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개미 / 이경림

문근영 2019. 1. 19. 08:38

개미  /  이경림

 

첫 새벽,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보았지요

묵언처럼 곰곰

지나가는 당신을

 

문득 달려든 형광 빛도

천길 위에서 내려다보는 한 시선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가지런한 속도로 가고 계셨지요

 

形容을 알 수 없는 쬐그만 얼굴로

털실 보푸라기 같은 다리로

끊어질 듯 가는 허리로

집채만한 空을 지시고

 

식탁 다리를 지나

의자 다리를 돌아

내용 없는 상자의 긴 모퉁이를 돌아

바싹 마른 걸레 위 울퉁불퉁한 길을 힘겹게 지나

얽힌 전선들 사이로 난 끈적한 먼지의 길을

다만 지나가고 계셨지요

 

발자국 소리 하나 없었지요

한 번 뒤돌아보시지도 않았지요

 

아아, 당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었는지......

하염없이, 거대한 은빛 냉장고 밑으로 사라지고 계셨지요

 

잠결이었어요

오줌 누러 갔다 오는 몇 발짝 사이

 

어떤 미친 시간이 오토바이를 타고 굉음으로 달려가는 사이

글쎄 백년이 지나갔대요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이쁜유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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