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귀신이 청탁한 시 / 박지웅

문근영 2019. 1. 19. 08:43

귀신이 청탁한 시


               박지웅


 

산 자들이 쓰다 버린 문자는

무당이 주워
쓰거나 귀신이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숨결을 타지 않은 말의 육체가 사라지듯 지하에 묻힌 말도 불러낼

수 있다 그것을 아는 자는 글씨를 함부로 땅에 쓰지 않았다 망자로

이야기꽃을 피운 자리는 불을 질러 귀문鬼門을 닫았다


불탄 자리를 뒤적이면

가끔 다 타지 않은 편지가 나왔다


아이들은 글씨를 주머니 깊이 넣어두었다가 먼저 잠든 사람의 머

리맡에 몰래 뿌리곤 했다 미처 하지 못한 말 닿지 않은 글이 귓속으

로 들어가면 꿈자리가 사나왔다 귀신과 공모한 아이들은 쾌활했으나

비극이란 애초에 모두 즐거움이었다


어떤 불행은 등잔불도 켜두지 않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 까마귀처럼 웅크리고 꿈을 꾸었다 흰

나무의 미간에 푸드득거리며 떨어지는 꿈, 저승은 봄이었다 귀신들이

꽃잎으로 나무의 말을 헤아리는 밤이었다

쓸쓸함을 열고 까악까악 우는 백목白木의 숲

그곳에는 꽃잎으로 가려둔 꿈의 함정이 있다


꿈에 덮인 꿈을 잘못 밟았다가 더 깊은 명부로 떨어지면 지층 사이

에 버려진 집터가 나온다 다만 흐린 초성初聲으로 남은 길과 벽과 사

방, 재가 된 방 안에 들어서면 시커멓게 바스러지는 발바닥


어떤 꿈은 몇 번을 깨어나야

겨우 꿈의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


그는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던 방언을 중얼거린다 무명無名에 입술

을 댔다가 지하의 말이 입속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목젖으로 올

라오는 누군가의 혀들, 귀문에 살아나 흩어지는 홀씨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