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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6 근로자문학제 시부문 당선작] 박성우 외

문근영 2019. 2. 11. 10:09

[2016 제37회 근로자문학제  시부문 당선작]

 

금상
부처님의 발톱깎기 / 박성우

 


아버지께서
한참을 웅크리고 발톱을 깎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 것이 되어 버린 것들을
그렇게 모가 난 삶의 모서리들을
딸깍딸깍 떼를 잘 입힌 봉분(封墳)처럼
둥글고 매끄럽게 깎아 내고 있다
아버지 웅크린 그 모습 그대로 마른
생불(生佛)이 되어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다
순간, 나는 아이처럼
깊고 고요한 바닥이 무서워 아버지 하고
그 고요를 살며시 흔들어 놓았다
아버지 대답도 없이 그저 고개만 천천히
나를 찾아 먼 길을 돌아 돌아 오신다
들일 나갔다 집에 있는 짐승들을
잠시 거두러 오실 때처럼
마루에 앉은 우리들을
물끄러미 다 같이 거두시고는
다시 들로 천천히 돌아가신다
마른 등은 그믐처럼 차고 깊게 구부러지고
푸른 무릎 사이로 얼굴이 천천히 묻혀 갔다
그런 순간이 내게도 올 것이다
둥글고 매끄럽게 떼를 잘 입힌 봉분(封墳)처럼
삶의 모서리들을 딸깍딸깍 깎아 내며
주위의 안녕을 주섬주섬 거두어 갈 때가 올 것이다

 

 

 

 

은상
말랑한 포도 / 윤옥란


 

자르르, 살이 올랐다
벌레들이 잎을 갉아먹는 동안 나무는 굵어지고
햇볕따라 몸이 휘어진 과육

 

며칠 방안에 둔 포도
껍질 속에 담긴 햇빛과 바람은 포도밭으로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친다
줄기를 놓친 접시에서 조금씩 시들어 갔다

 

신맛이 단맛으로 익어가던 검은 눈동자 같은
달빛에 포옥 안겼던 8월의 밤을 포도거위벌레는 기억할 것이다

 

어제는 석양이 포도나무에 사뿐히 내리더니
오늘은 나를 키워준 시간의 나뭇가지에 앉았다

 

포도처럼 탱글탱글 단물이 고이던 시절
언니 몸에서는 풀냄새가 난다고 했다
사과처럼 이쁘다고 했다

 

이제 내 눈위 물기가 줄어든 것만큼
포도 껍질은 더 질겨져서 씨앗만 남았다

 

바깥은 절정이다

 

지구 반 바퀴 도는 동안
벌레들 울음소리와 생의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태양 황경135도,

 

들판의 술 익은 냄새로 술렁이는 오후
몰입과 발효의 시간을 번갈아 건너는 중이다

 

 

 

 

은상
소금꽃 여자 / 신진련


 

바다를 입고 살았습니다
종일 아가미를 떼느라 휘어진
손가락 마디에는
따개비 같은 상처가 굳은살로 박혀 있습니다
살갗에 달라붙은 생선비늘만큼이라도
반짝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속옷을 벗고 비린 몸을 문지르면
손가락 사이로 포말이 일었습니다
씻어도 씻어도 바다를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벗어둔 속옷에도 짠바람이 스며들었는지
바다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물기가 빠진 하얀 얼룩을
꽃이라 불러도 될까요
꽃을 피우는 하루를 살았으니
오늘은 낮은 파도를 베고 잘 수 있을까요
젖은 몸 다 마르면
울퉁불퉁한 손가락 마디에도
꽃이 피면 좋겠습니다
잠든 아이 챙기듯
속옷에 핀 하얀 꽃을 보듬었습니다

 

 

 

 

동상
휴일 / 이은선


 

나비 액자를 걸어 놓으니
쌀에 나비들이 꼬입니다.
나비 가루는 눈을 멀게 한다지요. 얼른 예쁘고 파랗고 신비스럽기만 한 액자를
땅에 내려놓습니다.
어제는 산으로 도망가며 물소와 코끼리 석상을
헤치며 숲으로 내달리는 꿈을 꾸었드랬습니다.

외롭고도 무서운 밤이었어요
태초의 동물들과 함께하는 세계는
도시 속에서만 산 제게는 낯설더라구요.

 

어머니가 가져오신 쌀로는
막걸리를 빚었고요.
저는 1874년 맥주를 들이킵니다.
니체도 만나고
고흐도 만나며
술 맛은 참 좋아요.
허나 내게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다가오는 이유로
그들과 작별해야 합니다.

 

저는 그들과 달리 초라하기만 해서
청소를 하고
독서를 하며
담담하게 하루를 보낼 거랍니다.

알아요.
그들의 시간 속으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동상
몽땅 빗자루 / 홍영수


 

깔끔한 툇마루 끝
쓸어 담다 닳고 닳아 시린 아픔 안고
녹슨 못에 걸려 있는 때 묻은 손잡이엔
부엌 문지방 넘나들었던
세월이 지우고 간 여인의 지문 자국이 흐릿하다.

 

비바람 알갱이로 슬어 놓은 먼지와
자신의 온몸 닳아가며 남긴 티끌을
티바지에 쓸어 모으다 닳아
절반을 먼저 보내고 남은
반 토막의 경전

 

뒷바라지를 치마로 두르고
엄마를 저고리로 껴입으며
허리 한 번 펴지 못하다
지팡이 손잡이처럼
절반으로 굽어 버린 기역자의 법열 등

 

서로 다독이며
좀먹은 마루판 사이를
쓸고 쓰는 만큼
헐벗고 닳아가면서 비질하고 있다
누군가 밟고 디뎌야 할
마룻바닥의 티를

 

티 나지 않게

 

 

 

 

동상
경제 신문에 나오지 않는 장면들 / 김희원

 

 

동전을 쥐기에는 늦은 시간
운동화 끈이 보도블록을 파고든다
다시 찾아온 노숙의 열대화
커피 잔을 든 사람들 속에서
사내는 땟국도 말라갔다
갑자기 운동화는 힘이 솟고
금은방 앞으로 달려간다
신문지에 덮여있는 음식들 앞에서
사내는 무릎을 꺾는다
한 젓갈의 냉면이
잔반에 섞여 다홍색으로 울고 있다

 

그에게 오는 것들은
꼭 한 번씩은 운다

 

사내는 젓가락을 든다
떡진 머리칼이 곤두서고
면발이 들어온다
금은방 문이 열렸다 닫히고
그림자 하나가 지켜본다
한 발짝 물러나는 거리의 사람들
신문은 바람에 넘어가고
최저임금이 조정되었다는 소식이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이순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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