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청탁한 시
박지웅
산 자들이 쓰다 버린 문자는
무당이 주워
쓰거나 귀신이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숨결을 타지 않은 말의 육체가 사라지듯 지하에 묻힌 말도 불러낼
수 있다 그것을 아는 자는 글씨를 함부로 땅에 쓰지 않았다 망자로
이야기꽃을 피운 자리는 불을 질러 귀문鬼門을 닫았다
불탄 자리를 뒤적이면
가끔 다 타지 않은 편지가 나왔다
아이들은 글씨를 주머니 깊이 넣어두었다가 먼저 잠든 사람의 머
리맡에 몰래 뿌리곤 했다 미처 하지 못한 말 닿지 않은 글이 귓속으
로 들어가면 꿈자리가 사나왔다 귀신과 공모한 아이들은 쾌활했으나
비극이란 애초에 모두 즐거움이었다
어떤 불행은 등잔불도 켜두지 않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까마귀처럼 웅크리고 꿈을 꾸었다 흰
나무의 미간에 푸드득거리며 떨어지는 꿈, 저승은 봄이었다 귀신들이
꽃잎으로 나무의 말을 헤아리는 밤이었다
쓸쓸함을 열고 까악까악 우는 백목白木의 숲
그곳에는 꽃잎으로 가려둔 꿈의 함정이 있다
꿈에 덮인 꿈을 잘못 밟았다가 더 깊은 명부로 떨어지면 지층 사이
에 버려진 집터가 나온다 다만 흐린 초성初聲으로 남은 길과 벽과 사
방, 재가 된 방 안에 들어서면 시커멓게 바스러지는 발바닥
어떤 꿈은 몇 번을 깨어나야
겨우 꿈의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
그는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던 방언을 중얼거린다 무명無名에 입술
을 댔다가 지하의 말이 입속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목젖으로 올
라오는 누군가의 혀들, 귀문에 살아나 흩어지는 홀씨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19년 신춘문예 당선작 들 (0) | 2019.01.19 |
---|---|
[스크랩] 꼽추 / 김기택 (0) | 2019.01.19 |
[스크랩] 봄비 / 정진규 (0) | 2019.01.19 |
[스크랩] 몽상가의 턱 / 오현정 (0) | 2019.01.19 |
[스크랩] 석이石耳 / 정용기 (0) | 2019.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