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페인트 공 / 성영희 [2017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문근영 2019. 2. 11. 10:09


페인트 공 / 성영희

그에게 깨끗한 옷이란 없다
한 가닥 밧줄을 뽑으며 사는 사내
거미처럼 외벽에 붙어
어느 날은 창과 벽을 묻혀오고
또 어떤 날은 흘러내리는 지붕을 묻혀 돌아온다
사다리를 오르거나 밧줄을 타거나
한결같이 허공에 뜬 얼룩진 옷
얼마나 더 흘러내려야 저 절벽 꼭대기에
깃발 하나 꽂을 수 있나

저것은 공중에 찍힌 데칼코마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작업복이다
저렇게 화려한 옷이
일상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끊임없이 보호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리 거미가 정글을 탈출할 때
죽음에 쓸 밑줄까지 품고 나오듯
공중을 거쳐 안착한 거미들의 거푸집

하루 열두 번씩 변한다는 카멜레온도
마지막엔 제 색깔을 찾는다는데
하나의 직업과 함께 끝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가 내려온 벽면에는 푸른 싹이 자라고
너덜거리는 작업복에도
온갖 색의 싹들이 돋아나 있다


 《2017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이순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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