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꼽추 / 김기택

문근영 2019. 1. 19. 08:43

꼽추

 

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끔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김기택 시집 / 태아의 잠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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