
손가락 끝에 건다. 자기 몸의 끄트머리에
그의 믿음의 섬이 있다. 배반의 해일.
닉 리슨이 니께이 선물로 베어링 사를 망가뜨릴 때
나는 (주)대우의 해외 DR을 팔아먹으려고
자정까지 야근했다.
검은 하늘에 뜬 달이 파리하게 아름다웠다.
블랙 후라이데이의 후장(後場),
주식시장이 설사했다. 주루룩 흘러내리는 블루칩.
미수에 걸려 있는 나의 심장에 지진의 자장(磁場)이 흐른다.
펀드매니저의 몸에서 몸으로 흐르는
검은 영혼의 전류, 아랫배가 짜르르 아프고
허한 가운데 어떤 알 수 없는 후련함도 지나갔다
깊게 아프게 패일수록 그곳에 진한 자장(磁場)도 고인다.
그 독한 취기로 내일도 금융시장의 페달을 돌릴
빠른 손놀림들. 세계의 비틀거리는 자전거는
어느 내리막길을 지나 평지에 다다를까. 낡은
페달과 고장난 브레이크를 달고.
블랙 먼데이에서 블랙 후라이데이까지
매일 번갈아 피는 목련, 장미, 난초, 국화, 동백
주말에는 견디기 어려운 폭설이 내릴지 모른다
너희들은 독한 자장(磁場)의 술을 마셔두렴.
―이명훈, [블랙 후라이데이] 전문
한국 금융시장의 현실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선물시세·주식시세·외환시세 따위에 울고 웃습니다. 유가는 또 어떻고 금리는 또 어떤가요.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일상적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우리는 바로 현대인입니다.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일상성'과 '현대성'입니다. 시인이 '나와 내 이웃의 삶'을 외면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다면 일단 10대와 20대는 시를 읽지 않습니다. 컴퓨터 온라인 게임과 인터넷 채팅을 하며 살아가는 오늘의 젊은이가 시를 읽지 않는 데는 기성세대 우리 시인들의 잘못도 조금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 그 동안 현실감 없는 시를 써온 것이 아닐까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유년기의 추억을 더듬고 인정 미담을 소개하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 이렇게 일상성과 현대성을, 현실의 잡사와 생활의 이모저모를 시에 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2000년도 월간 {현대시학} 신인작품 공모 당선작을 봅니다.
무등산에 올라
바다를 만나지 못하는 이들은
광주 사람은 아니다
슬픔이 목까지 부풀어 숨이 막힌 광주를
대신 울어주려고
산짐승의 작은 것까지도 다 파도 한 음절씩 들메주는 바다
아무리 어두운 밤에도
태양을 품속에 꼭 껴안아 재우고는
첫 새벽이면 흔적 없이 서석대 위에 올려놓는 바다
아직도 가파른 능선을 타고 역류하는
산 자와 죽은 자의 합창, 한 물결 아니었으면
이미 불모의 사막이 되어 있을 바다
장불재 억새 한 잎, 세인봉 노송 한 그루 고인 이슬이
한여름에 소신공양하여 일군 칠산바다 천일염 맛인지 모르는 이들은
옷깃 여미고 다시 무등산에 올라가 보라
―[무등산 2000] 전문
무등산을 역사의 수난지로 설정하여 애향의 의지를 담은 이 시는 소재며 주제가 무난합니다. 문제는 표현에 있어 새로운 구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너무도 뻔한 이야기를 뻔한 방식으로 하고 있기에 저에게는 별다른 울림을 주지 않습니다. 시가 가슴을 벅차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잔잔한 울림으로 와 닿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할 정도의 공감대는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얼음을 주세요]와 [바기날 플라워]는 적어도 동년배의 독자에게는 공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시인이 독자에게 감동과 공감을 주지 않는다면 기발한 상상력을 펼쳐 보여주거나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 감각으로 시를 읽는 묘미, 즉 언어의 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고 있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사물의 이면을 볼 줄 아는 견자이며, 이 세계의 온갖 사물에 새롭게 이름을 붙이는 명명자입니다. 또한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기꾼이며 '역설'과 '반어'를 종횡무진으로 구사하는 희대의 범죄자입니다. 소재와 주제가 낡디낡은 것, 혹은 너무나 뻔한 것이라면 표현이라도 좀 새로워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 소개해 드릴 시는 소재가 낚시여서 별로 새로울 것은 없지만 표현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새로움을 추구한 시입니다.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
바다가 변한다
영등철이 지나 바다가 몸을 바꿔 체온을 올리고
파도가 깃을 세우면
그들은 산란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빠른 물살이 곶부리를 휘어감는 곳
빠른 리듬을 타고 온다
영등 감생이의 시즌이다
바닷물의 출렁거림은 흐름과 갈래를 지녔다
가장 강한 놈은 가장 빠른 곳에서만 논다
릴을 던져라 저기 분류대를 향해
가쁜 숨 참으며
마음속 깊이로 채비를 흘려라
거칠고 빠른 그곳
거기 비늘을 펄떡이는 완강함
릴을 던져라
바다는 몸을 뒤채며 이리저리 본류대를 끌고 움직이지만
큰 놈은 언제나 본류에 있다
본류는 멀고
먼 데서부터 입질은 온다
바다의 마개를 뽑아 올릴 힘으로 나를 잡아채야 한다
팽팽한 포물선을 그리며 발밑에까지 끌려온 마찰저항
마지막 순간이 올 때
언제나 거기 있다
막, 채비를 흘려보냈다
온다
―윤성학, [감성돔을 찾아서] 전문
강 낚시이건 바다 낚시이건 낚싯줄은 팽팽한 포물선을 그리지요.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시의 강점은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꽉 짜인 플롯입니다. 짧은 문장이 연속되고 명령형이 적절히 구사됩니다. 첫 연은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는 짧은 문장인데 끝 연은 "온다"라는 단 두 음절의 문장입니다. 언어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 시를 갓 잡힌 물고기처럼 퍼덕거리게 할 수도 있고 배를 뒤집고 죽어 있는 물고기처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시는 충격까지는 아니지만 언어가 지닌 싱싱한 힘을 십분 느끼게 해줍니다. [감성돔을 찾아서]는 언어의 선택과 배치가 시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소재와 주제가 그다지 새롭지 않을지라도 표현을 잘만 하면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감칠맛 나는 표현은 치밀한 묘사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2. '감동'을 주는 시
신춘문예 당선작 중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준 시로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흔히 꼽습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이 자리에서는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영산포]를 감상해볼까 합니다.
1
배가 들어/멸치젓 향내에/읍내의 바람이 달디달 때/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울었다.//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늘 같이 흐르고/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청무우를 먹으며/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빈손의 설움 속에/어머니는 묻히시고/열여섯 나이로/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호남선을 오르며 울었다.//강물이 되는 숨죽인 슬픔/강으로 오는 눈물의 소금기는 쌓여/강심을 높이고/황시리젓배는 곧 들지 않았다.//포구가 막히고부터/누님은 입술과 살을 팔았을까/천한 몸의 아픔, 그 부끄럽지 않은 죄가/그리운 고향, 꿈의 하행선을 막았을까/누님은 오지 않았다./잔칫날도 큰집의 제삿날도/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들은 비워지고/강은 바람으로 들어찰 때/갈꽃이 쓰러진 젖은 창의/얼굴이었지/십년 세월에 살며시 아버님을 뵙고/오래도록 소리 죽일 때/누님은 그냥 강물로 흐르는 것/같았지.//버려진 선창을 바라보며/누님은/남자와 살다가 그만 멀어졌다고/말했지.//갈꽃이 쓰러진 얼굴로/영산강을 걷다가 누님은/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강물이 되어 호남선을 오르며/파도처럼 산불처럼/흐느끼며 울었지.
2
개산 큰집의 쥐똥바퀴새는/뒷산 깊숙이에 가서 운다./병호 형님의 닭들은/병들어 넘어지고/술 취한 형님은/강물을 보러 아망바위를 오른다/배가 들지 않는 강은/상류와 하류의 슬픔이 모여/은빛으로 한 사람 눈시울을 흐르고/노을 속에 雲谷里를 적신다./冷山에 누운 아버님은/물결 소리로 말씀하시고/돌절벽 끝에서 형님은/잠들지 않기 위해 잡풀처럼/바람에 흔들린다./어머님 南平아짐은 마른 밭에서/돌아오셨을까,/귀를 적시는 강물 소리에/늦은 치마품을 움켜잡으셨을까,/그늘이 내린 九津浦/형님은 아버님을 만나 오래 기쁘고/먼발치에서/어머님은 숨죽여 어둠에/엎드린다.
―나해철, [영산포] 전문
이 시의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입니다. 경기가 제법 좋았던 영산포가 근대화 과정에서 낙후되고 마는데, 한 가족이 그 여파로 절대빈곤에 노출되면서 몰락하고 맙니다. 특히 화자의 누님은 몸을 파는 신세로 전락하고(1번), 다른 식구들도 죄다 비극적인 상황에 봉착합니다(2번). 참담한 현실상황을 들려주면서도 이 시는 시종일관 서정성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한 가족의 비극이 잔잔하게 기술됨으로써 비극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2번 시에는 많은 지명이 제시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의 구체성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시의 내용은 어느 일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산업화 시대였던 60년대와 70년대를 통과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시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농촌이나 어촌에서 살아갈 수가 없어 이농의 대열에 섰습니다. 도시에 와서 산동네 주민이 되어 살길을 찾았지만 허기는 여전합니다. 농촌사회에서는 그나마 가족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는데 도시에 나와서는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족이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관계가 되고 만 것이 더 큰 비극일 수 있습니다. 남자는 노동판에 가서 일용직 노무자라도 할 수 있었지만 여자는 그 시절에 공장 노동자가 아니면 버스 차장, 그도 아니면 직업여성이라도 되어 살길을 찾아야 했었지요. 이 시는 가족사와 사회사가 함께 다뤄지고 있으며, '체험의 진실성'에 서정성과 비극성이 보태져 진한 감동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 시를 쓴 나해철 시인은 전남의대를 나와 지금은 서울 강남에서 성형외과 의사를 하고 있습니다. 보통 얼굴의 여성을 미모의 여성으로 탈바꿈시키는 재주를 지닌 의사 시인이기에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시인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연간 수입이 얼마인지 간에, 그 사실로 인해 이 시가 지닌 체험의 진실성이 흔들릴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체험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시인은 이웃 혹은 일가친척 중 누군가의 체험을 진솔하게 묘사해 냈기 때문입니다. 199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는 제 후배여서 시 창작의 내밀한 부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의 장난감을 꾸리면서/아내가 운다/반지하의 네 평 방을 방을 모두 치우고/문턱에 새겨진 아이의 키 눈금을 만질 때 풀썩/습기 찬 천장벽지가 떨어졌다//아직 떼지 않은 아이의 그림 속에/우주복을 입은 아내와 나/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아버님은 아랫목에서 주무시고/이쪽 벽에서는 당신과 나 그리고/천장은 동생들 차지/지난번처럼 연탄가스가 새면/아랫목은 안 되잖아, 아, 아버지,//생활의 빈 서랍들을 싣고 짐차는/어두워지는 한강을 건넌다 (닻을 올리기엔/주인집 아들의 제대가 너무 빠르다) 갑자기/중력을 벗어난 새 떼처럼 눈이 날린다/아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웃음을 그치면/중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많은 날들 위에/덜컹거리는 사람들이 떠다니고 있다//눈발에 흐려지는 다리를 건널 때 아내가/고개를 돌렸다, 아참/장판 밑에 장판 밑에/복권 두 장이 있음을 안다/강을 건너 마악 변두리로/우리가 또 다른 피안으로 들어서는 것임을/눈물 뽀드득 닦아주는 손바닥처럼/쉽게 살아지는 것임을//성냥불을 그으며 아내의/작은 손이 바람을 막으러 온다/손바닥만큼 환한 불빛
―원동우, [이사] 전문
요즈음에는 한국도 포장이사를 하기 때문에 가재도구를 잔뜩 싣고 이사하는 광경은 궁벽한 시골이 아닌 다음에야 보기 어렵습니다. 셋방살이를 하던 가난한 일가가 주인집 아들의 이른 제대로 말미암아 황급히 방을 비워주게 됩니다. 눈발이 날리니 초겨울인가요, 서울 변두리에서 더 변두리로 이사를 하는 풍경이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습기 찬 천장 벽지가 떨어지는 반지하의 네 평 방, 그나마 연탄가스가 새던 방을 비워주게 되었으니 일가의 마음이 참담할 수밖에요. 장판 밑에 두고 온 복권에 연연할 정도로 이들 가족의 경제적 상황은 절박합니다. 그런데 이 시의 매력은 이런 비극적 상황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진한 감동을 주는 한 장면에 있습니다. 남편이 담배를 피우려고 성냥불을 키자 바람이 방해를 합니다. 차창이 조금 열려 있었던 것이지요. 그때 아내의 작은 손이 다가와 성냥불을 꺼트리려고 하는 바람을 막습니다. 가족간의 끈끈한 정이 을씨년스런 이사 풍경을 따뜻하게 밝히고, 독자는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험해도 가족 상호간에 사랑과 정이 변치 않는다면 극복 불가능한 어려움이란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이 시는 마지막 연이 백미입니다.
그런데 이 시로 등단한 원동우 시인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은행에 입사하여 10년 정도 근무하였고, 퇴사한 뒤에는 벤처기업을 꾸려갔습니다. 벤처기업이 잘 안 되어 한동안 방황하다가 지금은 어떤 회사에 들어가 잘 다니고 있습니다. 시 속의 상황 중에 본인이 직접적으로 체험한 부분은 1%나 될까요? 이 작품은 시인의 완벽한 허구와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퇴근길에 차를 몰고 가면서 무심코 본 광경이 바로 이삿짐을 싣고 달리는 소형 트럭 한 대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심코 보며 지나쳤던 이삿짐 실은 트럭을 원동우는 유심히 보았던 것이고, 곰곰이 생각했던 것이며,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로 써보았던 것입니다.
시는 이렇게도 탄생할 수 있습니다. 실체험보다 간접체험이 더욱 진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례를 [이사]라는 신춘문예 당선작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작품은 등단작이 아닙니다. 함민복 시인이 시골에 계신 귀가 어두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화가 좀체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 시는 앞의 시처럼 비장하거나([영산포]) 을씨년스럽지([이사]) 않고 구수한 사투리와 유머 감각을 보여주어 아주 은근하게 감동을 줍니다. '쇠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도 적절히 사용되어 재미를 배가시키지요.
여보시오―누구시유―
예, 저예요―
누구시유, 누구시유―
아들, 막내아들―
잘 안 들려유―잘.
저라구요, 민보기―
예, 잘 안 들려유―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당최 안 들려서―
어머니―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두 내우 다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예, 죄송합니다. 안 들려서 털컥.
어머니 저예요―
전화 끊지 마세요―
예. 애비가 동네 볼일 보러 갔어유―
두 내우 다 예, 저라니까요! 그러니까
이따 다시 걸어유 어머니. 예,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안어들머려니서 털컥.
달포 만에 집에 전화를 걸었네
어머니가 자동응답기처럼 전화를 받았네
전화를 받으시며
쇠귀에 경을 읽어주시네
내 슬픔이 맑게 깨어나네
―함민복,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전문
달포 만에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만 끝끝내 대화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아니, 모자가 일종의 동문서답을 했지요. 시인은 아무튼 어머니의 목소리는 들었던 것이고, 소처럼 무심한(미련한?) 나에게 귀 어두운 어머니가 경을 읽어주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가슴 찡한 감동은 아닐지라도 이 시를 읽으면 '아, 어머니!' 하고 마음속으로 한번쯤 외쳐보게 됩니다. 충격도 주지 않고, 이런 작은 감동도 주지 않는 시는 좋은 시가 되기 어렵습니다.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993년, 계간 {창작과 비평}은 김진완이 쓴 아래의 시를 투고된 많은 작품 가운데 신인 추천작으로 뽑습니다. 대학생이었던 김 시인이 어쩜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구사하게 하는지, 읽고 감탄해마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화자의 외할머니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머니를 출산하는 광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혜자는 엄마 이름. 귀가 얼어 톡 건들면 쨍그랑 깨져버릴 듯 그 추운 겨울 어데로 왜 갔던고는 담 기회에 하고, 엄마를 가져 싸아한 진통이 시작된 엄마의 엄마가 꼬옥 배를 감싸쥔 곳은 기차 안. 놀란 외할아버지 뚤레뚤레 돌아보니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들뿐이었는데 글쎄 그게, 엄마 뱃속에서 물구나무를 한번 서자,
으왁!
눈 휘둥그런 아낙들이 서둘러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자 남정네들 기차 배창시 안에서 기차보다도 빨리 '뜨신 물 뜨신 물' 달리기 시작하고 기적소린지 엄마의 엄마 힘쓰는 소린지 딱 기가 막힌 외할아버지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인데요, 아낙들 생침을 연신 바르는 입술로 '조금만, 조금만 더어' 애가 말라 쥐어트는 목소리의 막간으로 남정네들도 끙차, 생똥을 싸는데 남사시럽고 아프고 춥고 떨리는 거기서 엄마 에라 나도 몰라 으왕! 터지는 울음일 수밖에요.
박수 박수 "욕 봤데이." 외할아버지가 태우신 담배꽁초 수북한 통로에 벙거지가 천정을 향해 입 딱 벌리고 다믄 얼마라도 보태 미역 한 줄거리 해 먹이자, 엄마를 받은 두꺼비상 예편네가 피도 덜 닦은 손으로 치마를 걷자 너도나도 산모보다 더 경황없고 어찌할 바 모르고 고개만 연신 주억였던 건 객지라고 주눅든 외할아버지 짠한 마음이었음에랴 두말하면 숨가쁘겠구요. 암튼 그리하야 엄마의 이름 석 자는 여러 사람들의 은혜를 입어 태어났다고 즉석에서 지어진 것이라.
多惠子.
성원에 보답코자
하는 마음은 맘에만 가득할 뿐
빌린 돈 이자에 치여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나의 엄마 다혜자씨는요,
칙칙폭폭 칙칙폭폭 끓어오르는 부아를 소주 한잔으로 다스릴 줄도 알아 "암만 그렇다 캐도 문디, 베라묵을 것. 몸만 건강하모 희망은 있다."
여장부지요
기찬,
기―차― 안 딸이거든요.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은 제가 연전에 시와시학사를 통해 낸 {백 년 후에 읽고 싶은 백 편의 시}라는 시 해설서에서 한 적이 있으므로 그것을 그냥 적습니다.
시는 화자의 외할머니가 하필이면 한겨울에 칙칙 폭폭 칙칙 폭폭 달리는 기차 안에서 엄마를 낳게 된 광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승객이라고는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을 가진 농투성이들뿐이지만 이들은 낯선 아주머니의 차내 분만에 한마음으로 동참합니다. 아낙들은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고, 남정네들은 뜨신 물을 구해오고, '벙거지'는 미역 살 돈을 내놓고, 두꺼비상 여편네는 산파 노릇을 해 무사히 한 생명은 '으왕!' 울음을 터뜨리며 탄생합니다. 이런 여러 사람의 은혜로 태어났다 하여 엄마 이름이 다혜자가 되었다는 것이나, 마지막 3연이 보여주는 모성적, 혹은 한국적 건강함은 가슴 훈훈한 감동을 전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또한 꽤 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1연과 3연 사이에 위치한 '으왁!'이란 의성어가 환기하는 생명 탄생의 고통(낳은 고통만이 고통이랴, 태어나는 고통도 고통이며 지켜보는 안타까움도 고통이리)과 경이로움, "기찬"과 "기―차― 안"이라는 비슷한 음을 이용한 유머 감각 등은 이 시를 명작의 반열에 올리는 데 합심하여 공헌하고 있습니다.
이상 4편 시에는 가족애라는 숭고한 사랑이 담겨 있어 감동을 줍니다. 하지만 밑바닥 인생의 불결한 섹스조차 시인의 손에서 잘만 묘사된다면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시도 [어머니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와 같이 등단작은 아닙니다.
공중변소 속에서 만났지. 그녀
구겨버린 휴지조각으로 쪼그려 앉아 떨고 있었어.
가는 눈발 들릴 듯 말 듯 흐느낌 흩날리는 겨울밤
무작정 고향 떠나온 소녀는 아니었네.
통금시간을 지나온 바람은 가슴속 경적소리로 파고들고
나 또한 고향에서 고향을 잃어버린 미아,
배고픔의 손에 휴지처럼 구겨져, 역 앞
그 작은 네모꼴 공간 속에 웅크려 있었지.
사방 벽으로 차단된 변소 속,
이 잿빛 풍경이 내 고향
내 밀폐된 가슴속에 그 눈발 흩날려와, 어지러워
그 흐느낌 찾아갔네.
그녀는 왜 마약중독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어도
새벽털이를 위해 숨어 있는 게 분명했어. 난 눈 부릅떴지.
그리고 등불을 켜듯, 그녀의 몸에
내 몸을 심었네. 사방 막힌 벽에 기대서서, 추위 때문일까
살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었지만
솜털 한 오라기 철조망처럼 아팠지만
내 뻥 뚫린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 위
작은 창에는, 거미줄에 죽은 날벌레가 흔들리고 있었어. 그 밤.
내 몸에서 풍기던,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악취는
그 밀폐의 공간 속에 고인 악취는 얼마나 포근했던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네. 마약처럼
하얀 백색가루로 녹아서 내 핏줄 속으로 사라져간
그녀,
독한 시멘트 바람에 중독된 그녀.
지금도 내 돌아가야 할 고향, 그 악취 꽃핀 곳
그녀의 품속밖에 없네.
―김신용, [공중변소 속에서] 전문
이 시를 쓴 김신용 시인은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으니 무학입니다. 공사판을 전전하며 생을 영위해온 시인의 젊은 날의 로맨스인지 모르겠습니다. 88올림픽을 기점으로 한국의 공중변소가 많이 청결해졌는데 그 전에는 그다지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공중변소에서 화자는 한 여자를 만나 정사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녀는 마약중독자였고 도둑이었습니다. 거지 행색을 하고 있었을 텐데 악취를 풍기기까지 했으니 보통사람 같았으면 가까이 가기도 싫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그날 무엇에 홀린 듯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았던 것이고, 화자는 두고두고 그날을 못 잊어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내 돌아가야 할 고향, 그 악취 꽃핀 곳/그녀의 품속밖에 없다"고 애틋해하는 것입니다. 독자에 따라서 이 시를 읽고 역겨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가슴 찡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성간의 사랑이 반드시 플라토닉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밑바닥 인생들의 하룻밤 풋사랑도 당사자에게는 애틋한 추억일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음습한 그곳에 희미한 빛을 비춰보고자 했고, 두 사람이 나눈 사랑도 충분히 따뜻한 것이었다고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감동의 결은 다르지만 저는 이 시를 감동적인 시라고 말합니다.
3. '깨달음'을 주는 시
인간사와 사물의 특징을 세심히 관찰하여 제대로 묘사하면 모종의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1996년 조선일보 당선작 [부의(賻儀)]를 갖고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봉투를 꺼내어
부의(賻儀)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 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 움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 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 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놓았다.
―최영규, [부의(賻儀)] 전문
어려운 시어도 없고 난해한 표현도 없습니다. 잘 알고 지내던 이웃집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하러 간 것이 내용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 시에는 생명 옹호의 정신과 불교적 깨달음, 측은지심 같은 고차원적인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말합니다. 생로병사는 인간이 이상 어찌할 수 없지만 윤회전생(輪廻轉生)을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고요. 전생의 업보니 인연이니 억겁이니 하는 불가의 용어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머니가 늘 갖고 계시던 호두 알이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다는 것은, 꽃이 씨를 남겨 자신의 목숨을 이어간다는 것과 의미의 맥이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지요. 최영규 시인처럼 생명의 의미를 종교적 차원에서 다뤄볼 수도 있겠지만 사물의 의미는 어떤 차원에서 다뤄볼 수 있을까요?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 프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나름으로 굳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척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강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헤쳐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 세울 것인가
―최영철, [연장論] 마지막 연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난다
반듯한 네 귀들이 날카롭게 모진 눈인사를 나누고
같은 방향 바라보며 살아가라는 고무망치의 등 두들김에도
끝내 흰 금을 긋고 서로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붙박인 모서리 단단히 잡고 살아야 하는 세월
화목이란 말은 그저 교과서에나 살아 있는 법
모와 모가 만나고 선과 선이 바르게만 살아 있어
어디 한구석 넘나들 수 있는 인정은 없었다
이가 딱 맞다
―주강홍, [타일 벽] 앞 2연
산과 산 사이에는 골이 흐른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골과 왼쪽으로 돌아가는 산이 만나는 곳에서는 눈부신 햇살도 죄어들기 시작한다 안으로 파고드는 나선은 새들을 몰고 와 쇳소리를 낸다 그 속에 기름 묻은 저녁이 떠오른다 한 바퀴 돌 때마다 그만큼 깊어지는 어둠 한번 맞물리면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떠올랐던 별빛마저 쇳가루로 떨어진다 얼어붙어 녹슬어간다
봄날 빈 구멍에 새로운 산골이 차 오른다
―송승환, [나사] 전문
[연장論]은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고 [타일 벽]은 2003년 계간 {문학과 경계} 신인상 공모 당선작이며 [나사]는 2003년 계간 {문학동네} 신인상 공모 당선작입니다. 3편 다 '충격'과 '감동'의 차원에서는 운위하기 어렵고, 결국 '깨달음'을 지향하는 시라고 여겨집니다. [연장論]은 건설현장의 공구를 소재로 삼은 시인데 궁극적으로는 이웃과의 연대와 화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많이 배웠건 많이 가졌건 제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무인도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결국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이타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고립되고 만다는 주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이 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연장의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주제도 유추해볼 수 있지요.
[타일 벽]을 쓴 사람은 건설회사 사장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쓴 시는 다 현장성이 두드러집니다. 타일을 의인화한 이 시는 공사현장에서 펼치는 인생론입니다. 욕실 타일 벽 공사를 하면서 시인이 깨달은 것은 고무망치의 두들김에도 "흰 금을 긋고 서로의 경계를 늦추지 않는" 타일의 저항과 "붙박인 모서리 단단히 잡고 살아야 하는 세월"의 의미입니다. 공사현장에서 타일 벽은 이가 딱 맞아야 하지만 우리 인생이란 것이 어디 그렇습니까. 때로는 언밸런스이고 때로는 뒤죽박죽이고 때로는 오리무중이지요. 하지만 타일 벽이 그래서는 안 되지요. 규칙과 규율을, 감독과 관리의 세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제4연에 가서 역전을 시도합니다.
낙수의 파형(波形)만 공간 가득하다
물살이 흔들릴 때마다 욕실 속은 쏴아쏴아
실금을 허무는 소리를 낸다
욕실을 지배하는 건
모서리들끼리 이가 모두 딱 맞는 타일 벽이 아니었다
이가 모두 딱 맞는 타일 벽에 반항하려고 욕실의 물살이 "쏴아쏴아/실금을 허무는 소리"를 냅니다. 세상 너무 모나게 살 필요가 없는 법, 때로는 두루뭉실하게, 때로는 비스듬하게 살아가자고 시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송승환의 시는 나사의 의미를 확장하여 당선작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사물의 본질을 파고들어 미세하게 그려내기도 하지만 내포(內包)보다는 외연(外延)을 지향하기도 합니다. 이미지 연상작용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송 시인은 그 기법을 멋지게 사용하여 독자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나사는 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화두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사의 사전적인 의미 고찰에 머물지 않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갖추었기에 그는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은 다릅니다. 앎은 지식의 영역이고 깨달음은 지혜의 영역입니다. 시는 우리에게 충격과 감동과 함께 깨달음을 줄 수 있습니다. 철학서 한 권, 역사책 한 권에 들어 있는 내용을 압축하여 한 편의 시로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세상에서는 시인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이란 '크게 느낀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가 사물과 인간에 대한 관찰의 안테나를 계속 세우고 있으면 시로 쓸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좋은 시는 늘 우리 주변의 사물을 잘 살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의 손에 의해 씌어지는 것입니다. 일기나 수기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곧이곧대로 쓰면 되지만 시는 축소지향의 장르입니다. 구질구질 설명하지 않고 몇 마디로 줄여서 쓰면 그것이 바로 촌철살인이고 정문일침입니다. 시는 '충격'과 '감동' 혹은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하면서 강연을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제 강연을 경청해주신 분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승하 시인의 홈에서.[시와 사상] 기획특집 : 젊은 시인과 내러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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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김천에서 성장했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현재 중앙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다.
시집으로「사랑의 탐구」(1987),「우리들의 유토피아」(1989),「욥의 슬픔을 아시나요」(1991),「폭력과 광기의 나날」(1993),「박수를 찾아서」(1994),「생명에서 물건으로」(1995) 인간의 마을에 밤이온다 (2005년)가 있으며, 시론집으로「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학」(1997),「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1999),「한국 현대시 비판」(2000),「한국 시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2001)가 있다. 이 밖에 소설집「길 위에서의 죽음」(1997)과 시선집「젊은 별에게」(199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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